회복의 은총 2001-12-13 21:11:53 read : 109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12월 02일
사 61:1-9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국제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해외에서 참석한 목회자들을 포함한 372명의 목회자들과 함께 많은 은혜를 받았고 또한 많은 도전도 받았습니다. 앞으로의 교회는 목회자들만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헌신된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의 미래가 좌우되며 평신도가 잠자고 있거나 주저 않아 있는 교회는 절대로 건강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다양한 은사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잠자고 있는 평신도들을 깨워 앞장세우는 교회가 앞으로의 미래시대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Bill Hull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의 손에 독점적으로 남아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교인들의 손에 넘겨준 것이라면 두 번째 개혁은 교회를 섬기고 충성을 담당하는 사역을 교인들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다." 앞으로의 교회론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평등시리즈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40대부터 시작되는데, 40대는 지식의 평등이라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평등하고, 50대는 외모의 평등이기에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평등하고, 60대는 성의 평등으로 능력이 많고 적은 것이 차이가 나지 않고 평등하며, 70대는 건강의 평등으로 건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거기가 거기이며, 80대는 재물의 평등으로 재산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 평등해서, 먹어봐야 겨우 하루에 서너 번 먹는 것이고 많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어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90대는 생사의 평등으로 살아있으나 죽으나 평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식의 평등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심히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생동안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배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한 대기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미 받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불행한 조건에 있는 사람이나 겉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나 마음 가운데에는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실패의 상처, 불신의 상처, 욕심의 상처, 미움, 원망, 낙심, 갈등, 열등감, 이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마음에 남아있어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런 것들이 크게 작용할수록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만족하거나 행복해 하지 못하고 어둡고 굴절된 삶을 살게됩니다. 조건이 나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에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면 행복도, 진정한 기쁨도, 만족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는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이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입니다. 벤자민 플랭크린은 “빈 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빈 자루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세우려면 곡식을 담으면 됩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일, 의외로 쉬울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주님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우리의 오랫동안 입은 상처와 메말라버린 심령이 소생하는 축복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손, 구원하시는 손, 축복하시는 손입니다.
어느 분의 신앙간증
결혼하고 임신 6개월만에 파경을 맞게 되는 딸에게 보낸 엄마의 편지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에게! 창 밖에는 함박눈이 온 종일 내리고 있구나. 임신 6개월인 네가 그토록 큰 고통을 겪고 있다니 엄마는 잠을 편히 이룰 수가 없구나. 흐느껴 우는 네 울음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해서이다. 그러나 얘야, 임신 6개월의 신혼에도 고통은 있는 법이란다. 너는 네가 아빠와 같은 남편, 엄마와 같은 아내가 못될 것 같은 결혼 생활에 불만을 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사실 너의 아빠와 나에게도 너도 모르는 깊은 상처가 있었음을 고백하고 싶구나.
네가 결혼식을 마치고 네가 살았던 집을 떠나는 날, 엄마는 놀랍게도 아빠와 이혼하기로 결심을 했단다. 딸을 결혼시키자마자 이혼하려고 결심했던 엄마의 고통이 있었단다. 아빠와 나와는 서로에게 필요한 사랑과 관심은 전혀 없는 생활이었다. 엄마는 25년 동안 아빠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을 했었다. 부끄럽지만 아빠는 25년 간 엄마에게 무관심한 사람일뿐이었다.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먹고살아야 하는데 엄마는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직 너 하나만 사랑했었다. 그런 네가 결혼해서 나가니 나의 결혼 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정도였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는 아빠와 헤어져서라도 다시 살고 싶었단다.
그러나 바로 그때 사랑이신 예수님이 엄마의 삶 속에 조용히 찾아와 주셨다. 그것은 놀라운 은총이었다. 그분은 엄마에게 새로운 가치, 새로운 위치, 새로운 집을 찾게 하셨단다. 결혼 생활이란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도 깨닫게 해주셨다.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고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고 보다 강하고 튼튼한 위치에서 아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시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나 다름이 없는 단계이지만 엄마의 결혼생활에 더 이상 실패가 따르지 아니하리란 믿음과 확신도 갖게 되었단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방황을 하지 않게 되었단다. 어떤 고통도 이길 수 있게 되었단다. 환경은 다를 바가 없지만 나는 진정 안식처를 얻게 되었단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너를 사랑이신, 진리이신, 생명이신 사랑 속에서 키우지 못한 엄마의 무지를 용서받고 싶구나. 이제 내가 너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음으로 이 성경책을 보내마. 참으로 간절히 두 손 모아. 엄마가 보내는 성경책을 읽으면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꾸려나가 보아라. 예수님을 발견해 보도록 노력하여라. 예수님이 너의 삶 속에 오시도록 기다려 보아라. 네가 신혼이듯이, 엄마 또한 영적인 의미에서 신혼이나 다름이 없단다. 그러나 나에게는 벌써부터 예수님 안에서 참 기쁨을 선물로 받고 있단다.
사랑하는 내 딸아! 엄마는 무엇보다도 너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리는 믿음을 갖게 되기를 엄마는 바란다. 너와 네 남편과 태 안에 있는 아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교통하심 속에 살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만 줄인다. 너의 부족한 엄마가"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집을 찾아주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인생의 평안을 주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안식을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인생의 진정한 집, 그 고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는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돌아올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히 쉬는 집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집단 심리학 이론 속에서 사이가 가까워 갈수록 미움도 자라나고 상처를 입게 된다는 말을 쇼펜하우어의 우화 고슴도치 이야기를 인용하였습니다. 겨울날 아침이었습니다. 고슴도치 한 쌍은 추위에 떨며 지내다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데우기 위해서 몸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들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몸에 돋친 수많은 가시가 서로를 찔러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상처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고슴도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몸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에 부딪쳐 상처를 입듯이 마음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 마음을 상한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상처받은 마음을 마음이 상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포로 된 자(신분 자유인이 아님), 갇힌 자(신분 죄인이 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그 당시 상황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자신의 사역에 직접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눅 4:17-21)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단순히 육신적인 포로에서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마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1절의 가난한 자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만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 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마음이 상한 자, 2절의 슬픈 자, 위로, 3절의 희락, 근심 등 모든 것이 마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다 결국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희락이 없습니다. 슬픔이 가득합니다. 위로가 없습니다. 근심이 검은 구름으로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상처가 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상하였다는 말은 원어의 의미는 깨어졌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품을 떠나는 순간 마음이 땅에 떨어져 깨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 아무리 채워도 차지 않습니다. 굶주림은 계속됩니다. 돈으로 명예로, 학식으로 권력으로 환락으로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깨어진 마음 상처 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까? 오늘 본문처럼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됩니다. 결국 포로 된 자가 되어 버립니다. 신분이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삶의 환경이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더 의지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우리의 상한 마음은 결국 이렇게 전개되어 집니다. 처음에는 상한 마음은 결국 포로 된 마음으로 포로 된 마음은 갇힌 마음으로 진전됩니다.
우리를 상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하여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육체가 다치면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감각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조금 있으면 통증이 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의식이 발동합니다. 그것이 죄의식입니다. 수치를 느끼게 됩니다. 열등감이 생깁니다. 분노하게 합니다. 증오합니다. 미워하게 합니다. 좌절감이 생깁니다. 사람들을 기피합니다. 다른 것을 이룸으로 보상받으려고 합니다.(방어기제) 자기의 약점이나 열등감을 들어내지 않고 위장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여 모든 것을 잊음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합니다.(도피 기제). 자신에게 상처 준 대상에게 복수를 합니다.-공격기제
이렇게 하면 상처가 치유될 것 같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입니다. 단지 감추어졌을 따름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지만 예수님께 자신의 상처를 내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움의 포로, 원망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려고 합니다. 남을 것을 끌어들여 자신의 것인 양 과시하는 것입니다.
상처 속에서 뒹굴던 [영적 치유]라는 책을 쓴 "케이 아더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남편의 자살로 인한 상처, 남편과의 별거로 인하여 두 아들에게 준 상처, 그리고 그 후 계속 정결치 못한 삶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준 더 큰 상처 등.. 모든 저의 상처가 이제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겨우 치유되어, 마치 오랜 병상 생활을 했던 사람이 겨우 활동을 조금씩 하는 그러한 삶을 사는 여인이 아니라, 자기와 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는, 멋진 사역을 하는 여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킨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 우리의 상한 인생, 상한 마음의 치유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음 상하지 않는 자가 아닙니다. 자유로운 자가 아닙니다. 상하고 찢긴 영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다 감싸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치유자가 되십니다. 참된 해방을 주십니다. 참 자유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우리 주님을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여 줍니다. 가난한 자는 육적으로 영적으로 핍절한 자 모두를 포함합니다. 마5:3에는 마음의 가난함을 눅6:20 물질적인 가난함으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복음을 말합니다.(삼하4:10; 사40:9; 41:27; 52:7)
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신의 기름 부은 받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신다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쁜 소식, 구원의 복된 소식,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지요. 메시아께서 오셔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원의 해를 선포했습니다. 메시아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구원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을 믿고 영접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자로서 역사를 하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자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실 때, 그가 전하는 소식이 믿는 자에게는 은혜의 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신원의 해, 심판의 날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우리는 대강절을 맞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날이지요. 이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 믿는 여러분들, 우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의 소식, 은혜의 소식을 전파하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곤고한 모든 것에서부터 일어서고 회복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회복시키시는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는 사람들을 회복시키십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감옥에 갇힌 자, 슬픈 자, 이 모든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고 격려를 받고 치유를 받고 자유를 얻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되고 그들이 회복된다는 그런 말씀이지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들, 회복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희망의 빛을 보게되는 것이고,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이고,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3절 말씀에는 특별히 깊은 슬픔과 근심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워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슬픔에 빠졌어요, 절망에 빠졌습니다. 넘어져 있습니다. 처참한 상황에 있습니다.
메시아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단장해서,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서 그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게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넘쳐나게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서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고, 나라가 다시 일어선다든지, 우리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든지 하는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절망적인 사람들, 낙심하고 좌절하고 슬픔이 가득 차고 근심이 가득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나라를 다시 세우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회복의 말씀을 오늘 이 본문 말씀 가운데 볼 수가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면,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 슬픔과 근심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회복된다는 역사입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지다 보니까 가정이 깨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슬픔가운데, 절망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세움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 인간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시 오시면 또 황폐하였던 땅이 회복되고 무너진 성과 성전을 다시 수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면, 약속으로 받았던 땅이 회복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게 되고, 본래의 기업을 다시 회복된다는 말씀을 합니다. 나라가 다 망했어요, 다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이 약속 받았던 그 땅, 그 기업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고, 성전을 다시 쌓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기업이 회복되고 그들의 사회가 복원되고 그들의 공동체가 회복된다는 것이지요. 황폐된 들, 무너진 성, 이 모든 것들이 회복되면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 암울하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만, 메시아가 우리 가운데 오면 우리 사회가 회복되고 우리 공동체가 회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세 번째로 회복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래의 지위와 직분입니다.
6절 이하의 많은 말씀을 보면, "너희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해를 전파했고, 그래서 절망하는 인간, 황폐된 땅, 떨어진 직분을 전부 회복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시고 근심을 평안으로 변하게 하고 찬송으로 변하게 하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이 성탄절에 메시아를 모셔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에 있어서, 여러분의 가정에 있어서, 또 우리 교회에 있어서, 여러분들의 직장이나 이웃이나 사회 속에서 메시아를 모셔들임으로 인해서 메시아가 여러분이 있는 곳곳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 받은 백성들이 또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 은혜를 선포하고 여호와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그 직분을 감당함으로 인해서 우리 가정이, 우리교회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 은혜가 넘쳐나고,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침체에 빠져 힘들어하시는 분들, 건강의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고 계신 분들,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매우 힘들어하시는 분들, 교회생활하면서 심각한 영적 시험에 빠져 신앙생활에 침체를 맞고 있는 분들, 상한 심령으로 심히 마음 아파하는 분들, 구원의 감격과 처음사랑과 열정을 모두 잃어버리고 싸늘하게 식은 믿음으로 힘들어하시는 분들, 모두에게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이 가득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