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2001-12-13 20:58:28 read : 109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9월 2일
시 91:14-16
힘써 하나님을 아는 자가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중매결혼이든 연애결혼이든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 서로 사귐의 시간을 가지고 교제를 한 후에 결혼을 하지만 그 기간이 한 달이든 10년이든 서로 충분히 알고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이란 상대를 다 알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함으로써 상대의 실상을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마다 상대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상대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태어나서 줄곧 함께 살아온 부모님에 대해서도 다 알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허다한데 어떻게 몇 번, 혹은 몇 십 번을 만나고서 상대를 온전히 알 수 있겠습니까? 아는 게 있다면 고작 꾸며진 상대의 허상이거나 잘못된 편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대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알 수 있는 길을 영영 놓쳐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부부가 한 지붕 아래에서 몸은 함께 살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한평생 평행선을 긋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상대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결혼함으로, 그래서 함께 살기 시작하므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바다 보다 더 넓고 깊은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서로 바로 알아 상호 보완함으로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의 희열을 더불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제이든 상대를 다 알았다고 판단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길은 봉쇄되고 맙니다. 그것은 상대의 가능성과 자신의 가능성을 동시에 축소시키고 왜곡시키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나 한평생 상대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아니할 때, 비로소 상대의 실상을 온전히 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한 집에 동거한다고 해서 상대를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함께 동거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모르기가 더 쉽습니다. 부부가 서로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동거 그 자체보다도, 상대를 알려고 하는 마음, 상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는 부부의 동거는 그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행복과 기쁨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알고자 함이 없는 동거란, 실은 괴로운 고통과의 동거일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충분히 알고있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신앙 생활한 그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지 않는 믿음생활이란 결코 완전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못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님을 이 땅위에 보내신 목적, 하나님께서 주님께 이 땅의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에게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풀이하면 참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이 세상에서 누릴 수도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왜 이처럼 당연한 말을 죽음을 목전에 둔 이 다급한 순간에 거듭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음은, 인간들이 정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이 영생을 얻기는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알려고는 하지 않으며, 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저 되는 일이 아님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동사는 `동침한다", `동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부가 한평생 동거할지라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아니하면 일생 남남으로 살 수 밖에 없거늘,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과 노력 없이 어찌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간 이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화폐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던 사람이 있었는데 수집하는 화폐의 출처는 주로 무덤이었습니다. 옛날 죽은 자의 관속에 산 사람들이 저승에 가는 노자 돈으로 쓰라며 넣어준 화폐를 도굴꾼들이 도굴하여 화폐상을 거쳐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어느 날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승에 잘 가라며 노자 돈을 넣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한 채 썩어버리고, 오히려 그 노자 돈 때문에 신성해야 할 무덤은 도굴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돈은 그 액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인간의 죽음 이후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 분은 아예 옛날 돈 수집하는 취미를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 덧없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또한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여호와를 알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만 바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를 결코 책임져 주지 못하는 돈을 위해서는 한평생을 걸면서도,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영생은 시작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리며, 구가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의 삶, 생명의 삶에 부전승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귀한 찬양의 시입니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불안에 싸여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불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생명에 대한 불안, 여러 가지 사고에 대한 불안, 실직과, 질병과, 가족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보험의 종류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전에는 생명보험, 화재보험, 자동차 보험 정도밖에 몰랐는데, 지금은 들어 보지도 못한 수없이 많은 보험들이 생겼습니다. 이는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여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보험을 가지고는 사후 해결능력은 있을 지 모르나 예방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조심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시편말씀 가운데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묘사하고 있는 단어들을 찾아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하신 자의 그늘....여호와는 나의 요새요.... 피난처.... 방패와 손 방패요...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보디가드요.... 우리의 보초요... 우리의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를 보호만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삶의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의 의지가 되어 주십니다.
시편 91편은 삶의 숱한 역경 중 체험한 절대 신앙의 고백 시이며, 본문은 험난한 인생여정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완전한 최고의 복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한 조건이 전제되어 있는 약속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건지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높이시며, 그들이 간구하면 응답하시고, 환란 때에 건져 영화롭게 하시며, 장수로 만족케 하시고, 구원으로 보여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택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여 내 그늘 안으로 들어 오라”고 하심에도 폭염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고통의 추운 세상에서 떨지 말고 내 깃 안으로 오라”고 하심에도 하나님의 깃을 피하여 괴로운 세상으로 가며, “내 안에 있으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날 것이니 내게서 떠나지 말라”고 하심에도 사냥꾼의 덫 속으로 달려간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의 사랑이 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이 곤고와 위험에 놓이게 됨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 하나님의 차별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앙인 실직자 10계명"이라는 글에는 신앙인 실직자를 위한 10가지 조언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는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동료나 친구에게 부탁해야 하는 직업은 삼가라.
셋째는 엘리트 의식을 버려라.
네 번째는 나도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라. 실직을 하면 내가 무능력해서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쉬운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감이나 자기 비하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사회 구조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는 내 탓이려니 생각하라. 실직이 되게 되면 회사 상사 등 여러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데 개인에 대한 그런 원망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라.
일곱 번째는 가정은 언제나 당신의 안식처이다.
여덟 번째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라.
아홉 번째는 기도하라.
열 번째는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로 피난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때에 오늘 시편 91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15절 말씀에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여러 약속 중에 가장 중요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서 그에게로 간다는 말이지요. 왜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곳이기 때문에 안전하고 편안하고 포근한 곳입니다.
건지리라, 높이리라
“저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14절)”"사랑한 즉’이라는 히브리어 ‘하샤크’는‘달라붙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또한 ‘하샤크’에는‘헌신하다’라는 뜻도 있어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순종에 의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는 조건이 전제된 약속과 성취의 말씀으로 ‘가지’는 인간이요, ‘포도나무’는 주님이시며, ‘붙어있어야’는 연합하는 사랑이요,‘열매’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안즉’이란‘믿는다’"인정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인격적 신뢰를 의미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중국 해남도의 나비공원에는 중국전역에서 모아온 모든 종류의 나비 3천 마리가 그물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물 안에는 각종 나무, 수백 종의 꽃, 흐르는 계곡 등 나비들이 살 수 있는 생활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나비들을 가두어 놓은 것 같지만, 오히려 나비들이 그곳을 떠나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나비의 생태에 맞는 모든 것이 제공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을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사는 것만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모든 은택과 복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답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4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신앙이란 진리에 대해 머리로 승인하는 것 뿐 아니라 신앙이란 사랑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임을 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을 받고 무한한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꼭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을 해 주어야만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14절 하반부의 <저가 나를 안즉>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으로 아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야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실 수가 있습니까? 어느 성도는 "마귀가 하나님을 향한 내 앞에 석벽(石壁)으로 막을지라도 나는 그 석벽을 뚫고 들어가면서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풋사랑에 그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조금만 어려움이 오고, 조금만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돌아서 버리는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안전하게 평안하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만 바라고 사는 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건지심과 높이심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Tolstoi)는 제정 러시아의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부러울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중년에 죄에 대한 번민, 절망에 깊이 빠졌고, 친구도, 학자도, 부모도, 형제도 문제해결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빈궁한 농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이 기쁨에 차 활기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유심히 관찰하던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다”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삶은 운명에 맡기고 체념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고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톨스토이의‘인생론’의 주된 내용입니다.
응답하리라, 영화롭게 하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절)” 이는 하나님과 사랑의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들에 대한 안전보장과 승리의 약속이십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인간은 죄악, 질병, 시험, 유혹, 상처, 고통, 가난이라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허나 하나님께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환란 때에 동행하시어 건져내시고 영화롭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영화롭게’란 "하나님께서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키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친구로 대하시어 고귀케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높으신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영화로운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바너스(Barnes)의 말입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귀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호5;1)”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하나님을 빨리 사랑하면 할수록, 빨리 만나면 만날수록, 빨리 알면 알수록 행복 또한 그만큼 빨리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선 응답의 근원자 이시며,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섬김은 응답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확신이며 신뢰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 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해도 하나님께선 우리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나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고, 나의 간구에 응답하실 힘을 갖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완전한 질서 속에서 변함 없이 이어지고,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언약사건은 희망과 소망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기존 질서와 긴장관계 속에 서게 한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것은 머리나 입으로 아는 앎이 아니라 믿음의 가슴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다시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 하나님을 모른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이‘바울’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새롭게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개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다시 아는 것이다. 이미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새삼스러이 나의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은 원래 알았지만 몰랐던 것을 다시 아는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시각장애자에겐 색채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아니하고, 귀머거리에게는 음악의 감미로운 선율이 들리지 않습니다. 믿음 없는 가슴으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체험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현존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족케 하리라, 구원으로 보이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16절)” 인간은 누구나 장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에게 장수의 복을 주셔서 만족케 하시고, 세상에서의 구원을 보여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장수’는 하나님의 은총표시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의인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복으로 여겼습니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시21:4)” ‘만족’이란 그 어떠한 것보다 값진 것으로 참 만족의 행복 비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생의 최고 만족은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과의 바로 된 관계에서만 얻어 집니다.‘만족된 마음은 왕관과 그 나라를 이미 소유한 것과 같다’이는 그린(Green)의 말이며, “만족함은 왕국보다 앞선다”이는 영국 속담입니다. ‘구원을 보이리라’이는 현세의 실질적 삶에서 당하게 될 수많은 고통으로부터의 건짐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까지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자, 하나님께서 친구로 여기는 사람은 세상의 어떠한 시련, 고난에 빠질지라도 실족치 않게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따릅니다. 때마다 일마다 구원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현재의 괴로움 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일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으로서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벗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구원은 유(有)를 팔아 무(無)를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진주조개 속에 이물이 들어감은 일종의 암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고통 속에서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닥친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진젠도르프(Zinzendorf)백작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조건과 지위를 다 버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런 그에게 친구들이 물었답니다. “자네의 야망은 도대체 무엇인가?”“오직 그분, 예수 그리스도 뿐일세”보석을 소유함이 만족이 아닙니다. 어쩌다 비켜나감이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의 만족케 하심과 건지심을 일생동안 받고, 살아감이 진정 복된 만족이요 구원입니다. 의례적, 형식적 감사가 아닌, 날마다, 순간마다 나를 건지시고, 높이시며, 응답하시고, 함께 하시며, 만족케 하시고 구원을 보이시는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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