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하는 기술 2001-12-13 20:52:37 read : 105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7월 15일
고전 1:4-9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을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참 난감한 경우를 가끔 마주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입니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이 아들에게 꼭 야단쳐야 할 만한 일이 있는데, 사춘기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가 막막합니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지난번 언젠가처럼 가출해 버릴 것 같고,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고. 이 어머니는 매일을 고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 볼까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부인인데, 남편은 마지못해 교회에 따라다닙니다. 집안에서 남편이 얼마나 독재적인지, 부인은 마음고생이 매우 심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교회에 나가 준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또 쌓여서, 언제 폭발하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갈등은 부모와 자녀간에, 혹은 부부간에 흔히 겪게 되는 일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가족 이외의 인간관계에서도 말을 해야겠는데 하기는 참 곤란한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구역장으로서 한 구역식구를 바라볼 때, 혹은 같은 교인의 입장에서 바로 옆에 있는 다른 교인을 바라볼 때, 무엇인가 신앙적인 충고를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가 뭔데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될 것 같아서 망설이게 됩니다. 아니면, 직선적으로 한 마디 했다가 서로 얼굴도 안 보는 사이로 변해 버리는 경우도 때로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러한 삶의 질문을 안고 바울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경우를 누구보다도 많이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각지를 다니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어서 한 교회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얼마 뒤 그 곳을 떠나 새로운 전도지로 갑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어 보아야 2년, 짧으면 한두 달입니다. 그런데도 세운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발전을 해 나갑니다. 전도하고, 장로를 세우고, 제도를 갖추어 나갑니다. 상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교회의 발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도여행을 오랫동안 계속하면서, 그의 귀에는 교회의 여러 문제들이 들려옵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유오니아와 순두게가 서로 싸우는데, 그들 때문에 교회가 온통 야단이예요.", "고린도교회에서는 꽤 여러 사람이 공동식사 시간에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안 나오게 되었대요.", "갈라디아교회에서는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생겨서, 교인들이 흔들리고 있답니다." 어느 한 교회, 문제없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옆에서 돌보아 주지 못하는 아이가 탈이 잘 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바울이 낳은 영적 어린아이들은 여러 면에서 탈이 많이 났습니다. 영적 어머니인 바울이 떠나가고 나면 그들 스스로가 모든 일을 해결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먹지 않아야 할 음식도 먹었고, 듣지 말아야 할 말도 들었고, 하지 않아야 할 위험한 일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소식들을 듣습니다. 더욱 그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당장 달려가서 그러한 일들을 해결해 주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옥에 갇혀 있어서 못 가기도 했고, 때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너무나 바빠서 못 가기도 했습니다. 교통수단이 불편한 시절이니, 각 교회의 문제들을 들을 때마다 해결을 위해 뛰어다닌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이것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물며 편지를 통해서, 그것도 배달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편지를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한 통 한 통의 편지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기도와 연구와 고민을 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편지들은 때때로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교인들이 그 편지를 보고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는 대단히 단호합니다. 보통으로 말해서는 완고한 고집을 지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서 바울은 편지를 썼습니다. 자신이 낳은 영적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이유식을 먹이는 심정으로, 행여나 탈이 날까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잠깐 쉬라>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즉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까닭은, 고린도라는 도시가 유혹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는 화려한 문화가 있었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추악한 모습 또한 많았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믿기 전에는 그러한 추한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고, 믿은 후에도 그 유혹은 늘 따라다녔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바울이 떠나자 고린도교인 중에는 이러한 주변 환경에 다시 물들어 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 주어야 할까요? 도저히 갈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 바울은 펜을 들었습니다. 무엇부터 써야 할까요? 이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3절까지는 문안 인사입니다. 그리고 4절부터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합니다. 4절 말씀을 함께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늘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앞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책망하는 첫 번째 기술입니다. 내가 꾸짖어야 할 사람들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하다구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합니다. 어지러운 삶의 도시 고린도 안에서 이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 이것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꾸짖을 때가 있다면, 우리도 이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아기 어머니가 무엇을 먼저 봅니까? 아기가 잘 생겼는지를 보겠습니까? 얼마나 착하게 자랄 것인지를 생각하겠습니까? 출산한 어머니가 감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건강이나 생김새는 그 다음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에서 영적인 자녀들이 태어나서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교회생활이 어떠하든, 주변에서 무슨 말을 듣든, 그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들도 누구나 그러한 감사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는 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보기 싫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남편이나 아내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항상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뭐, 따지고 보니 감사하네요." 이 정도가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한국 남자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표현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자분들도, 서운한 이야기, 화제가 될 만한 이야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표현하고 말하기를 잘 하시지만, "내가 당신으로 인해서 항상 감사해요" 이런 표현을 잘 하는 분은 그리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책망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옆사람에게 한 번 말해 보실까요? "당신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로 인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앞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로 인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예, 이런 감사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 인해 감사한다고 했는데, 그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는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을 고의적으로 어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사람들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오직 한 가지의 사실로 인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감사의 말을 듣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되새겨주게 됩니다. 또 바울의 목적 중의 하나도 그 되새김을 주는 데 있었습니다. "너는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고치기에 앞서, 은혜 안에 있다는 것, 이 한 가지의 사실을 확실하게 되새겨주고자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함께 읽어 보실까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은 문안 인사를 통해서도, 너희는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지,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지!" 이 깨달음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면서도 잊고 있었던 것, 마음 한쪽 구석에 밀어 놓았던 것,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주는 통로가 바로 그 사람을 향해 내 입에서 나오는 감사의 말입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도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한 감사를 가져 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시다니,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예요.", "어려운 사업 여건 가운데에서도 이만큼 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예요.", "이렇게 사업은 잘 안 되지만, 우리 가족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런 말을 나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변화의 한 걸음을 내디디게 됩니다.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시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책망의 첫 번째 기술이 감사라면, 두 번째 기술은 칭찬거리를 찾아내어 구체적으로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7절까지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듣는 사람 어깨가 으쓱해질 만한 칭찬이라는 사실이 보이십니까?
바울은 늘 이렇게 칭찬거리를 찾아냅니다. 로마서에 보면,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을 제치고 자기가 지도자가 되어 보겠다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전도의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기뻐하며 칭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교인들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 대해서 칭찬합니다. 데살로니가서에서는 환난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따름으로 본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칭찬합니다. 바울의 모든 편지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거든요. 그렇지만 바울은 그 해결해야 할 문제를 먼저 꺼내지 않습니다. 칭찬할 만한 일을 먼저 꺼내어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꾸짖기 위한 단순한 전초전으로 칭찬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약삭빠른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겉치레를 통해서는 사람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는 칭찬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그 말들 가운데 편지 받는 이들을 향한 사랑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그 진정을 편지 받는 교인들이 보았고, 오늘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책망해야 할 일이 쌓여 있더라도, 그 일에 앞서서, 그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바울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사와 칭찬이 먼저 우러나왔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호되게 야단치지 않고 오냐오냐하면서 칭찬만 해 주었기 때문에 문제인데, 거기다가 또 칭찬을 하라니, 그것은 좀 곤란하다고 혹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우려가 사실 있습니다. 이른바 왕자병, 공주병이 걸려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칭찬을 더 해 주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왕자병이 걸리고 공주병이 걸리는 것은 진짜 칭찬 받을 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그들에게는 진정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냥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부모임이 영적인 눈을 가지고, 진정 칭찬할 만한 일을 칭찬해 준다면, 그 아이가 공주병 걸릴 확률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진정 칭찬할 만한 일, 그것은 복음과 관계된 일입니다. "네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렇게 겸손한 말을 다 하는구나", "역시 예수 믿는 아이는 다르구나", 믿지 않는 자녀에게는 "네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은 예수님이 주시는 거야" 아이가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듣고 자랄 때, 그는 진정 복음 안에서 겸손하고 바르게 행하는 아이로 자라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부 잘 했다고만 칭찬하고, 경쟁해서 이겼다고만 칭찬합니다. 이렇게 칭찬하면, 그 칭찬을 받는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공부 잘 한 것을 칭찬할 때에도, 그렇게 명석한 머리를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찬양한다는 표현을 아이 앞에서 해 보십시오. 물론 자녀교육만큼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길은 은혜 안에 거하는 부모로서, 본인이 느끼는 삶의 은혜를 몸으로, 그리고 진솔한 말로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먼저 아이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솔한 표현을 할 만한 은혜를 부모인 내가 느끼고 있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느껴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를 대하고 칭찬하는 기준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복음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칭찬 받아야 할 일을 정확한 기준 하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는 일이야말로 주 안에서 책망 받을 만한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고린도교회에게 주어진 칭찬을 아까 우리가 함께 읽은 바 있습니다. 5절을 보면 그것은 구변과 지식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그것은 은사입니다. 여기서 구변과 지식도 은사라는 범주 안으로 포함시킬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부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의 전반적 내용으로 볼 때, 은사가 풍부하다는 것은 칭찬의 계기가 아니라 오히려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분별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가 크게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영적인 눈은, 혼란을 일으키는 은사들을 놓고 먼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칭찬을 확실하게 한 다음에 고쳐야 할 점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하게 됩니다.
감사로 책망의 첫 걸음을 내디디고, 칭찬으로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지요? 그 다음, 책망의 세 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책망 받는 사람을 향한 꿈, 그의 성장을 위한 꿈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단순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성장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눈을 뜨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현대의 우리는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성장보다는 당면 과제의 해결에 치중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사람 자체를 성장시키기보다 행동을 바꾸는 데 초점을 두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행동 하나를 바꾸고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현대의 우리들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복음을 증거하는 삶 가운데에서, 또 생업을 위한 천막 깁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 피곤한 현재의 생활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멀리 떨어진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들려 옵니다. 어지간하면 "다음에 방문하면 해결하도록 하지" 이렇게 생각할 만한 바쁜 생활입니다. 혹은 그저 당면 과제만 급히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필기도구가 시원치 않기 때문에 쓰다가 찢고 다시 쓸 수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처럼 컴퓨터로 입력해 놓았다가 수정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이토록 영감이 넘치며 구성과 논리까지 뛰어난 장문의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겠습니까? 게다가 바울은 집필활동을 위해 어디 기도원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밤을 새워가며, 때로는 대필자를 두고서, 바울은 편지를 써야만 했습니다. 단순히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성장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단순한 문제 해결만을 바랄 때, 그 문제마저도 잘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가 늦게 들어오는 문제로 고민될 때, 그 귀가시간의 문제만을 가지고 아들을 아무리 야단쳐 보아야 고쳐지지 않습니다. 혹 고쳐진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부터 부모님이 옳다고 생각하여서 고친 것은 아닙니다. 늦게 귀가할 때나 조금 일찍 귀가할 때나, 생활의 방법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고치려면, 자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꿈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남편을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그저 귀에 대고 "이렇게 좀 하자"라고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남편의 신앙을 보고, 생활을 보고, 어떤 부분이 성장해야 할 부분인지를 꿰뚫어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한 다음, 표현하십시오.
"당신도 남자예요?" 이런 말에 대해서는 "여편네가..."라는 소리밖에 돌아올 것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당신이 이러이러한 모습을 지닌 것으로 인해 기도할 때마다 참 감사해요. 이렇게 해 준다면 얼마나 기쁠지 모르겠어요." 이러한 감사와 칭찬과 꿈을 통해 사람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좀 간지러우신가요? 이게 간지러운 것은, 우리가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말하는 방법도 훈련해 보십시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꿈이 오늘 본문 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기까지 세우는 것이 바울의 꿈이요 목표였습니다.
바울이 갖는 꿈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기 위해서 빌립보서의 이야기를 잠시 하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1장 9절부터 보면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장을 위한 비젼이 "기도하노라"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풍성하지만 지식과 총명이 부족하며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바울이 한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놀라운 책망의 말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 지식과 총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하나하나씩 말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책망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름다운 입술에, 책망할 것은 책망하되, 생명을 살리는 책망, 감사와 칭찬과 꿈으로 가득한 책망을 담음으로써,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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