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있는 힘 2001-12-13 20:04:54 read : 106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3월 11일
막 4:1-9, 13-20
요즘 청소년들에게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 연예인이고 그 중에 가수가 인기가 많습니다. 가수는 세상적인 인기와 대중적인 영광을 추구하며 노력을 하는데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은혜생활을 하는 가수들이 복음성가를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덕규라는 가수가 있는데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중에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요즘 조성모가 다시 불렀는데 그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자신의 마음이 마치 가시나무 숲 같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그 메마른 가지들이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또한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이, 그 가시에 찔려 상처만 입고 가 버린다는 겁니다. 쓸쓸한 마음, 상처 입은 마음, 두려운 마음, 뭔가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 상태를 참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 라는 존재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참된 나" 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나"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진정한 나의 참모습이 아니고 거짓된 "나", 왜곡된 "나", 굴절된 "나", 잘못 파악한 "나"를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판단하는 "나" 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고 있는 "나" 사이에 많은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행복한 "나" 와 불행한 "나", 풍요로운 "나" 와 빈곤한 "나", 치유된 "나" 와 상처 입은 "나", 안식과 쉼이 있는 "나" 와 피곤에 지쳐있는 쫓기는 "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는 희망적인 "나" 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좌절감과 패배감에 젖어있는 "나",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사랑과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은 "나" 와 누군가를 위로해 주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고 인정과 존경을 주고싶은 "나" 가 있습니다.
이제는 나를 찾아야 한다
다음은 시인 장봉균 씨가 지은 시입니다.
남들이 얘기하는 내가 아닌
옷 속에 감추어진 나를.
직장에서 돌아온 늘어진 나 말고
새벽에 잠에서 깬 나를.
거울 앞에 서면
거울이 돌려주는 나 말고
거울이 바라본 나 ............
마음에 빗장 걸린 나 말고
옷 속에 감춰지고, 직장에서 감춰지고...
나조차 나를 보지 못합니다.
이건 아닌데 하며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이 낯설기만 합니다.
자신과 다른 모습의 가면으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이제는,
가면 안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얼굴을 찾는 것은 아주 많이 힘든 일일 테지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일생을 바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나"... "홀로서기"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는 승리자
우리는 누구나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에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을 "넉넉히 이기는 자"라고 한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신이 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바른 뜻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면서 로마서 8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성도들은 또한 일상생활에서 죄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케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뒤에 예수님의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외로움과 패배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일에서 승리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변함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승리자들입니다.
비록 인생은 우리를 괴롭게 하나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이 기쁨과 승리 주심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억누르는 세력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존 번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지만 신앙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늘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랫동안 출석했는데, 나는 설교를 수없이 들어 왔는데, 왜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온전히 자리잡지 못할까?"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바로 오늘 본문을 대하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매주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빼앗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에게 신앙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가 매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이 전혀 생기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매 주일 계속하여 예배를 드리러 나간 것이 참 놀랍고 신통한 일입니다. 그런데 빼앗아 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빼앗기고 있었다고 하니, 무척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또한 신앙이 생겨나지 않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니, 반가운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 날로부터 그는 사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는 길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고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된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남기는 "천로역정"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존 번연과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설교에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설교에서는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를 통해 실존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나는 지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나? 내 안의 이 공허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어느새 축도와 함께 예배가 끝납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지"라고 생각하며 다음으로 넘깁니다. 예배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교인들과 잡담을 조금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말입니다. 예배에 참석했던 사실이, 설교를 들었던 사실이, 어떤 실존적 고민을 잠시 하였던 사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공허감은 날로 쌓여갑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습
루이스(C.S.Lewis)는 길가에 떨어진 씨의 이야기를 가장 탁월하게 설명한 사람인데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관을 찾아갑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가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던 것입니다. 그 날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우연히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다가 순간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그분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 속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러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누르고 식당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그분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 때에 악마는 그 마음 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니? 소화 안 되겠다. 우선 식사나 끝내고 봐야지." 그 말대로 노신사는 식사를 끝냅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악마가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야. 하지만 오늘은 너무 바쁘잖아.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많은 거 잊지 말아야지."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노신사의 모습을 보며,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는 겁니다.
바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런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해 봅니다.
첫째는 상한 영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다가 숨이 끊어지면, 육신을 남기고 영은 이른바 영계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 때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이 세상에 남아 떠도는 영이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거나, 너무 깊은 원한을 갖고 있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영계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그런 영을 한 마디로 상한 영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왜곡된 신념을 가리킵니다. 잘못된 가치관, 어두운 기억 등으로 우리는 왜곡된 신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신념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쪽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행복이 아닌 불행 쪽으로 자신을 몰고 가지요. 자신의 성장과 진리 수용을 방해하는 생각들, 이런 것들이 바로 사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자기 마음이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이 말하는 사탄은 어느 쪽일까요? 그것은 둘째의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씨란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말씀을 들었지만 사탄이 와서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씨를 쪼아먹은 새는 바로 자신의 왜곡된 마음인 것입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에 이어, 두 번째로 돌짝밭에 뿌려진 씨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돌짝밭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설명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게 오래 가지 못하고,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는 겁니다. 우리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
귀한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좋은 지요. "맞아. 진리야."라고 생각하며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에서 무척 불리한 일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 진리의 말씀에서 다시 등을 돌립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의 말씀에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육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은 언제나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은 나를 더 편하게, 나를 더 복되게, 나를 더 형통하게 만드는 것만 찾습니다. 그러다가 나를 고생하게 만드는 것, 나를 괴롭게 만드는 상황이 전개되면, 더 이상 진리를 듣고 싶지 않게 됩니다.
축복의 기독교와 고난의 기독교를 동시에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선택할 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축복 받기 위해서만 선택하셨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보았는데 장사도 별 볼 일 없고, 자식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등을 돌리는 그리스도인들, 이 뿌리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유명한 철학자는 "그리스도의 최대의 적은 실용주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용주의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여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실용주의적인 동기로만 기독교를 선택했다면, 환난과 박해가 왔을 때 실용주의적 신앙이 설 자리는 어디입니까? 갑자기 사업이 부도가 나고,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고, 큰 병에 걸렸을 때, 실용주의적 신앙인이 설 자리는 과연 어디입니까?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등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그에게,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으로 알았는데, 거꾸로 그걸 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신앙이 나에게 빼앗아 가는 것이 있음을 알았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부자 청년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보지 않습니까?
단순히 잘 살기 위해서만, 더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만 이 자리에 나와 계신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축복을 분명히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으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근본 이유입니까?
우리는 축복의 기독교와 고난의 기독교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따르기 위해 많은 핍박과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진리는 계속 퍼져나가야 하고, 내 삶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가시밭에 뿌려진 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라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과 돈에 대한 욕심을 갖는 것, 돈에 집착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돈을 내 것이라 생각하면, 욕심이 생기고 집착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반대로 돈에 대해 움츠러들게 되기도 합니다. 돈은 내 팔자에는 없다고 생각하며 돈과 부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려는 자세 역시, 돈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돈에 대해 움츠러드는 것은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우월감과 열등감이 한 뿌리이고, 사랑과 미움이 한 뿌리이듯 말입니다.
아니, 돈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모두 귀합니다. 그 귀한 것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진리 전파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라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의 축복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첫째로 말씀이 뿌려지자마자 사탄에게 빼앗기는 경우, 둘째로 뿌려진 말씀이 싹이 나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도중에 시드는 경우, 셋째로 자라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각각 사탄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신앙과, 그리고 세상 염려 및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밭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기 위한 디딤돌인 것입니다.
나 있음은 생각이 아닌 생명의 약동
나를 찾느라 야단입니다. 그런데 언제 나를 잃은 적이 있고 내가 나 아닌 적이 있었던가요? 찾아봐도 나요 찾지 못해도 나입니다. 또 깨달아 봐도 나요 그렇지 못해도 나입니다. 그 무엇을 해서는 나 이상 그 무엇이 되어지지도 않고 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 이하의 무엇이 되어지지도 않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발견이니 잃은 나를 찾느니 야단입니다. 나를 찾는다고 해서 그 나가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내가 나를 잃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서 기웃하고 저기 가서 기웃합니다. 기웃해서 구경한 것들을 전부라고 또 허풍들을 떱니다.
나를 찾는 것 - 깨어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나를 강요하거나 다그쳐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하는 무엇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때에 비로소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구원은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늘에서 오는 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 땅위에 몸으로 육체로 존재하고 있는 한은 나는 생각이 아닌 관계를 통해서 나의 나됨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닐 때 참 나가 됩니다. 참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닙니다. 산을 보면 산이 되고 나무를 보면 나무가 되고 물을 보면 물이 될 수 있는 나, 산과 통하고 나무와 통하고 물과 통할 수 있는(코이노니아) 나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제는 너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참나)가 사는 세계입니다. 너와 통할 수 있는 나,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을 수 있는 나,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나가 진짜 나입니다.
나 있음으로 있는 나는 멈추어 있는 고정된 명사가 아닙니다. 고정된 정의나 개념이나 명제가 아닙니다. 나 있음으로 있는 나는 동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벗은 그 신발을 나도 매일 매일 벗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나를 통해서 내 안에서 일어나도록 나를 비우고 나를 열고 나를 봅니다. 그때 비로소 생명의 약동을 느낍니다.
이웃이 그립고 이웃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할 때 삶은 신비와 은총으로 다가와 나를 더욱 나 되게 해줍니다. "여기 나 있음"하고 생각으로 나를 갖고 있는 그야말로 착각 속에 있는 벗들을 만납니다. 영적인 나태입니다. 나태는 자기를 살지 못하고 변명을 낳고 해석을 낳습니다. 하늘나라는 이곳 저곳이 아닌 너희 안에 너희 사이에, 즉 관계에 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관계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성서는 義人이라고 합니다.
나 있음으로 있는 나는 깨달았다는 생각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각성입니다. 관계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의 약동입니다.
안다는 것, 그 안다는 것에 갇혀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보는 것은 정말 작고 좁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개가 보는 것만큼도 보지 못하고 토끼가 듣는 것만큼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얼마나 우기고 주장해왔던가요?
이불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나를 느끼듯이, 나라의 품안에 푹 들어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작아져 가는 나를 느끼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참 작아지는 것을 느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무엇도 아니었다고 작아졌을 때 오는 평안이란 그 동안 확장에서 오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어렸을 때 짚가리 속에 웅크리고 그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숨었을 때, 그렇게 수축되었을 때의 평화와 안식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작아진 나를 찾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 안의 힘을 새롭게 확인하고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불어 넣어주신 무궁무진한 힘을 감사하며 이 세상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서울 홍제동 화재 시 소방대원 여섯 명이 화재 진압 중 순직한 일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방화범은 어머니와 다툰 그 집 아들이었고, 진화 중이던 대원들은 아들이 아직 집안에 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매우 위험한 상황임을 알았지만 그 아들을 구출하러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했습니다. 그 아들은 이미 집 밖으로 피신한 후였는데….
소방대원들의 그 희생정신은 참으로 고귀합니다. 그들의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부인과 중학생 아들의 모습은 우리의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가슴 아픈 광경이었습니다.
순직한 이들이 남긴 글들에서 직업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을 표현한 대목이 있습니다.
"내 직업이 최고로 좋은 직업이다. 의사의 역할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자신을 내던지며 구하지는 않는다. 나의 직업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 목숨을 내던질 수도 있는 것…” 즉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남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리는 사순절 둘째 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이 기간 동안에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많이 갖기 바랍니다. 주어진 조건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순절은 기도와 명상, 그리고 자기성찰과 깊은 관련을 갖는 절기입니다. 이런 때에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의미부여를 할 수 있으면,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갖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힘이란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으로부터 발휘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힘을 우리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그 힘을 넣어주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무궁무진한 힘이 이미 내장되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힘이란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그 힘을 사용하겠다고 적절히 결정하면, 우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그 힘을 사순절을 계기로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 힘을 발휘하여 여러분의 마음밭을 차츰 옥토로 바꿔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