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는 자 2001-12-13 20:02:02 read : 101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2월 18일
삼상 15:10-19
작은 거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키도 작고 몸집이 왜소해 보이는데 덩치가 큰 사람들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훌륭하게 해낸 사람을 칭송하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크고도 작은 일밖에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작고도 큰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도 잇습니다. 여유 있고 넉넉한 좋은 조건과 환경 가운데 있지만 쫓기는 마음, 각박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어려운 형편과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유 있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참으로 각박하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진보가 일어나고 창조와 생산성이 올라갈 수 있고 역사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재산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 그리고 건강이나 시간이나 인격이나 지식이나 교양 등을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보다 여유가 있습니다. 여유란 가진 자의 멋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누지 못하는 자에게서는 여유를 통한 멋을 찾아볼 수 없고, 나눌 수 있는 철학과 멋을 가진 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는 자, 풍성한 자가 자기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는 경우에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가진 자로되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며 사신 분입니다. 여유란 가진 자의 윤리라기보다는 나누는 자의 아름다운 윤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구원이 허락된 것입니다.
지난 15일에는 32년 만에 서울과 경기지방에 폭설이 내려 많은 불편을 겪었고 금년 눈으로 인한 재산 피해가 지난 6년 간 전체피해액의 10여 배에 달하는 7천여 억 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교통대란이 벌어져 거의 모든 서울시민들이 고통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엄청나게 내린 눈을 보면서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느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느니 하면서 기쁨도 축복의 의미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여유를 가진 사람들의 멋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일생동안 이와 같은 여유 있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갑자기 많이 내린 눈으로 곳곳에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에도 벌써 봄 맞을 차비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3초의 여유
가이드포스트 2월호에 3초의 여유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있는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를 누르기 전 3초만 기다리세요.
정말 누군가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출발 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경적을 울리지 말고 3초만 기다리세요.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친구와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3초만 보고 있어 주세요.
혹시 그 사람이 가다가 뒤돌아 봤을 때 웃어줄 수 있도록...
길을 가다가 아니면 뉴스에서 불행을 당한 사람을 보면
잠시 눈을 감고 3초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리 할 것이니까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라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내가 화낼 일이 보잘것없지는 않은가...
차창 밖을 내다보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3초만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세요.
그 아이가 크면 분명 내 아이에게도 그리 할 것이니까요.
위의 글의 내용을 통해서 여유 있는 삶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과 멋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버릇: 서열의식
조선일보 논설위원 이규태씨가 쓴 책 중에 "한국인의 버릇"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서 한국인의 강한 서열의식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나 사리를 서열적으로 파악해야만 사고와 행동이 안정되는 경향에 대하여 강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만나자마자 우리는 상대방의 신분과 나이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왜냐하면, 신분이 나보다 높은가 낮은가, 나이가 나보다 적은가 많은가, 신분이나 나이가 낮거나 적으면 그저 "자네" 하고 싶고, 높거나 적으면 예의를 갖추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서열의식은 참으로 문제입니다. 학교도 나보다 좋은 학교 나왔나, 그렇지 못한가? 또는 동창이라고 하게 되면 선배인가 후배인가?를 확인하려고 하고 종씨라고 하면 또 항렬부터 따집니다. 몇 대 손인가, 뭐 이래가지고 유별나게 명함 내놓기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다 이 서열의식 때문입니다.
이 랭킹의식이나 서열의식, 이것 때문에 거짓되고, 이것 때문에 허영되고, 이것 때문에 거품이 일고, 형식주의에 빠져서 이것이 망조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또 우리나라 옛날 방은 그저 그야말로 좁은 공간일 뿐입니다. 아무 표시도 없는데 여기서 아랫목 윗목, 윗자리 아랫자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보면 무슨 식당엘 가든지 어딜 가든지 보니까 뭐 아래위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올라앉으세요, 내려앉으세요" 그럽니다. 뭘 올라앉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서열에 신경을 쓰는지 참 복잡합니다.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풍습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신문에 보니까 커다란 수탉 한 마리 사진을 그려 놓았는데 설명은 이렇습니다. 다른 수탉을 다 물리치고 모든 암탉을 차지하게 된 강한 수탉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위풍 당당하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라고.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독수리가 와서 채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말입니다. "승리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높은 자리 조심하십시요. 그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위험할 때라고 합니다.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한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합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야 됩니다.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를 터득해야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 왕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는 어느 날 큰 실수를 했습니다. 사무엘 선지가 그를 책망하고, 꾸지람을 하고, 마지막에는 결정적으로 "여호와께서 당신의 왕의 지위를 빼앗습니다. 당신은 이제 왕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이렇게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울은 본래 겸손한 사람이에요. 아주 겸손해서 그가 왕이 된다고 할 때, 도망가다가 마지막에 뒤주 뒤에 숨어있는 걸 끌어 내왔습니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또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야 그 암나귀 하나 잃어버렸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찾아와라" 그랬더니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했던지 암나귀를 찾아 사흘동안을 헤맬 정도로 그 만큼 순종하는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대로 스스로 작게 여겼습니다. 자기를 작게 여겼던 그런 사람인데 왕이 되면서 어느 사이에 아주 교만해졌습니다.
그 교만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첫째는, 아말렉과 싸우게 되는데 이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이 미리 결정합니다. "아말렉을 너의 손에 붙였느니라" 하고 말씀하시고 나가라 하면 그 싸움은 이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울 왕이 나가서 싸웁니다. 이것은 소돔 고모라를 진멸하듯이, 노아 홍수 때에 온 세상을 진멸하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이제 아무 것도 물을 것 없습니다. 그대로 나가서 싸우고 진멸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이긴 것이고, 싸우라 해서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긴 다음에 그는 오늘 성경에 보는 대로 기념비를 세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여기서 싸워서 크게 이겼느니라" 기념비를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냥 내려칩니다. "이건 네가 이긴 게 아니야." 네가 기념비 세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기념비적인 행사, 기념비적인 사건,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생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순종치 않았습니다. 순종하는 것 같았으나 순종치 않았습니다. 아말렉과 더불어 싸우라! 싸웠어요. 진멸하라! 진멸했어요. 그래서 순종했다고 하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순종 안 했어요. 순종이란 명령하시는 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 의견과 내 생각을 버리고 아주 전폭적으로 100%로 그 분의 뜻을 받았을 때만 그것도 기쁨으로 받았을 때 그게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가 싸우라니까 싸우기는 싸웠고, 진멸하라니까 진멸하기는 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좋은 양과 소, 쓸만한 것은 남겼잖아요. 형식적으로는 순종했는데 내용적으로는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 욕심과 탈취물을 취하는데 급급했어요. 하나님께서 이것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순종함이 없었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명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하고 충고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도덕성과 정직을 떠나면 안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정직하기가 어려운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음이 높기 때문에,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위치를 떠났습니다.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왕이 제 마음대로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무엘 선지가 크게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망령된 일을 했느냐" 하고. 왕은 왕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제사장의 할 일을 자기가 해버렸어요. 또 변명을 합니다. 이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크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겸손함을 진단해 보자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겸손함을 한 번 진단해 보실까요? 먼저는 내게 주어진 분깃,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십니까? 얼마를 받았던지 어떤 형편에 살던지 여기에 만족하십니까? 혹 불만하십니까? 불만하면 교만이요, 만족하면 그게 겸손입니다. 게다가 나는 작은 수고를 했는데 하나님이 큰 것을 주었다고, 난 아주 부족한데 오직 은혜로 내게 이렇게 넘치게 주셨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또는 여러분 이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요. 만족치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아내에 대해서 또는 남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게 분에 넘치는 아내요 혹은 남편입니까 아니면 "어쩌다가 저런 못된 사람 걸렸나" 그런 생각합니까? 내 분에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같은 사람을 내게 보내주셨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쩌다가 저 웬수 만나 가지고 한 평생 고생을 하나" 할 때 이 생각 한 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이웃에 대해서도 가정에 대해서도 내 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감사, 감사, 감지덕지합니다. 이게 스스로 작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혹 남들이 나를 칭찬하든가 비방하든가 상관없어요. 그건 작은 일입니다.
은혜 받으면 자기는 작아 보이다가 없어지고 하나님은 커 보입니다. 그러나 교만해지면 자기가 커 보이고 하나님은 작아 보이거나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라도 회개할 수가 있다
정직하기가 힘이 듭니까? 그건 교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든지 정직하기가 쉽습니다. 회개하기가 힘듭니까? 그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라도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왜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까? 이 모두가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심각합니다. 교만한 사람, 겸손 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을 놓고 말하는 것인데 그가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이스라엘의 왕을 만들었고, 그가 스스로 자기를 높일 때 내려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해야겠습니다. 야고보 4장 6절에서 보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 에게 은혜 주신다." 다시 한 번 더 겸손을 점검하십시다. 그리고 정직하십시다. 그에게 다시 은혜의 날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유명한 뉴욕 필하모니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대원들에게 폭군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베토벤의 권위자였습니다. 한 번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연주하였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올 때 단원 중 한 사람이 다른 단원에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오늘은 정말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도 토스카니니가 칭찬하지 않고 나무라면 내가 저를 쓰러뜨리겠다."
이 때 단원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토스카니니가 그 대원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토스카니니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도 여러분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토벤이 최고입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인식한 신앙인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인식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함만을 내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1:30).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그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10).
뿐만 아니라 그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능력주시는 분"을 나타내고자 한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맡은 일을 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그분을 섬기는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딤전 1:12)
그는 철저하게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은 "맡은 일을 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감추고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추켜세우고 그를 중심으로 한 파를 이루려고 하는 모든 움직임을 막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
저 자신도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나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항상 잊지 않기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며 고백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저 자신을 양들의 목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양들의 목자는 오로지 하나님이시고 나는 오직 그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고 목회해 왔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겠다고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려 할 때 오히려 잘못되기 쉽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그의 역사를 기다리는 신앙을 가질 때 우리의 가정이 든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잠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잠 3:5-6).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서 자신에 대하여 갖는 첫 번째 인식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이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그의 능력과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공부를 하는 일도, 가정을 이루는 일도, 사업을 하는 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빈 장갑일 뿐입니다. 그 장갑 안에 하나님의 손이 들어오실 때 비로소 나는 능력 있는 자가 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군이 됩니다. 씨를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그만이 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제 겸손하게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여러분은 능력 있는 일꾼이 됩니다.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해지는 역설이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자신을 비우므로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며 살아갈 때 우리의 환경이 바뀌고 가정에 변화가 일어나고 교회는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우리교회 금년 표어대로 하나되는 유일한 길은 목회자들 포함하여 우리 영암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길 때만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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