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주인의 지배를 받자 2001-12-13 20:01:14 read : 107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2월 11일
눅 11:24-26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가까운 사람이나 또는 주변의 친지들이 말리다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런 말씀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만합니다. 먼저 신앙에 깊이 빠진다는 것을 그분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이단 집단이나 사교에 빠져서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있습니다. 또 집을 나가서 집단생활을 하며 집문서, 땅문서 모두 바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고 신앙에 깊이 빠진다고 하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깊이 빠지는 것은 그만두고 아예 시작하는 것도 말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빠지지 말라고 했을 때에 어떤 배경이 있을까요? 동양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유교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중용의 도를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양문화권의 철학적인 배경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상 우리는 쉽게 믿을 기독교를 선호합니다. 사실 그런 어른들의 충고가 없어도 우리는 본성 상 충돌과 분리를 싫어합니다. 가급적이면 양편을 다 만족시키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담에는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쪽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쪽이든 극단을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면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어떤 본성이나 문화적인 영향보다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옳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헌신을 할 때 제값을 한다.
성경적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때 신앙은 제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보적인, 타협적인, 반신반의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단 없이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교인은 세상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전적 헌신만이 주님이 바라시는 신앙인의 수준입니다. 전적 헌신만이 우리가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신앙 생활하는 길입니다.
물방울은 결국 큰 물이 된다
스위스 알프스산맥에 하나의 물방울이 생겼습니다. 그 물방울이 뭉쳐 북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라인강을 타고 북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동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다뉴브 강을 통해 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되고, 남쪽 골짜기로 방향을 잡게 되면 그 물방울은 로네 강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물방울은 똑같은 곳에서 시작되었지만 극히 미소한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수 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다른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차이가 점점 뚜렷해지다가 결국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또 한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한번뿐인 인생이 후회 없는 인생, 낭비 없는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방향을 잘 잡아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이 펼쳐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들의 삶은 진정 보람 있고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아끼시며
병자를 고쳐주시며 외로운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가슴을 가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반대자의 반대와 악감정을 용해시키고 결국 그 반대자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무신론자인 "잉거솔"이라는 대령과 "월리스"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두 군인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예수님에 대해 모독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잉거솔이 월리스에게 말했습니다. "그 예수라는 친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를 주인공으로 연애소설이나 쓰면 어떨까요?" 그러자 월리스가 말했습니다. "음, 아주 좋겠군, 인기가 만점이겠어."
그후 월리스는 제대를 하고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연애소설을 쓰기 위해 예수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료수집을 위해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는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읽던 성경을 덮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진정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소설이 바로 유명한 <벤허>라는 소설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스스로 알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선에서 그쳐서도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후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선까지 발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먼 거리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머리는 커지는데 가슴은 뜨거워지지 못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예수님을 위해 뜨겁게 헌신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앞에 두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말입니다. "나"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풍성함을 만나면 "나"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구할 때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일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믿음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능동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동시에 얼굴에 땀을 흘리겠다는 각오를 해야 하지 골방에 앉아서 "나는 믿는다"고 소리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마리"로 오쳔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있습니다. 이 기적의 도화선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안드레의 능동성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에게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습니다. 이것으로는 오천 명은커녕 열 명도 배부르게 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안드레는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안드레의 능동성 있는 믿음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찮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축복된 장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그마한 물방울이 큰 강물로 변한 것입니다. 물방울은 언젠가 강물이 되어 흐르게 됩니다. 조그마한 것이 결국 거대한 것의 원천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초라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힐 때 큰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얼마나 초라한 도구입니까? 우주의 엄청난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영광과 질서를 보십시오! 이러한 것들에 우리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너무나도 초라한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초라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위대한 역사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비록 초라한 도구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실 때 우리는 위대한 가능성의 보따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품을 만큼 크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그마한 가슴에 모실 수 있을 만큼 작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들어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까지 집에 데려와서 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집을 점령하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빈집의 비유를 통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신앙의 필요를 주님은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봅니다.
참 믿음이 없는 마음은 빈집과 같다.
첫째, 회개는 했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 없는 마음은 빈집과 같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그 출발점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우리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설교자들의 외침이 들리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설교했고 예수님도 그렇게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도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만드는 사건이라면, 믿음은 죄에서 돌아선 다음에 내가 새롭게 믿어야 할 분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분과 더불어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분과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를 가리켜서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의 설교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보통 설교를 듣고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계층들까지, 군인들, 무슨 세리들, 아예 그 사회에서는 종교적이라고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증거했던 그 분, 자기보다 뒤에 오시는 훨씬 탁월한 그 분 예수를 믿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비유의 빈집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빈집은 청소했지만 새로운 주인을 모시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날은 특별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되지, 부끄러운 죄악의 삶, 타락한 삶에서 떠나야 하지..."
때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눈물도 흘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특별한 감동을 받고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삶을 계속 살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 버리면 안됩니다. 눈물을 흘렸고 마음 아파했고 뉘우쳤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예배가 끝났고 집회가 끝났습니다. 그만입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단순한 뉘우침,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는 삶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이런 상태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왔지만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일시적으로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빈집에 불과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안식처를 얻지 못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청소된 집을 바라보면서 혼자 말을 합니다."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34절) 귀신은 아직도 이 집을 자기 집이라 주장합니다. 이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쳤고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도 귀신은 내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빈집이기 때문입니다. 청소만 되었지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주인이 들어 오셔야 합니다. 그 집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령이 내 집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새 주인이 없으면 더러운 귀신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집이야. 교회에는 나와 앉아 있지만 너는 아직도 내 처소야"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집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무언가 심상찮구나 위기를 느끼고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순식간에 악령의 처소로 만들고 맙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다시 타락한 사람들 보셨습니까? 얼마나 그 결과가 비참해지는지. 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와서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미워하고 이런 상태에 있다고 하면 그건 더러운 영의 활동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러운 귀신의 활동이 계속되면 정신이 황폐해지고 영혼이 파괴되고 삶은 철저히 약탈을 당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빈집과 같다.
둘째로 죄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마치 빈집과 같습니다. 회개하려다가 마는 자리에서 끝난 것 아닙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잘못에 대해서 더 이상 여간 해서는 그 잘못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 그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소극적인 종교 생활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연주하시는 분들은 악보를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연주하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찬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찬양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마음에서부터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에 그것이 목표 달성하는 겁니다. 연주하면서도 내게 주신 재능 가지고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노력하는 그 소원을 담아낼 수 있어야 그것이 제대로 된 성가대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작년 1년 돌아보면서 아이구! 난 특별히 적자 보지는 않았다고 감사하는 것이 최상이겠습니까? 어려울 때야 그러고 지나갈 지 모르겠습니다. IMF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10년씩이나 나는 적자는 안 봤어. 그러고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런 사업이 성공하는 사업이겠습니까? 얼마나 흑자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뭘 안 했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 신앙생활 할 때 그럴 때가 있어요. "나는 저 세리처럼 간음하지도 않았고 도적질도 안했고 저 죄인처럼 살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어릴 때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난 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입니다. 착한 죄인들입니다. 여간해서는 나쁜 짓을 안 하니까요.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사셨다구요? 이레에 적어도 두 번은 교회에 출석하고 -여기에 한 번 나오는 사람들도 있지요- 소득의 십일조도 정확하게 나는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규칙을 지키고 종교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왔지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뭔가가 이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돼라는 안타까운 생각은 가져보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갈망하지는 않습니까? 무엇을 안 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주일날 와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지난 주일 무사히 잘 보내서 별 일 없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정말 별 일 없었던 것도 감사한 일은 맞습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세상에 살면서 별 일 없었던 것도 감사할 일이 틀림없지만 항상 보고하는 내용이 별일 없어서 감사하다고만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별일 좀 해봐. 별 일.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봐. 하나님이 그러시지 않겠어요? 언제나 큰 잘못 범하지 않는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상태에서 이제는 조금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안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보고를 받을 때마다 안타까울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갈망해 왔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쏟아 주신 사랑에 보답하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무엇을 하라고 일러주어야만 아이가 진취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것도 잘못하자 마자 "하지 말라"고 그러면 주눅이 들어요. 잘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가르칠 때는 무엇을 하지말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 절 이하를 보십시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버려야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참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버리는 데서 중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진실한 말을 사람 가운데서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많은 분들이 글을 올립니다. 우리교회에는 그런 분들이 거의 없지만 개중에는 무명으로, 가명으로 남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글들도 때로는 올라오기도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신앙적으로 유익하지 않은 글을 올리고, 비판과 비난을 하라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 홈페이지에는 재일 앞면에 "칭찬합시다" 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많은 내용을 올리지는 안았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칭찬할만한 미담들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난이나 비판의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남을 칭찬할만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언제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면합니까? 거짓말을 안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잠시 거짓말을 안하고 있다고 거짓 말쟁이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은 거짓말을 중단하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순간 또 필요하면 언제 거짓말할 지 모릅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제 새롭게 참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서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바울의 교훈을 하나 더 살펴봅시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절) 도적질하던 사람이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다시 도적질을 하지 않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도적질은 더 이상하지 않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번 것으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손으로 수고하여 자기가 벌은 것으로 남에게 베푸는 구제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남의 것을 훔쳐서 사는 삶이었지만 더 적극적인 삶으로 열심히 일해서 내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주는 삶으로 나아 갈 때 그가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청소만 해 놓는 격에 지나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교회에 발을 디딘 후부터 왠만 해서는 화를 내거나 더러운 욕설을 입에 담지 아니하려고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교회직분자라고 알려진 이상 속이 썩어도 참고 지냅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열매가 풍성해야만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부터 하나님 앞에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어렵게 하는 사람에게 같이 맞대응하면서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벌레 먹은 열매가 더 이상 달려 있지 않았다고 좋은 과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좋은 나무라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때입니다. 하나님 나한테는 나쁜 열매가 하나도 안보여요. 그렇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모든 선한 일 에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지배를 받지 못한 마음은 빈집과 같다.
셋째 주님과의 관계는 맺어졌지만 적극적으로 주님의 지배를 받지 못한 마음은 빈집과 같습니다. 요즈음 시골에 가면 빈집이 많습니다.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인이 살고 있지 않기에 비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을 자주 돌아보지도 못하고 보살피지 않으면 비록 주인이 있어도 빈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집들은 주인이 다 있는 집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살지 않기 에 빈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다짐하기도 했고, 맡은 바 직분과 직책에 대해 더욱 열심히 충성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지난주간 신년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인생과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새로운 주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새주인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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