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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조건"
    2001-12-13 17:08:08   read : 102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7: 18-25) 설교자:임영수




    저는 이 시간 죄책감과 은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정적인 한 예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들의 생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은혜를 경험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은혜의 빛을 경험한 후에 그들의 영혼이 한없이 정결해 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순종은 쉽고 즐거운 것이 되었고,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들까지 사랑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들은 유혹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을 유혹하던 것들은 힘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옛 생활과 새로운 삶이 흑과 백처럼 뚜렷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회색 그늘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색조가 뒤 섞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전혀 낯선 유혹이 새롭게 찾아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순종은 노력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전보다 더 비통한 심정으로 근절시킬 수 없는 죄의 고질적 본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러한 경험 가운데서 어느날 히브리 서신을 읽는 중에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재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나니"(히6:4-6)라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자신이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단정지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 용서가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한 번 은혜의 빛에 쬐임을 받고 얼마동안 깊은 평안과 희열을 맛보고, 유혹과는 더 이상 상관 없는 것처럼 느끼다가, 완전히 역전된 상태로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절망과 낙심 가운데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은혜의 빛을 쬐었을 지라도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에 회색으로 되어가면서, 그전에 문제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혹과 시험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서 그는 그의 온갖 절망과 연약함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각이 같이 병행해서 더욱더 향상되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책감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죄책감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문제는 죄책감을 억압하느냐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두가지 상반된 과정을 겪게 됩니다.

    억압할 경우, 분노, 반항, 두려움과, 염려, 양심의 마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퇴화, 공격적인 성향이 지속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를 의식적으로 인정할 경우 회개,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는 평안과 안전함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양심은 점차 순화되고 공격적 충동은 계속해서 약화됩니다.

    종교는 죄책감을 가중시킬수도 있고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죄책감을 가중시키는 종교는 도덕주의적 종교로 그것은 금기의 개념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을 위협적인 존재로 그립니다. 그러한 것은 기형적인 종교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조장하며 완악함과 반역과 사악함의 불길한 매카니즘을 작동시킵니다. 그에반해 은혜의 종교는 이 악순환 속에 개입하여 죄인을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리하여 죄책감에서 해방시킵니다.

    교회 안에는 병적인 죄책감을 드러내며 도덕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용서하고 죄책감을 덜어주는 하나님의 사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성서에서 자신들의 지지하는 근거를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은혜의 보장과 무서운 경고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교회안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억압하고 숨기며,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판단하면서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확증하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있고, 반면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은혜를 확증하는 말씀보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읽고 두려워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씀은 회심한 후에 다시 죄를 짓고 죄책감에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며, 바리새인들과 도덕주의자들, 자신이 의롭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 배교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회심하고 죄책감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사건에서 예수님이 그 여인과, 그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게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에게는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는 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정죄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여인은 죄책감에서 해방되지 않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죄가 있음을 깨우쳐 주셨고, 여인에게는 정죄에서 해방을 주셨습니다. 여인을 끌고온 사람들은 돌로 맞을 사람은 여인과 같은 사람이며 자기들은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여습니다. 예수님은 정죄 받을 사람들이 여인이 아니고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죄책감 자체를 형벌로 받아드리면 안됩니다. 죄책감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하는 통로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인해 좌절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죄책감이 무엇으로부터 연유된 것인가를 분명히 파악해서 구체적인 회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책감에는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이 있습니다. 참된 죄책감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질책받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죄책감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거짓된 죄책감은 인간의 판단과 암시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회심하면 죄와 죄책감에서 완전히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요, 자신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완전히 회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죄를 범하고 그 전보다 훨씬 심각한 형태의 죄책감을 또다시 경험하게 될 때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됩니다.

    로마서 7-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운명을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7:1-24과 그리고 7:25절과 8장 전체 사이에는 매우 큰 대조가 존재합니다. 이 부분에서 논쟁의 흐름이 단절된 것처럼 보여서 성경 번역자들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7:19,24에서 사도 바울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죄책감과 절망을 묘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두 번째 부분에서 이 절망은 자취를 감추고 승리에 찬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7:25, 8:11)

    이 대조가 너무나 극명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 인생의 개별적인 두 단계에서 경험한 인간 조건,즉 7장의 회심 전과 8장의 회심 이후를 연이어 묘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해석은 경험과 전적으로 모순됩니다. 그러한 해석은 회심이 죄와 죄책을 피하게 해준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회심하고 나면 다시 죄를 짓지 않는 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 후에도 여전히 죄책감을 경험하며, 어떤 경우 더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7장의 묘사는 개종 유무와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전'과 '후'의 구별이 없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7장과 8장에서 묘사하는 인간 상황에 동시에 처할 수 있습니다. 7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8장에 나오는 은혜에 대한 생생한 확신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것은 역사가 입증합니다. 자신에 대해 가장 절망한 사람이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죄책에 대한 의식과 용서에 대한 의식을 분리시킬 경우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오해가 생깁니다. 인간은 누구도 죄책감을 피할 수 없으며, 동시에 용서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거하는 대상은 죄책감이 아니라 정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한 죄사함의 조건은 통회와 죄책감에 대한 확실한 자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은 죄책감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죄된 가운데서 해방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를 받아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거나, 죄책감을 부인할 때 우리를 거절하십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탄식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 희망이 없는 상태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탄식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심한 내적 갈등과 혹독한 시련을 통과할 때도 있고, 불안과 괴로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의심과 반항심, 주저함, 음울한 심연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우리는 믿음과 은혜에 대한 고요한 확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의 과정에서 침울함과 쾌할함,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열을 경험합니다. 약할 때도 있고 강할 때도 있으며, 숱한 일로 인해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확신하게도 됩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죄책감 없이 그것을 억압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로 살지 않고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교회나 사회, 가정에는 자기 합리화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비난을 통해 죄책감을 억압하거나, 반대로 자기 잘못에 병적으로 집착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자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합리화나 병적인 죄책감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시인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기 인식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실제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는 반면 ,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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