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2001-12-13 16:38:03 read : 82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6:19∼24) 설교자 : 임영수
먼저 본문을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해 보겠습니다. 팔레스틴 어느 한적한 곳에 벽에 구멍이 뚫려있는 한 채의 집이 있습니다. 그 집 앞 뜰에 값비싼 옷들이 흩어저 있습니다. 그 옷들을 자세히 보니 모두 좀이 먹어 있습니다. 구멍 뚫린 벽 앞에는 보화를 넣어두었던 함이 뚜껑이 열린 채 내동댕이쳐 있습니다. 그리고 집 한 쪽 모퉁이에 창고가 있습니다. 그 창고 문이 열려있고 그 안에 쌓아놓은 곡식이 밖으로 흘러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곡식들은 모두 벌레가 먹었고, 쥐들이 난동을 부려서 쥐의 배설물들이 곡식에 썩여있습니다. 곡식 더미에서는 악취가 납니다.
그 집 앞에 주인 듯 한 한 사람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 가운데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의 눈은 뜰 한쪽 구석에 피어있는 백합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빛이 나고, 입가에는 희망의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그는 백합화와 공중에 날고 있는 새를 보고 새로운 희망의 출구를 찾은 듯 합니다. 그림 전체 배경으로 그리스도 상이 희미하게 깔려있습니다.
옛날 팔레스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재물이 값비싼 옷, 곡물, 금, 은, 진주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귀중한 재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화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재물은 귀한 만큼 그 시대 사람들은 소중히 간직하려고 하였습니다. 값비싼 옷은 방에 곡물은 창고에, 금, 은, 진주 같은 보화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보관됩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재물을 잘 간직하려한 것은 그것 자체가 값비싼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이 그들의 생의 안정, 사회적 신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재물이 넉넉하면 생의 안정을 누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신분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안정과 신분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재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고대인이나 현대인 다같이 재물을 의존하고 그것으로부터 생의 행복과 안정을 얻으려하는 것은 공통된 인간 본성입니다.
재물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기도록 허락하신 좋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들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는 채워줄 수 있지만 생의 안정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리고 재물은 인간의 소유욕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더 고갈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재물로 인해 눈이 어두워 질 때 불안해지게 되고, 편견이 생기고, 두려움, 의심이 많아지게 됩니다. 본질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두운 생을 살게됩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할 때 모조품을 진품처럼 속아서 값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사들일 수 있습니다. 일정한 사용 기간이 지난 후 그것이 모조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때 그 물건을 산 사람은 깊은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생도 재물로 인해 그렇게 속을 수 있습니다. 재물이 우리의 생을 보장해줄 수 있는 영구한 것으로 알고 그것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나서 나중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잘못 살아온 생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하게됩니다.
"예수께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고 하신 것은 재물의 그러한 한계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의 그러한 한계성과 허구성을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훔쳐 간다.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먼저 옛날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에게 귀한 재물로 간직되었던 것이 옷입니다. 값비싼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의 품위를 높여주고 돋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좀이 그것을 먹었을 때 더 이상 값비싼 옷이 되지 못합니다.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재물로 인해 얻게되는 사회적인 신분,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 명성 모두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 다음 곡물이 소중한 재물이었습니다. 여기서 녹이 슨다는 것은 '부식하는 것, 파먹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곡물 창고에 곡식을 가득히 채워 넣은 다음 그것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영구하지 못합니다. 그 안정이 곧 깨어집니다. 쥐, 벌레 같은 것들이 곡식을 파먹어 들어갑니다. 그 때 그 곡식은 아무런 데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육적인 매력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소멸되어 갑니다.
다음은 금은, 보화와 같은 재물입니다. 그러한 재물들은 매우 깊숙히 보관됩니다. 아무리 깊이 숨겨 놓은 금은 보화도 눈독들인 도둑들 한데는 속수무책입니다. 자신의 생의 행복과 미래를 보화에 두고 살아가던 사람일 경우 그것이 없어질 때 크게 절망하게 됩니다.
이상의 재물에 관한 세 가지 묘사 모두 다 요즈음 경제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면 주가가 바닥을 처서 휴지와 같이 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회사 주식은 절대 하락하지 않는 다는 광고를 믿고 주식을 많이 사서 모았는데 얼마 안 가서 바닥을 치게되었습니다. 결국 그 많은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그 것을 산 사람은 수 십억의 손해를 보게됩니다.
재물을 많이 모으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은 재물을 잘 보관하고 사용하는 일은 모으는 것 못지 않게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안전하게 보관할 곳을 제시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시한 곳이 하늘입니다. 예수께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좀이 먹거나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라 입니다. 본문에 내포되어 있는 좀더 깊은 뜻을 밝히면 재물의 내용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현금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 말고 그 현금으로 영구히 하락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보화를 사라는 의미입니다. 현금은 참으로 보관하기 어렵습니다. 자꾸 인플레가 되기 때문에 그 가치가 계속 하락합니다.
값비싼 좋은 옷을 잘 보관해도 좀이 먹고, 잘 지은 견고한 창고에 곡물을 보관해도 쥐, 벌레가 곡물을 망쳐놓습니다. 이중 삼중의 비상장치를 해놓은 안전한 곳에 숨겨둔 보석도 도둑이 어떻게 알고 구멍을 뚫고 들어와 훔쳐갑니다. 한시도 마음을 놓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모두 팔아 오직 영구히 가치가 하락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값진 보화를 사는 것이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때 그것에 따르는 보상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 보상은 영구히 가치가 하락하지 않는 물건을 소유한 그 자체가 큰 보상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좀도 먹지 않고, 녹이 슬지 않고, 도둑들이 훔쳐갈 수 없는 영구한 보화 그것이 무엇일까요? 설교 서두에서 묘사한 그림 배경에 어렴풋이 암시되어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만이 영구한 생의 보화가 됩니다. 본문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하다는 것은 순전함, 또는 단순함"으로 번역됩니다. 재물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할 주인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할 주인을 바로 보게 합니다.
오직 유일하고, 영구한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보화는 순전한 눈, 단순한 눈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화가될 때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있게됩니다.
먼저 주인이 재물에서 하나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삶이 매우 단순하게 됩니다. 내일의 염려에서 해방됩니다. 그날 그날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 자유는 늘 먹고, 입고, 사용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자유입니다. 그 어떤 권세나, 재물, 명예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입니다.
다음 염려와 근심 대신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듯이 나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됩니다. 그 기쁨은 담대하게 하고, 명랑하게 하고, 단순하게 하고, 긍정적이게 합니다. 그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속적인 것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에게 충만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라는 보화는 단순성의 삶이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금욕적인 삶이 아닙니다. 단순성의 삶입니다. 이 단순성은 재물에 대한 탐욕 생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때 비로써 나타나게 되는 생활 방식입니다. 현실에서 살지만 현실에 지배되지 않고 살아가는 생활 방식, 현실의 그 어떤 것에도 중독되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아들이 아버지는 돈이 많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해줄 수 있다고 믿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무엇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돈을 타서 자신의 욕구를 채웁니다. 그는 내일의 자신의 생에 대한 계획, 염려도 없습니다.
단순성의 삶이 그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욕심,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면서, 내일의 보장이 없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날 그날을 감사와 기쁨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오직 한 주인을 모신 가운데 염려 없이 살아가는 생입니다.
누구의 그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르게 잡아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식탁 위에 투박하게 생긴 빵 한 덩어리가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스프 그릇이 있습니다. 식탁 한쪽 모서리에 성경책이 있습니다. 그 식탁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모습에는 생에 대한 염려나, 욕심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한 덩어리의 빵을 놓고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재산, 사회적 지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연줄, 학벌,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모습에는 한없는 충만과 자유의 빛이 우러나오고 있습니다. 행복이 무엇임을 말해 줍니다.
결국 이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생의 염려, 불안, 물질의 집착이라는 낡은 삶의 범주를 넘어설 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희망적인 인간상, 새로운 가능성의 삶입니다. 그러한 삶의 중심은 재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던 새로운 인간상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헌신이 있게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분이 그리스도를 찾아 퍽 오랜 기간 방황했습니다. 그가 생의 염려와 걱정 가운데 있을 때 그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염려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확고한 보장을 받기 위해 간절히 불렀지만 그리스도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며, 붙잡고 있던 것들이 단지 돌과 같은 물질에 불과 하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생명을 보장해주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력 없는 물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생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도록 부탁하려고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의 주인이 누구이며, 재물을 자기에게 위탁하신 분이 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집착, 염려, 걱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매우 단순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그날그날 구하는 것으로 자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염려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세히 보니 그러한 삶을 그와 함께 살아가고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낡은 것을 넘어선 새로운 삶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그 한 분을 발견한 것이 그에게는 너무 새롭고 소중했습니다. 세상 것들 다 버려도 그 한 분만으로 만족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연거퍼 외침니다. 주님, 주님이 바로 여기 계셨구먼요. 내가 그렇게 당신을 찾았는데 내가 잃어버린 그 삶의 자리에 당신이 계셨구먼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후부터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루하루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을 다 가진자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 배후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가노라면 그리스도의 상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 분은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에 계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들 살고 있는가? 왜 엉뚱한 곳에서 생의 보장, 행복을 찾고 있는가? 그렇게 하지 말고 나의 안으로 들어와서 나와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삶이 바로 우리가 본래적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자신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삶은 매우 단순한 삶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으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아가는 매우 단순한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일치는 이러한 삶에서 형성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선행을 많이 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너희 생의 보화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정직하게 답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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