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덧 입는 생 ” 2001-12-13 15:40:12 read : 84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후 4:16~5:10 설교자 : 임영수
저는 이 시간에 먼저 본문의 말씀을 한 사람의 생의 이야기로 극화시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휙션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다가 특별한 기회에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생에 극적인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에게 그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새롭게 형성되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기 전에만 해도 그의 생활은 수평적 관계에서 맺어진, 직장생활, 때때로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는 골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가는 술좌석,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남매와 함께 하는 가정 생활이 전부 다 였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건강해서 직장에서 잘 승진하고 그리고 좀더 넓은 사교 생활로 인간 관계를 넓혀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에 들어서면서 그전에 경험하지 못하던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해가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교제를 갖는 하나님, 그리스도는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대상인데도 눈으로 직접 보는 대상들과 갖는 교제에서 보다 더한 기쁨, 평강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에 대해서 보다 더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 도피적이 되어 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에 그렇게 자기 중심적이었던 그가,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며,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전에는 골프, 술좌석, 직장 동료가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후부터 그는 그러한 대상들이 절대적이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그전과는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삶이 형성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전에 수평적 관계에서 맛보던 것들이 이 새 차원의 삶에서 다 상쇄되어 갔습니다.
이제부터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간 즉 기도, 말씀 묵상을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전에는 이 현실의 삶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점점 이 현실의 생은 매우 잠깐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자기가 붙잡고 있는 현실의 생이 지나가는데 대한 아쉬움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두려움 대신에, 어느 때에라도 이 현실의 생이 끝나면 그것으로 자신의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체의 몸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 때때로 현실을 벗어나서 그 영원한 세계에서 되어질 그 변형된 삶에 대해 깊은 동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현실에서 그의 삶은 점점 자유로워지며, 현실에서 집착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져 갔습니다. 그의 소원은 그에게 그러한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신 주님과 온전한 연합 가운데 살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져 갔습니다. 현재라는 삶의 모든 여건이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가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변화되어가는 삶에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에게는 새로운 "속사람"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겉사람', '속사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겉사람은 우리의 피부조직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알기 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현실에서 맺어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수평적 관계입니다. '속사람'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영적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영적 차원의 삶에서 이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그에게 절대 소중한 것은, 돈, 진급, 골프, 직장, 성공이었습니다. 그것을 목표로 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 그에게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 하나님, 영원, 평화, 사랑, 정의와 같은 것들이 더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사람에게는 '장막'과 '영원한 집'이 생겨났습니다. 본문에 장막과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집은 사후에 영혼이 가서 머무를 장소가 아닙니다. 영원한 집은 부활의 새 삶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그 전에는 이 현실이 모두였고, 그곳이 자신이 영원히 거할 집으로 알고 그 집을 보존하고 가꾸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본 현실은 그것은 임시적으로 머무르게 될 텐트로 세운 장막과 같은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차 약속되어 있는 부활의 새 삶입니다.
그가 바라보게 된 그 변형된 삶이란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되고, 받아 들여지고, 그 분과 화해되고, 그분에 의해서 치유되고, 보상된 자신으로서 그분의 보좌에 함께 하는 새로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로서는 그것이 매우 동경이 되고 그리웠습니다.
다음으로 그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하나의 변화는 그 전에 그의 목적은 사회적 성공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그의 목적은 주님과 온전한 교제의 삶이었습니다. 그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현실에서 소유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제일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 주님이 없는 삶입니다. "그에게 있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12)는 말씀이 그의 생의 좌우명처럼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있어서 생의 지평은 현실을 넘어서 저 영원한 시간으로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현실의 시간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그의 생의 지평은 영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전에는 생의 마지막 종착 지점이 무덤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보좌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겉사람, 즉 이 세상에서 맺고 있는 관계는 영구한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경과 할수록 낡아갑니다. 낡아간다는 것은 나이가 더해가면서 육체도 쇠하여지고, 현실에서 맺은 관계도 점점 끓어지게 됩니다. 결국 죽음의 시간에 모든 관계가 끓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관계와는 반대로 더욱더 새롭게 되어갑니다.
이 이야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삶은 죽음에 의해 폐기되지 않고 변형됩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변화되며, 제한된 현 존재에서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4)
바울은 삶의 변형을 "덧 입는다"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삶은 내세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삶이 이 현실에서는 완성되지 못하고 영원의 시간에서 완성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죽음은 그 완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삶이 죽음에 의해 폐기되지 않고 변형되어 간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폐기되지 않는 삶은 덧 입던가(변형), 그렇지 않으면 벌거벗은 상태(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덧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와 그들을 부르셨을 때 자신들이 벌거벗은 상태임을 깨닫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죄 가운데 있는 상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상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한 상태, 하나님의 은혜밖에 있는 상태, 부활의 새 몸을 입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벗은 자로 발견될 때 우리의 수치를 가리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손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가리울 수 있는 단 한가지는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옷입니다. 그 옷은 하나님의 용서, 그분의 사랑, 그의 치유,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상실된 것들의 보상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입어야 할 옷으로 새로 디자인 한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3-17)
이 옷은 겉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속사람을 위한 옷입니다. 세상 디자이너들은 겉사람을 위한 옷은 만들어도 속사람을 위한 옷은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벗은 자들로 가 아닌 덧 입은 자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만든 옷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 옷을 덧입기를 사모합니다. 그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미래가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 가운데서 바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부활의 생은 덧 입는 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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