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우친 삶(왜곡된 삶) ” 2001-12-13 15:33:34 read : 856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일 2:12~17 설교자 : 임 영 수
성서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여러 모양의 삶의 유형들이 비유로 또는 실제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역시 그러한 유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란 세속적 가치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것에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생의 자랑은 허세적인 이기주의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생의 만족을 외적인데서 추구해가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이렇게 한쪽으로 편중된 삶에 길들여져 갈 때 그러한 삶에서 문제들이 생깁니다.
(1) 자기 소외 가운데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신에 자기 자신이 아닌 세속적인 풍습, 가치, 체면과 같은 외적 요구에 응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점점 소외시켜 갑니다. 그러한 소외 현상이 깊어가면, 소외된 상태에서 고통을 겪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여러 가지 육신적, 정신적, 정서적 질병, 이상한 성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2) 이러한 치우친 삶의 유형에서는 자신의 행복이나 만족을 외적인 요인에서 발견해 가려는 강한 욕망에 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한 욕망은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중독증에 걸리게 됩니다. 알콜, 마약중독, 돈, 권력, 성, 놀음과 같은 중독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3) 이러한 왜곡된 삶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겉치레의 꾸밈에 많은 시간, 돈, 정력을 소비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삶은 피상적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보기에 좋지 않은 이기주의가 됩니다.
(4) 외적인 것에 치중해 갈수록, 자신의 내적 불만족, 불안, 두려움은 더욱더 커져 갑니다.
(5) 무엇보다도 가장 불행스러운 것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과 육신의 욕망은 다릅니다. 마음의 소원은 진정 자기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육신의 욕망은 그와는 반대로 세속적 가치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 소외 현상에 더욱더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이러한 치우친 삶을 치유받고 극복하지 못하였을 때 그러한 유형의 삶은 자녀들에게 대물림 하게 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부모들에 의해서 그 가정은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없는 역기능적인 가정이 됩니다. 역기능적 가정에서는 상처입은 자녀들이 생깁니다. 그 자녀들이 성장해서 역시 편중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치우친 삶은 상처 입은 마음에서 연유됩니다. 치유, 성장의 근본 의도는 치우친 삶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 가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이 자기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만남에서 자기자신이 되어 가고, 자신의 삶의 소명을 재발견 하게 하려는 것이 치유의 근본 의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가정,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기 상실이라는 매우 심각한 병에 걸려 있습니다. 자기 상실 가운데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편중된 삶을 극복한 그가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이 서신을 썼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듯이 아주 따뜻하고, 애정에 가득찬 심정으로 서신을 썼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 자랑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5∼17)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외모는 중요시 하기 쉽지만 보이지 않는 속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도 거의 다 외적인 요인에서 풀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우리의 생의 현실적인 문제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치우친 삶에서 연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갈려면 먼저 문제의 원인부터 바르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느 가정부가 어느 성도의 집에서 일하는데 자기 얼굴이 너무 못생긴 것을 비관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죽고 싶은 충동을 느껴 방문을 잠그고 면도날로 동맥을 끊어 자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집 어린 꼬마가 "언니 무엇해?" 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습니다. 며칠 뒤 또 다시 면도날을 손목에 대는 순간 그 어린 꼬마가 또 쫓아와 실패했습니다. 그러기를 세 번을 더 했습니다. 그 가정부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어린 것을 보내어 자살을 못하도록 하시는 것을 깨닫고 감격했습니다. 뒤에 그는 실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나 위대한 여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실상 사람의 얼굴은 우리 자신의 겉 사람에 불과합니다. 겉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진정한 자신의 생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보다 우리의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속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 간다면 우리는 보다 행복한 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올바른 삶을 배워가는데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은 치우치지 않는 온전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마음의 소원은 언제나 전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전체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전체로 사는 삶은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에 참여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받아드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아와 건강한 자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병든 자아는 관계의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건강한 자아란 건전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좀더 깊이 있는 삶으로 들어가는 그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의 임무가 신도들을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깊은 곳에 쉴만한 곳이 있고 우리가 그곳에 머무를 때 자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삼월부터 '치유와 성장' 강좌가 시작됩니다. 이 강좌의 목적은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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