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 중 초상이 나서 빠른 시간에 달려가면 가끔씩
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죽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가까이 가서 시체를 만져보면 삶과 죽음이 얼마나 가깝게 교차하는
지, 또한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산 사람은 냄새도 안 나고 특히 젊은이들에게선 향기마저 납니다. 그러나 죽으면
얼마나 비참한지 잠깐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냄새가 나고 시신에서 물이 흐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살아있을 때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시련이 오면 눈물을 흘리고 아픔을 극복하면서 향기가 납니다. 살아있는 영혼은 시련을 인해서 더 경건해지고
고난 때문에 더 거룩해지지만 영혼이 죽으면 반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감격할 줄 모르며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만나도 그것 때문에 흐느낄 줄 모릅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마음엔 즉시 영혼이
썩는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 대신에 그 사람의 부패한 인격의 깊은 바닥 속에 잔존해 있던 더러운 것들이
솟아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때의 본성들이 흘러나와 심한 악취가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관건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죽은 채로 태어나서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이 계속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알고 믿기 전에 우리는 모두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속속들이 썩고 여름날 물이 흘러내리는 시체와 같이 더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간절히 외치고 있는 것은 그 대상이 거듭나 본 적도 없는 본래 죽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주님을 믿어서 생명을 누렸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살기위해서
여러분,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잠자던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서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어두움과 무지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에 붙잡혀서 짐승처럼 살아온 지난 날의 삶을 회개하고 주님의 참다운
사랑 속으로 들어갔다는 소식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소식을 들을 때 오랫동안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던 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이요,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이며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자기의 자녀들의 영혼을 바라보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아니면 잠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이제 깨어나 생명의 심호흡을 하는 회복의 단계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전망이 어두운 이 시대를 위한 가장 훌륭한 대안은 소생된 영혼으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세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듣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 같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하실 때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우리의 영혼이 변화하는가에 대한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라
그 중의 첫째는 ‘귀를 기울이고’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신기하게도 ‘너희들의 한 귀를’이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귀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단지 얼굴에 달린 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예비 되어 영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귀를 기울이고’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희들의 한 귀를 펼치고’라고 되
어 있습니다. ‘펼치다’의 의미를 가진 이 ‘나타’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텐트를 칠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된 영혼의
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중된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작은 소리를 들으려고 할 때 귀에 손을 펴서 대면 소리가
모아져 들어오면서 더 잘 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는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귀를 펼치는 집중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 곳에 모여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도 방해할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쓸데없는 욕심이나 근심, 염려들이 마음 전체를 지배하면 영혼의
참된 변화에 이를 수 있는 기회는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생각 없이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마음을 미리 준비하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살리실 것을 기대하며, 선포되는 말씀에 자신의 삶을 걸고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이번 온가족 수련회를 위해서는 제일 먼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우리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귓바퀴를 펼쳐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깊이 받아들여 여러분이 영혼의 참다운 변화에 이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아와 들으라
두 번째는 “내게 ‘나아와’ 들으라”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도 ‘나를 향하여(혹은 나에게로) 걸어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는 주관적인 느낌보다 객관적인 자기 인식이 더 중요합니다. 그 객관적인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할 때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만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소위가 자기의 보기에는 옳은 것 같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내리신 평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의 시각에서 그들의 실상은 부유한 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기 인식의 첫 번째 걸음입니다.
인간 자신의 상처와 고통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삶에
대해 스스로 처방을 내리지만 그것은 거의 정확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든지 주께서
나를 판단하실 때에 주는 옳고 나는 틀렸습니다,.’라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자 하는 신앙의 인격적인 자세가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많이 죽어있든지, 그리고 그 영혼이 얼마나 많이 아프든지 결코 포기하시거나 돌려보내시지 않고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입니다. 그것이 참된 영혼의 변화에 이르게 하는 한 조짐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오랫동안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때가 되면 이상하게 마음속에는 하나님 한 분을 깊이 의뢰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 주님이 나를 고쳐주시고 받아주실 것이다’라는 마음이 단순한 기대를 뛰어넘어서 강력한 믿음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망가졌으면 더 주님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아버지께로 가는 길 외엔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품을 향해서, 그분께로 걸어가는 그 한 길인
것입니다.
들으라
마지막으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샤마’라는
이 동사는 구약성경에서도 의미심장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청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의 귀를 기울이고”가 이해를 지향하는 집중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마지막 세 번째의 “들으라”고
하는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욕구를 가지고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내적인 순복의 의지를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말씀을 많이 깨달은 것이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스며들어
그 말씀이 ‘들려서’ 자기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그렇게 자기 속에 축적된 말씀에 관한 지식은 자신의 인격과 삶에 깊이 용해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 때문에 자신이 주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통해서 지식을 갖게 된 사람들은 결코 그 지식을 자기의
공로인 것처럼 자랑하거나 자기보다 부족하고 성화 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맺음말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잘 모릅니다. 양파껍질처럼 벗겨내고 벗겨내도 갈피갈피 스며든 이 부패와 죄악성 때문에 우리가 아직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려서 영혼 깊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염려하고 진실 되게 걱정하는지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영혼의 참다운 변화, 죽었던
영혼들이 진정으로 살아나는 이 복된 영적인 참된 변화는 ‘들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단순한 들음이 아니라 내적인 순복의 의지가
있는 들음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좋으면 행하고 싫으면 집어치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을 듣는 것과 재미로 천
원 내고 점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듣는 것이야 억지로라도 끌어다 놓으면 듣겠지만
내적인 순복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오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자기를
계속 낮추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한 견해를 듣고 참고 하겠다는 자세는
주님 없이 살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더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 배워야
하는 과외 공부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적인 순복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가 부인할
수 없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슴속에 들려오는 그 순간 나는 순종하리라. 주님의 뜻대로 내가 살리라’ 하는 고백을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