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을 찾는 목자 2001-12-24 20:41:28 read : 111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3-7)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는 가난한 자들이 즐겨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혔고 어디 가든지 소외된 사람들이었지만, 마주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자기들과 같이 이 세상의 버림받은 자를 찾아오시는 참다운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은 믿는 것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 서기관들과 같은 인간적인 의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긍휼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즐겨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종교인들은 이 죄인들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그들은 이 죄인들이 회개해서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바 되었다가 다시 찾은 바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 멸망하기를 바랬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네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 놓고 창녀와 세리와 이런 악한 자들과는 여행하지도 않고 함께 식사하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 뭔가를 맡기거나 혹은 법정의 증인으로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규례를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잃은 양을 찾으러 온 사람이다. 나는 잃은 양을 찾으러 온 목자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가장 커다란 일은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양으로 비유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양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광야는 그렇게 즐겁고 아름다운 여행이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비좁은 유대 광야와 험한 요단 계곡, 동부의 고원지대, 그리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땅은 황량하고 황무지로 이어지는 들판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초지를 찾아서 먼 거리를 짐승들을 데리고 유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 들판을 지나서 이제 목자가 다시 우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들어와서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는데, 백 마리여야 할 양 중에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즉시 이 한 마리의 양이 어느 양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는 양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양에 대해서 목자가 염려하는 것은 양에 대한 목자의 사랑 때문입니다. 양은 누군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목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카멜레온처럼 주위의 색깔을 따라서 자기의 모습을 변신해서 숨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커다랗게 자기의 위험을 알릴 수 있는 목소리를 지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누군가의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는 양의 연약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해서 걱정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간의 그림은 '너희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너희는 나의 보호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아시겠습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너희는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존하고 그 은총을 양식으로 삼고 그 은혜를 식물 삼아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고 교회에 잘 나오고 열심히 헌금하고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라고 남들이 말해준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바로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잃어버린 양들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은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잃어버려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 혼자 힘으로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내 힘과 내 재주와 내 능력대로 내 인생을 혼자서 꾸려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하나님의 최고의 방법은 놔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마음껏 살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거기에는 수고와 슬픔밖에 없고 실패와 낙심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릎꿇지 않으려는 우리들을 관절염이 나도록 무릎을 차서 꿇어앉히시지 않습니다. 머리를 숙여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을 뒷덜미를 쳐서 목을 부러뜨려서 우리를 고개 숙이도록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눈물을 흘리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에다가 처박아서 우리를 회개시키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밑지는 목자
목자가 양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그 양이 얼마짜리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것은 양을 잃은 것이 아니라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해 내신 것은 세상적인 비즈니스로 보면 밑지는 장사입니다. 여러분을 구원시켜 놓으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영광 돌리며 살겠어요?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참된 사랑으로 관계를 하나님께로 새롭게 돌이키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과의 놀라운 관계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살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설득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평민들은 양을 직접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 생활을 하면서 공동으로 출자를 해서 공동으로 소유한 양을 길렀고 공동 소유의 양이니까 그 마을 사람들이 목자를 고용해서 그 양을 치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삯군입니다. 삯군은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이니까 날짜를 때우면 돈이 나옵니다. 악한 자가 올 때 도망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잃었던 나의 양을 찾았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양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양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잃었던 양이로다"고 말씀하심으로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 양이 여전히 예수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양을 목자는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목자들은 양 한 마리 한 마리마다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다른 집의 잃어버린 양들이 들판에 서성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거나 한 마리 잡아다가 백을 채우면 될텐데 목자는 백이라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한 마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곧 한 영혼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여러분들 가운데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는 1번, 2번, 3번, 4번 같은 기호가 통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그 부르심의 구체적인 현장에는 언제나 이름이 있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마리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놓여있는 삶의 현장에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삶 속에 오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간에도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아 나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백성들, 구원받아야 할 양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관계를 잃어버린 고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그 양을 반드시 찾기 전까지는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일어나는 그 양을 찾아야겠다는 집념을 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설 때는 어두움이 깔린 밤중이었을 수도 있고 도적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산 계곡에 들어설 때는 맹수로부터 공격을 당할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보다 더 넘치도록 뛰어난 것은 잃어버린 그 양을 찾아야겠다고 하는 목자의 집념이었습니다.
그런 집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시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찾으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셔서 여러분들을 찾아가시기도 하고 또 목회자를 보내서 여러분들을 찾게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다는 사실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도 하셨습니다. 선교사를 보내기도 하고 전도자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가 직접 오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내었지만 영접하지 아니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이 세상의 목자 잃은 양 같은 사람들을 찾아오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죄로 가득하고 슬픔이 많은 이 천한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이 시간에도 찾으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는 것은 한 번 찾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4절은 말하기를 '찾고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묻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계속 찾고야 맙니다. 도중에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낮에만 찾거나 그리고 날 좋은 날만 양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열 시간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친 자처럼 어두워지면 횃불을 들고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양떼들을 당신에게로 돌려놓으시기 위해서 오늘 이 시간에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와 계신 것도 어떻게 보면 주님의 집념 어린 추적으로 인하여 와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집념, 하나님의 집념이 성공하고야 만 것입니다. 결국 이 목자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잃어버린 그 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온 것입니다. 한쪽 어깨가 아니라 양쪽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온 것입니다. 어쩌면 그 양은 앞도 안 보이는 밤길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가시에 찔려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을 수도 있고 거름 무더기 같은 곳에 빠져서 온 몸이 더러운 오물로 묻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양을 찾았을 때 목자는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찾은 것입니다. 자기의 그 최상의 기쁨을 이 양을 어깨 위에 메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은 이 목자의 어깨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자기의 다리로 걸었지만 이제 지금은 목자가 걸어가고 자신은 목자의 어깨 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목자의 참된 품을 거절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발걸음으로 부지런히 자기의 인생 길을 걸어가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수고하고 고통스러운 것 밖에는 도무지 진전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때 주님의 기쁨은 더 큽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나간 아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큰 잔치를 베풀고 아버지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죽었다가 살아온 내 아들이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하나님의 눈에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곧 죽음입니다. 광야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알기 때문에 양을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더욱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과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을 거절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죽은 뒤에 기다리고 있는 지옥의 심판의 비참함을 우리는 몰라도 이 모든 것들을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 받을 그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를 보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축복과 구원의 은총이 얼마나 큰 지도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구원과 은총과 축복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그 찾음의 사건을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버리셨거나 목자가 여러분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양은 스스로 목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사람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안에서 사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품을 즐거워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는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여러분들을 찾아서 여러분 앞에 나타나실 때 그분이 내미시는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어깨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상처가 너무 많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 분의 품에 안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죄 가운데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양털에 묻은 수많은 오물 때문에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에게는 우리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맺는 말
이 이야기는 불신자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찾은 바 된 것이 아닙니다. 늘 성전을 올라 다니고 정해진 시간에 손을 들고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잃어버린 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상 잃어버린 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인격적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알고 승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의 참된 사랑을 보이시고 당신의 품안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를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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