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입니다. 5장에서 팔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오르기 시작한 이 산상의 설교는 6:33에 와서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그 올라가는 문턱에 바로 이 외식의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방대한 분량을 할애해서 이 외식의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많이 말씀하시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누차에 걸쳐서 반복해서 자주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이 특별히 경고해도 빠지기 쉬운 죄의 종류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빠졌을 때에 매우 커다랗고 어려운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이 외식의 문제를 열 여덟 구절에 걸쳐서 말씀하시는데 그것도 1절에서 총론을 말씀하신 다음에 2절부터 4절까지는 구제에 대해서, 5절부터 15절까지는 기도에 대해서, 16절부터 18절까지는 금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외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구제, 기도, 금식 이 세가지는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높은 덕목들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자들이 열심히 실천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강조하셔서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하게 독려하시는 대신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위험에 대해서 외식이라는 각도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주의를 환기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외식
예수님께서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는 소위 '화(禍)의 장'(마23)에서 "화 있을진저"라는 말에 후렴구처럼 계속 따라오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선행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세상은 위악보다는 위선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위선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커다란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외식이 생명을 파괴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외식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다른 사람에게 갖게 하고 또 그것이 자꾸 오래 계속되면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외식은 생명을 파괴합니다. 외식을 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내면적인 것들이 있어할 필요를 점점 못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외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영향력 중 하나입니다. 외식은 우리가 이 속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점점 가난한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참된 신앙의 생명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인들 속에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진실을 파괴하고 고사시키는 역할을 이 외식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될 것은 대부분의 외식은 의식 세계 속에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저지러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에게 보여야 되겠다, 인정을 받아야 되겠다, 내가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광고를 해야 되겠다, 내가 금식을 하는 걸 사람들에게 공포해서 나를 존경하게 만들어야 되겠다...이런 생각을 하면 이것은 이미 최악의 상황에 빠져 든 것이고 오늘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오늘 우리도 받고 있고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그럴 위험이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지금 이 외식에 대한 말씀을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을 불러 놓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5:1)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은 병 나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팔복산을 함께 따라 올라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당연히 열 두 명의 제자들도 있었고 그 중에 다수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외식은 신앙이 어린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는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높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가치, 그것을 사람이 부러워 할 것이라는 것, 또 그것들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같은 것들이 비교적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식은 비교적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헌신되고 신앙생활의 가치, 헌신의 가치 그리고 높은 경건의 덕목이 가지는 인격적인 설득력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기까지 주를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권능을 한없이 선물로 받아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첫 번째 기독 교회의 설교를 장엄하게 외쳤던 베드로도 이 위험에 빠졌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상의 음식을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안 먹은 척 했다는 이야기가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영광을 얻기 위해서 외식을 시도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외식은 의식의 세계 속에서보다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더 넓게 우리의 삶을 주관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매우 혐오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유가 없어요. 이러한 외식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하는 마음은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철저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공격할 때 제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라는 화려한 형식 속에 충분히 깃들여 있지 못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끊임없이 추적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런데 오늘 성경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외식의 동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의 동기인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출발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려진 사람, 그것은 이미 나머지는 이미 모두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입니다. 내 몸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손도 드리고 발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범사에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동기가 되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외식하는 사람들의 동기는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물론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어서 사람들도 봐 주기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느 사람이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어서 사람도 자기의 의를 알아 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마음이 하나님께로만 향해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나뉘어진 마음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기울어진 신앙은 하나님만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만 시야를 채웁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집1니다.
사람에게 자기의 의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결국은 나로 하여금 나 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기를 어떻게 제거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이제 더 큰 숙제로 남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보여 주고자 노력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의가 드러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감추는 노력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자기의 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도록 감추는 역할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식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외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외식만 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주목하고 관심을 갖지 않도록 자신의 의를 은밀하게 감추고 덮고 가리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을 잃지 않는 비결입니다.
금식을 일주일이나 열흘 쯤 해보십시오 그러면 팔 하나 움직이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요. 머리는 못 깎고 수염은 자랐습니다. 이거 수염 이렇게 기르고 금식했다고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기도 하다 보니까 수염이 자라고 머리가 길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금식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를 감추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외식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선행을 했습니까? 감추어져 되요. 사람이 알까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을 가지십시오.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들이 그것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알려지지 않도록 감추세요. 이것이 바로 외식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지만 그러나 감추면서도 누가 와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 마음이 외식하는 마음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너무나도 세속적인 자기 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감춰야 되요. 감춰야 되요. 헌금을 많이 한 것도 감춰야 되요. 선행을 베푼 것도 감춰야 되요. 누가 무슨 선한 일을 한 것도 감춰야 되요. 다른 사람 것도 감춰주어야 되요.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알려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감춰지고 또 감춰지는 이런 삶 속에서 유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유익입니까? 우선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충만해지게 되면 사람들이 의를 행할 때에 이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들키고 있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외식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감추십시오. 기도하는 것 감추세요. 선행을 하는 것 감추고 누구를 도와 주고 싶은 것 감춰야 됩니다. 우리의 의가 감추어지고 하나님만이 내 의를 알고 계실 때 그 때에만 그 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 하면 의를 행할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습니까?. 의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알아주는 그 의 때문에 멀어졌던 것입니다. 보면서 어이구 팔 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사실과 유대인이며 베냐민 지파라는 사실, 많은 학식이 있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업을 했다는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상
오늘 본문이 다음으로 말씀하고 계신 바는 무엇입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늘의 상"은 별로 실감이 안 납니다. 하늘의 상은 외상이고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받는 상은 현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기도, 선행, 금식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눈은 외상으로 달아 놓은 하나님의 상 보다는 현찰로 갚아 주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상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현찰로 오는 사람으로부터의 상과 외상으로 달아 놓은 하나님의 상급을 비교하는 것조차 하나님 앞에 불손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평생해서 무릎이 정말 낙타 다리처럼 굳어지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는지 눈물이 하도 지나가서 골이 패였어요. 그렇게 기도를 하고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갔는데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흐르는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시면서 "네가 이 땅에서 이 눈으로 나와 내 백성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많이 울었구나. 사랑하는 착하고 충성된 나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줄 상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상이라고 하지만 현찰하고 바꿀 수 있는 성질의 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여러분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 상을 받는 사람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얘야 너는 네 상을 다 받았단다. 이집사도 네가 잘 났다고 하고 박장로도 네가 잘 났다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게 이 세상에서 네가 까먹은 상이다" 그 때 하늘나라에서 받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뭐 사모할 것이 있겠습니까?
맺는 말
외식은 우리로 하여금 현세에 대한 욕망을 과도하게 만들어서 그 과도한 욕망 속에서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앗아갑니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그리워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쥐꼬리만큼 한다는 것 때문에 개꼬리만한 대우를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면서도 이 땅에서 대접다운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이 주님의 나라를 그리워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러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진실하게 살기로 갈망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은연중에 무의식 속에서 인정받고 싶어하고, 영적인 사람임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하고, 사람들에게 난 체하고 싶어하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까먹고 있는지 모릅니다.
외식이 없는 교회, 외식이 없는 신앙생활, 외식이 없는 지체들의 모임에는 마음 상함도 엄청나게 줄어들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을 뻐기는 사람이 없고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영적인 사람으로 자기가 보일까봐 두려워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천국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아름다운 천국의 그림은 헌신된 사람이 없어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 헌신된 사람들 속에 깃들여 있는 외식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파괴되고 깎아 내림이 있는 것입니다. 깎아 내림이 있고 비판이 있고 미워함이 있고 시기가 있고 원망이 있고 그리고 급기야는 지체를 향해서 칼을 가는 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외식은 살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나아갑니다.
이런 일들은 수준이 형편 없는 교회에서는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말씀을 깊이 듣고 인생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싶고 주님 앞에 멋지게 살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실로 우리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들을 보고 여러분들의 삶이 놀랍도록 쇄신되어서 감추어진 의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의만이 드러나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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