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 2001-12-23 19:29:30 read : 130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행1:1-14
오늘 아침에 난 기사입니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 임신 8개월인 아내를 숨지게한 30대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양씨는 자신의 카니발 승용차에 아내 이모(28)씨를 태우고 안성시 원곡면 경부고속도로 지하차도를 통과하다 고의로 옹벽을 들이받아 이씨를 숨지게한 혐의다.
경찰조사 결과 양씨는 사고 발생 4일 전에 이씨 명의로 4억원짜리 생명보험에 가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양씨가 옹벽을 들이받은 뒤 출혈이 심한 임신 8개월의 부인을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점, 보험금 상속자가 양씨인 사실 등을 수상히 여겨 집중 추궁한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또 하나 기사입니다
10대 청소년이 어린시절 자신을 보육원에 버린 아버지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재가한 어머니까지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진모군(19)은 지난 18일 서울 장위동 자신의 아버지(49·구청 공무원)의 집에 찾아가 안방에서 잠자던 아버지의 머리를 미리 준비해간 쇠파이프로 5차례 내리쳐 숨지게 했다.
조사결과 진군의 아버지는 지난 85년 아내 이모씨(42)와 헤어지면서 당시 4살이던 진군을 보육원에 맡겼다.
진군은 보육원에 보내지면서 부모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군은 경찰에서 “인간대접을 받은 기억이 없다”며 “범행을 후회하지 않으며 어머니도 살해할 생각이 있었다”며 부모에 대한 깊은 원한을 드러냈다.
그는 또 “처음 보육원에 들어가던 지난 85년 아버지와 헤어지기 싫어 울던 기억이 선연하다”면서 “보육원에서 형들에게 맞거나 배고플 때마다 나를 버린 부모님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악한 사람의 모습입니까?
여러분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어째서 이혼을 했을까?
4살 되는 자식은 보육원에 버리고 부모만 잘살아 보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본부인과 자식을 길가에 버리고 혼자 잘 겠다고 보니까 구청직원이던데
혼자 편하게 안방을 잠을 자요!
결국 그러다 버린 자식에게 맞아 죽은 것입니다
살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인륜을 저버리면 벌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1200백 만명이면 뭐합니까?
그 아이에게 누군가가 가서 예수 믿게하고 용서와 사랑과 구원을 제대로 가르쳐 줬으면
새로운 인생을 살았을 텐데 모두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는 세상에 나가 복음에 증인이 되라고 했는데
우리는 비겁하게 나 혼자 잘살고 내 한몸 육신의 안락 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해 왔으니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비겁한 껍데기 신앙입니까?
뉴욕타임스(NewYork Times)는 지난 세기를 정리하면서
'지난 천년은 인간이 신이나 국왕보다 자기 자신 중심의 시대였다'라고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난 천년은 '나 밀레니엄이었다'라는 것입니다.
나를 찾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 버렸고 이웃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권을 찾기에 애를 쓰며 욕망을 마음껏 누려보려고 했으나
하나님과 관계를 상실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심이 상실되고 인간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시대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을 보여주면서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시작된 초대 교회의 성장 과정을 생생히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전파되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상세히 그려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행하신 일을 기록하신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고, 사도행전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수신인은 '데오 빌로' 라고 되어 있는데 그는 로마의 고관입니다.
'데오 빌로' 라는 이름의 뜻은 '데오스(하나님)와 필로스(사랑) 두 단어를 합한 것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임을 확신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을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모를까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상에서 나를 위하여 고통 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만 합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여러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친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예수의 승천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하면서도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 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데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축복하시며 그대로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셔서 보이지 않았지만 놀란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천사의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하늘로 올려 가셨지만 이 세상이 마치는 그 날 예수님은 재림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우리 주님은 승천하신 그 영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천사가 한 말의 또 다른 의미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늘만 바라보면서 탄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해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명령이 무엇입니까?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스가랴 선지의 고백처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했습니다.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우리 집에까지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발전소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스위치를 올리지 않으면 밥도 못하고 전등도 못 켭니다.
아무리 발전소에서 엄청난 전기를 보낸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그것을 작동하는 스위치를 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교회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성령은 결코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중심 나 중심으로 살아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받고 거듭나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도 하고 열심히 봉사도 감당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죄를 차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알면서도 죄 앞에서 넘어지고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죄를 이길만한 능력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해도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의 참담한 수용소에서 유대인 디무르라는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히틀러의 가장 측근 참모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증인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디무르는 한참 동안 아이히만을 쳐다 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졸도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깨어난 그에게 쓰러진 이유를 물었습니다.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졸도 하셨습니까?""아닙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미움 때문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졸도 하셨습니까?""그것도 아닙니다.""그러면 왜 그랬습니까?"
그때 그 사람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습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나의 동료들을, 그 많은 어린아이들을, 노인들을 어떻게 저 비참한 가스실로 몰아내도록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일수가 있었겠는가?
저는 그 사실 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도 아이히만이 될수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랐습니다.
내가 아히만을 보았을 때 내 속에도 아히만처럼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고 살인의 광기가 있는 아히만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 앞에 놀랐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의 죄를 손가락질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그와 같은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속에 죄의 속성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이 죄의 속성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비결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죄의 속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기며 사는 비결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세례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8절읽음/ 권능 :권세와 능력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떠나시기 직전에 무엇을 우리에게 주실까 기대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바람이나 파도를 명령하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다 치료하는 능력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위로부터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은 성령충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부활신앙의 삶을 살려면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사람씩 변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무엇을 해야하겠습니까?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주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근본적으로 변화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작전을 세워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주변 사람을 변화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진정으로 변하면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영력)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육체적인 힘이나 정신적인 힘으로 부족합니다.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은 성령의 능력으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에 대하여 네차례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강퍅한 불신자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고 저주하던 베드로도
오순절을 통해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니까 삼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행2:41).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3:6). 5천명이 회개합니다.
D.L 무디는 비록 그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성령의 권능을 받아 일생 동안 5천만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5절에서"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 세례가 외형적이며 의식적인 것이라면 성령 세례는 내적이며 신령한 것으로 신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값으로 육이 되어버린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또 생기를 보내십니다.
"너희는 이 생기(성령)으로 충만하라"
성령 세례는 우리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만든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므로 우리 곁을 떠나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내 몸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예수를 가장 쉽게 믿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연합은 함께 죽고 함께 산 사람이므로 사는 것이 쉽고 편안합니다.
성령의 연합은 신비한 은혜입니다.
어느 회사에 많은 사람들로 부터 칭찬받는 여직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자질을 가졌거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로 부터 칭찬받는 여인이 되었을까?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 내 인생이 변화되었어요.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서
'단 하루 동안이라도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믿음을 실천하여 보라'고 하셨어요.
사람이 일생 동안 약 50만 시간을 산다는데 그 많은 시간들 가운데 24시간 정도는 온전한 믿음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그렇게 해 보기로 결심했지요."
그녀는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 몇 구절을 읽고, 그 날의 모든 악한 생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는 예수님 처럼 생각하고 믿음을 실천하겠다"고 되새기면서 그 날 아침의 일을 시작했다.
불친절한 말이 입술까지 나올 때마다 짤막한 기도를 하며 물리쳤다.
어떤 두려움이 닥쳐올 때는 다시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했다.
게을러지려는 유혹이 들 때는 "만일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실까?"를 자문하면서 그날을 내내 그렇게 보냈다.
그 날 저녁 그녀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행복하고 만족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둘째 날에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다. 마침내 그것이 그녀의 삶의 철학이 되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는 믿음을 실천하며 살겠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더 쉬워졌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꼭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면 사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살게 됩니다.
예수 따로 나 따로 있으면 나를 위해 사는 것과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 상반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예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삶의 목적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서 모든 삶의 가치가 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위하고,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에 따라서 되어지는 모든 삶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성령 세례는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룬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성령 세례를 통해서 우러나는 사랑은 연합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연합된 사랑은 한 몸의 사랑이요,
예수님과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간절히 사모할 때 셩령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성령입니다.
저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4절에 "모이사,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모여야 하고, 기도회 시간에도 모여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여야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일 때 비전이 보이고, 모일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사모하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몸과 마음, 시간과 정성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그리워집니다.
그처럼 예배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의 사랑의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만남을 사모하고, 이 만남을 가지는 것이 행복한 신앙생활의 원천입니다.
만남이 없으면 관계가 멀어지고 각종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날 왜 부부관계가 흔들립니까? 얼굴은 보지만 진정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얻어 누리기 원한다면 먼저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드릴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로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마음이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게 됩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을 사모하고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예배에 참석하면 손해인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유익입니다.
반면에 예배에 빠지면 그때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삶이 훨씬 더 힘들어집니다.
어떤 분이 세상일이 많아 벅차니까 주일도 빠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쳐서 책상에 엎드려 잠깐 낮잠을 자는데 꿈을 꿨습니다.
꿈에 사다리가 보이더니 그 사다리가 하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단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투덜댑니다. "하나님! 단 하나를 빼서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드나요?"
그처럼 단이 하나 빠져 있으니까 오르기가 위험하기도 했고 힘도 배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는데 어느 곳에서는 세 단이나 빠져 정말 오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데 너무 힘들어 불평했습니다.
"하나님! 3단이나 없는 이런 사다리를 주시면 어떻게 하늘로 갑니까?"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 단은 하나님이 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일을 범해서 스스로 뺀 것이오."
내 인생에 언제 가장 보람이 있었고, 언제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헌신했을 때가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할 때 우리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삶의 모든 부분이 윤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시간을 무엇보다도 사모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삶에 모습 자체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엄마가 변했다
내 아내가 변했다
우리 며느리가 변했다
진실하고 경건하고 아름답고 성결하고 거룩하고 사랑이 충만한 모습이 뭔가 다르다
내 아내지만 존경스럽다
내 엄마지만, 내 며느리지만 존경스럽다
뭔가 끌린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영력입니다
그때 우리의 말 한마디라도 무게가 있고 놀라운 권능을 발휘하여
그들이 우리를 따라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권능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와 같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25일 11시 성탄 예배에 가족을 모두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2001년 12월23일 주일예배 이왕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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