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난 여선지 2001-12-18 15:49:14 read : 128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눅 2:36-39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 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누가복음 2장 36절-39절>
오늘은 강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이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기다리다가 생시에 그를 만난 여선지 <안나>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메시아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살다가 갔지만, 그 메시아를 직접 눈으로 보고 간 사람은 시므온과 안나 뿐입니다.
이 <안나>는 어떤 인물이었기 그러하였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안나>의 신앙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을 찾도록 하여야겠습니다.
1. <안나>는 대망 중에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직접 예수를 만났습니다.
본래 '안나'는 히브리어 '한나'의 헬라어 표기로서 '은총'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나타난대로 보면, <안나>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로서 여선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대망하던 시기인 주전 1세기 말로부터 주후 1세기 초에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300년 동안 이스라엘 역사는 아무런 예언자들의 활동이 없이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아 요단강으로 나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이 때 안나는 주님의 나심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고, 그를 성전에서 직접 만나 보았습니다.
어떻게 안나는 예수님을 그렇게 만나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일반 세상적으로 보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본문의 기록대로 보면, 결혼 생활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84년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았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84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금식과 기도로 살았으니, 그가 얼마나 정숙하며 신실한 여성이었던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과연 안나와 같은 그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오직 메시아 강림을 대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대망의 주님을 직접 죽기 전에 눈으로 친히 보았으니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들 중에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묵상 중에 기다리다가 죽었지만, 이 <안나>는 죽기 전에 생시에 기다리던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이렇게 직접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2. <안나>는 메시아 오심을 누구보다 확신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나타나야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 기다림이란 매우 참기 어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 기다림이란 고통스러움입니다.
지금도 매 수요일마다 TV에서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데, 그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30년, 40년의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기다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기다림이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현실을 살아가게 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림이란, 역경 중에서도 살아야 할 보람과 가치를 갖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만일 기다림이 없다면 소망도 없을 것이고, 소망이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신을 갖고 기다리는 기다림이란 점에서 <안나>에게서 배워야 할 신앙적 교훈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무엇인가 기다리며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명예이든, 성공이든, 사람은 기다림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대부분 막연한 기다림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연한 기다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듭니다.그러나, 확신에 찬 기다림은 어떤 현실의 역경에서도참아낼 수 있게 합니다.
우리 나라가 경제성장의 붐을 탔을 때 즉, 70-80 년대 한창 외국에 나간 남편들
을 기다리며 살았던 주부들이 많았습니다. 중동 지역이나, 사우디나, 독일의 광부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면 마다않고 나갔습니다. 그 시절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들은 모두 소망 중에 현실의 고생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기한이 차면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는 소망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현실의 구차한 삶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소망 중에 기다리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안나와 같은 주를 기다리는 확신의 소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안나>는 오리라는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안나>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84년의 세월동안 성전에서 묵상과 금식과 기도로서 그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현대의 크리스천들 신앙을 한번쯤 점검해 보게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 어려운 핍박과 역경 중에서도 재림의 주님을 기다림으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였는데, 오늘 우리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고통스러움은 주님을 기다리는 확신에서 오는 고통이 아니라, 대부분 현실의 문제, 먹고, 입고, 사는 문제들로 인한 고통스러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안나>의 신앙의 만분의 일이나마 갖고 살고 있다면 오늘 우리의 생활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아니 우리 민족과 사회는 분명히 변화할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 주 오심을 확신 가운데 기다리는 마음!
바로 그것을 되찾는 것이 강림절을 지키는 의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긴장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신앙은 사두개파들과 헤롯당파들 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두개파들은 재림과 부활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헤롯당파들은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나라보다 현실의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모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쉽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재림 신앙의 확신이 없이 믿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신앙이기에 현실주의적, 이기주의적, 자기중심적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에 나타날 영광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현실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이 세상에서 영광을 다 누리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안나와 같이 확신에 찬 기다림으로 우리도 재림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3. <안나>는 주 오심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가 받은 직책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는 재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84년의 세월이 가는 동안 어찌 인간적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그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왜 인간적인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명과 직분 감당을 위하여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큰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시련이 와도 성전을 떠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귀한 직분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자신의 직분이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 같이 생각하다보니,
사람들의 말에 쉬 동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싫어지면 자신의 직분도 쉽게 내팽개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은 평안한 중에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모두 가시와 함께 부름을 받았고, 고난 중에서 도리어 그 직분에 대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모세도 가시 덤불 속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던 그 시절에 어느 날 떨기나무 숲에서 타는 불꽃 중에 그를 불러냈습니다. 가시나무가 불에 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긴 모세는 점점 그곳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불러내어 쓰실 때 가시와 함께 불러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도 세 번씩이나 육체의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직분에 대한 충성은 역경 중에서 더욱 더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 라고 직분에 대한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충성이란 직분과 관계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직분을 옳게 감당하기 위하여 때때로 안나와 같이 84년이란 긴 세월동안의 고난의 세월 속에서 감당케 합니다. 결코 주님께로부터 받은 귀한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칭찬만 들어가면서 할 수 없는 직분이란 점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무슨 직분을 맡았다가 스스로 그만 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안나>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메시아의 대망 중에 현실의 고통은 그것으로 극복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안나>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대망의 주님을 직접 보고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안나와 같이 여한이 없이 살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생시에 자신의 기도가 성취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최대의 축복입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축복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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