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얼굴이 흉해서 늘 부끄러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정말 흉하여 보는 이들마다 놀랐고 아이들의 놀림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나 놀이터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어린 생각에 차라리 어머니가 없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다른 일로 친구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친구가 네 엄마는 괴물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말에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더 이상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울기만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달래면서 자꾸 묻자 아이는 친구들이 엄마를 괴물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왜 엄마는 그렇게 생겼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작은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진에는 보기 드문 아름답게 생긴 여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진 속에 있는 여자가 바로 네 엄마가 젊었을 때 사진이다. 네가 젖먹이 시절에 집에 화재가 있었는데 불 속에 뛰어 들어 너를 구하다가 그만 화상을 너무 심하게 입어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니었으면 아마 너는 죽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울고 있던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손으로 어머니의 흉물스러운 얼굴을 만져 보았습니다. 아이는 그 얼굴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살지 못했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의 흉물스러운 얼굴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자랑이었습니다. 그 얼굴 속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어머니의 생명을 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 다음부터 어머니의 그 흉한 얼굴을 자랑하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여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깨닫고 보니 바로 예수와 그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진리가 있는 복음이야말로 자랑할만한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웨치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에 대하여 확신과 자신감이 없어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의 능력이나 그 깊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된 바울은 복음의 진수를 발견한 바울은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너무 너무 자랑스럽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단어는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여섯 번이나 언급하였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으니"라고 하여 복음 때문에 택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9절에서는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하여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증인이 되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여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복음 전파의 열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에 매달린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복음에 빚쟁이다! 복음에 빚진 자다!"라고 웨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그 안에서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였기에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16절에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음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천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막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하여 복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어 영원히 죽어야 할 사람을 영원히 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땅의 능력이 아니요 하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외적인 능력이 아니라 내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귀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들의 수기를 모은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신앙 간증집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사람을 잔인하게 16명이나 죽인 김대두씨의 실화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사형집행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라는 집행관의 질문에 "저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영영 이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나라에 가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동석했던 목사님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누가복음 23장 42절과 43절 말씀을 읽어주자 김대두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고 찬송을 부르며 평화롭게 천국으로 갔습니다. 세상이 살인마라고 정죄했던 한 사형수가 옥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님을 만났고, 복음을 받아 드림으로 산 소망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까?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하였고 계속하여 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여 믿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 죄와 허물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죄로 인하여 저주와 재앙을 받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저주와 재앙에서 건져 주실 뿐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았으면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을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까지 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부를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 죄와 허물 때문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였고 요한일서 1장 7절에서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이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졌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여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면 소용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영접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믿음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10장 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새 침대를 산 사람이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꾀병을 않았습니다. 문병을 온 사람들이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를 보아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새로 사 입은 속바지를 자랑할 데가 없어 고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방에 들어서자 마자 대뜸 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바지를 걷어 속옷이 보이게 하면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무슨 병이기에 이렇게 거동도 못 하시고 계십니까?' 친구는 계속 속옷을 만지작거리고 들여다보면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침대 자랑을 하려고 꾀병을 앓던 사람이 한숨을 내 쉬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보아하지 내가 앓고 있는 병이나 자네가 앓고 있는 병이 똑같은 병인 것 같네'라는 이야기가 중국의 고전 유머집인 소림광기라는 책에 있습니다.
좋은 반지 하나만 사도 낀 손가락이 들어 나 보이도록 이마를 짚는다고 하는데 어찌 참 구세주가 되시며 영원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미숙한 신앙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하고 그 복음을 힘있게 증거할 수 있는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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