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만 있는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는 땅 보다 쓸모가 없습니다. 캄보디아와 월남이 있는 인도지나 반도는 산이 별로 없습니다. 어쩌다 산이라는 곳은 해발 100미터 정도에 언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곳도 쉽지 않습니다. 그저 허허 벌판 같은 평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땅에는 비가 오면 흘러갈 곳이 없습니다. 다 평지이니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모든 땅이 질퍽한 늪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산이 있고 계곡이 있는 땅이라면 충분히 물이 흘러내리고 땅이 들어 나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평지만 있는 땅은 그렇지 못합니다. 산이 많은 것을 늘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일을 회개하면서 산이 있는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는 인생만이 더 유용한 인생입니다. 아무런 고난이 없고 아픔이 없는 삶은 결코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인생은 성숙하게 되고 아픔 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고난을 주신 의미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고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높고 깊으신 뜻을 깨닫고 더 큰 은혜의 자리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쓰신 [밤의 은총]이란 시를 읽어보면
태양은 아침에 떠올라
어둠을 몰아내고 나로 하여금 나무를 보게 한다.
밤은 태양의 등을 밀어
빛을 삼키고
나로 하여금 나무를 보지 못하게 한다.
들과 작은 언덕과 수플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저 영원히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나로 하여금 우러러 보게 하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캄캄한 밤이다.
어둠이 나의 눈길을 이끌어
별나라에 닿게 한다.
사람들은 고난에 부딪치면 세 가지 형태로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도피하려는 태도입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만이 해결의 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고난을 피할 수만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고난에서 태어나 고난으로 살다가 고난 속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서 5장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굴복하는 것입니다.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벗어나려는 노력이나 대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의 길이 없는 하나의 굴레처럼 고정관념에 빠져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고난에 도전하여 싸워 이기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고난의 노예가 되거나 굴복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분명 고난에 대처하여 극복하고 오히려 이겨냄으로 훈련받고 더욱 강하여져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쇠가 풀무에 들어가지 않고는 강철이 될 수 없습니다. 금 덩어리고도 불에 들어가지 않고는 정금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조개도 그 속에 깔깔한 모래가 들어가지 않으면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잘 익어 곡간에 들어가는 알곡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비와 바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시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빅톨 유고는 48세 때 게르세아 섬으로 추방되어 20년 동안 고독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려운 환난 속에서 그는 세계적인 명작 '레 미제라불'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고난을 극복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보상과 가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게 되는 진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도 환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든지 비를 맞아야 하고 뜨거운 햇볕에 타야 하듯이 그렇게 인간은 누구나 다 고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6-37절에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타신 배가 가는 것을 보고 따라 나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광풍이 불어왔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도 광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큰 광풍이란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미친 바람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 여러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원망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였는데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정말 주실 복이 없으면 그냥 두시든지 하시지 왜 이렇게 무서운 환난을 주시는 것입니까? 라고 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반문과 함께 역사의 주관자요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역사 속에 활약하는 악의 승리를 보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 반응은 자신의 죄의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이 재앙은 내 탓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환난이 채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모든 고난이나 아픔은 언제나 재앙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를 훈련하시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의도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반응은 더 좋은 길로 궤도 수정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인도하심이라고 믿는 태도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반응이 완전하게 구별되어 나타나기보다는 복합적으로, 또는 단계적으로 나타나는 경향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상과 같은 네 가지 형대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딪치는 환난에 대하여 반응합니다.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환난은 내게만 주어진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구에게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은 환난을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철저한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들도 환난이 있음이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마땅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제 4대 대통령이며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메디슨 (James Madison)은 이런 기도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는 저의 가시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만 번 감사하면서도 주님이 제게 지워주신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저의 인생 항로를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이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옵소서'
오늘 본문에 보면 풍랑으로 인하여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죽느냐 사느냐하는 긴박한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주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38절에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광풍이 불어와 일어나는 큰 물결로 인하여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왔습니다. 금방 배가 가라앉을 것 같은 위기의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안절부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일어나 제자들을 도우셔야 하고 힘을 주셔야 할 주님은 가만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들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환난을 당하였고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왜 돌아보지 않으시냐고 따지거나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십니까 라고 따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긴박하고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도 주님은 전혀 손을 대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간의 시각으로는 정말 두려운 순간이요 답답한 순간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더 나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 분명 심오하고 깊은 주님의 뜻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맡기게 됩니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애굽의 뭍을 곳이 없어 이곳에 장지를 삼으려고 우리를 이끌어 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가르고 홍해를 건너가게 할 하나님의 계획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깨우자 주님은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였습니다.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깨움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바람과 바다까지 꾸짖으셨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사야 55장 10-11절에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듯이 주님의 말씀은 역사하시는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명하시자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던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고 고요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살이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40-41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건입니다. 함께 한 제자들과 주님의 배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냥 랍비라고 부르며 따라다닌 분이 그냥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구세주요 메시야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주님이 나를 찾으시는 방법이요, 우리가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문이요, 주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격하게 하는 은혜요, 주님의 능력으로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마침내는 승리하게 하심을 발견하게되는 감격입니다. 결코 환난이나 역경은 우리를 파멸시키고 좌절하게 하는 무기가 아닙니다. 더 나은 단계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힘들고, 아프고, 괴롭더라도 주신 말씀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어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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