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이라는 말과 순교자라는 말은 한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어서 받아드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오해와 비난, 또는 박해를 당해야 할 때에도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자적인 태도로 어떤 상황에서도 사실만을 말해야 증인다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 교회에서 부활을 증거한 증인들의 삶을 보면 순교자와 같은 증인들이었습니다.
증인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드( )이며 헬라어로는 마르투스( s)라고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한 진실이나 사실을 증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이 말이 법정용어로 사용되었는데 공정한 법정 판결을 위해서는 두세 명 이상의 증인을 세워야 했습니다. 이들 증인들은 정직해야 했고 거짓 증언을 하는 증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습니다. 신약에서도 일반적인 법정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람으로 전도자를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증인은 시대적으로 고난을 동반하는 순교자적 각오를 가져야 했으며 실제로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잠언 14장 5절에서는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고 하였고 25절에서는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고 하여 증인다운 증인, 즉 신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진리만을 증거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잡혀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잡히고 매맞고 고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는 과정에서 사도행전 23장 6절에서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고 하여 바울이 공회 앞에서 증언하면서 자신의 고난이 부활을 믿고 부활을 증거하는 일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계산도 있었지만 바울은 언제나 그 자신이 부활의 증인임을 고백하여 실은 그것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결의가 분명한 사도였습니다.
왜 부활이 증인들이 생명을 걸고라도 증거 해야 할 중요한 진리인가? 정말 부활은 생명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진리인가?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해야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때로는 정말 생명까지 잃었는데 부활은 진정 그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 등 많은 질문을 가지게 합니다. 얼마나 부활의 진리가 소중하였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걸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며 말씀에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베드로는 아주 강하게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하여 자신들이 부활의 증인임을 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민족적인 기대를 갖게 하는 다윗 왕도 죽어 그 무덤이 아직 그들 가운데 있음을 지적하면서 예수의 부활과 그 부활이 선포되어야 할 중요한 진리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정함에 있어서 자격 규정에서 사도행전 1장 22절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하여 부활을 증거 할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가 하신 일들 중에 증거 되어야 할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산상보훈도 귀하고 여러 가지 이적과 기적도 증거 되어야 할 중요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예수의 부활이 꼭 증거 되어야 했기에 부활의 증인 될 사람을 선택하여 사도의 자리에 앉게 하였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사도행전 3장 15절에서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하여 자신들이 부활의 예수를 증거하고 있으며 바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으로 말미암을 것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왜 부활이 그렇게 소중한 진리인가를 먼저 생각 해 보겠습니다. 첫째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믿음이 되려면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이유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게 하시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번에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죄 값으로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우리들이 거룩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은 죄지은 인간에게 내리신 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의 형벌인 죽음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생명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더 이상 죽음에 억눌려 계시지 않고 생명으로 부활하시게 된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래서 인간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필연적인 것이고 결코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둘째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지 않는다면 지금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영으로 임재하셔서 역사 하시는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다면 살아계신 예수를 인정할 수 없고 예수가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를 전혀 받아드릴 수 없고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살아서 역사 하시는 예수의 영을 믿는다면 부활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9절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이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이제 그들도 잡혀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숨어 문을 꼭꼭 잠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지도 않고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평강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은 고난을 당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있는 곳 어디든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면서 언제나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부활의 주님의 영이 이 가운데 계십니다. 그 부활의 영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도 함께 계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주교였으며 설교능력이 뛰어나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이 붙은 크리소스톰이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황제는 크리소스톰을 불러놓고 더 이상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면서 '네가 만일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멀리 귀양을 보내겠다'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이 말에 크리소스톰은 대답하기를 '이 세상은 내 아버지 집이니까 어디간들 상관이 있겠습니까?'라고 평안하게 대답했습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협박하기를 '그러면 네 재산을 다 빼앗으리라'라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대답하기를 '내 재산은 하늘에 있으니 어디 빼앗아 가 보십시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최후의 위협을 가했습니다. '그러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라고 협박했습니다. 이 말에 크리소스톰은 대답하기를 '나의 생명은 예수 안에 감추었으니 폐하가 능히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부활 신앙은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하고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부활을 믿어야 영원하고 불변하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가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이라고 하면 더 이상 우리는 다른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 살아나심으로 영원하고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 16-18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을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여 영광스럽고 풍성하며 영원한 미래가 우리 앞에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이 영원하고 풍성한 세계를 우리 앞에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구원을 받아 영원하고 복된 나라에 오기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부활로 이런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확실하게 우리 앞에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너나 예외 없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마리아가 한 일은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진정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0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나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여 증인됨으로 더욱 분명한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분명히 고백하는 신앙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인은 임종시에 주치 의사에게 내가 살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의사는 30분밖에 안 남았다고 대답하자 나는 남은 30분을 세계의 구원을 얻지 못한 영혼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며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을 믿기에,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믿기에 죽음까지 초월한 신앙으로 마지막을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부활을 증거한 신앙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이런 부활의 능력으로 주어진 삶에서 승리하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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