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한 한국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이수현군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던 대학생입니다. 지난 1월 26일 밤 도쿄 국철인 JR 야마노테센(山手線)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술에 취한 승객이 플랫폼에서 미끄러져 철로에 떨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수현군과 2명의 일본 사람이 그 사람을 구하려고 철로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수현 군은 때마침 역구내로 들어오던 전동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변을 당하여 생명을 일었습니다.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거룩한 죽음이라고 하여 애도하였고 일본 수상을 비롯하여 모든 일본의 지도자들이 진정한 애도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민족도 아닌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더군다나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민족인데 그것을 관계하지 않고 생명을 구하려고 자신의 생명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한 젊은이였고 오래 기억해야 할 숭고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귀한 젊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젊은이의 죽음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이수현군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고 다른 한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뛰어 들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한 사람을 살리겠다는 생각만 하고 뛰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은 정말 두고두고 생각하고 음미해야 할 고귀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죽으심은 정말 우리의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고난을 자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떠나 스스로 택하신 길입니다. 아주 철저히 그렇게 전적으로 희생과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고 준비하신 분명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그렇게 희생하신 것입니다. 전혀 깨닫지 못하여 받아드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거절하고 배반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에는 고상함이나 고귀함이라는 표현 그 이상의 하늘적이고 생명적인 것으로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는 주간이면 거의 빼놓지 않고 묵상하며 은혜 받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 4-6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 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여 철저히, 그리고 완벽하게 고난 당하신 주님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의 잘못을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철저히 우리를 위하신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가리키는 그라는 단어는 일곱 번이나 언급되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희생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심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모리스 구겔은 「예수의 생애」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필수적인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집중된다.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33년 간의 역사를 먼저 생각해 보자. 복음서 89장 중에서 1/4인 25장이 수난의 기사이며 그것을 분리하면 마태복음28장 중에서 1/4이 되는 7장, 마가복음16장 중 1/3이 되는 5장, 누가복음 24장 중1/5이 되는 5장, 요한복음 21장 중 거의 1/2이 되는 9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내용이다. 그의 33년 생애의 중요한 사건 274건 중 91건이 고난의 기사이며 마지막 수난 주간에는 64건, 금요일에만도 24건이나 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십자가는 삶의 절정이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구멍이 뚫린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으며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뿌리 없는 나무이며 십자가 없는 인생은 생수가 마른 샘과 같으며 십자가 없는 교회는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와 같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누구보다 깊은 슬픔을 당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 다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심한 슬픔을 경험하셨는지를 히브리서 5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이라는 표현은 목을 놓아 엉엉 우셨다는 말입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서부터 북받쳐 올라오면서 목을 놓아 우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목을 놓아 엉엉 우셨던 주님의 모습에서 그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슴이 터질듯한 슬픔과 함께 쉽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육체적인 고통, 심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찔림이요 상함이요 징계를 받음이요 채찍에 맞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창에 찔리고 못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상하셨고 가시관에 찢겨 상하셨고 심한 굶주림과 고문에 상하셨습니다. 죄가 없으나 우리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 죄인 되시사 고문과 심문, 그리고 억울한 재판과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징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철저히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15절을 보면 이렇게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하신 주님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여 그가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계시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겪으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986년3월21일 발행된 미국 의학협회 저널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의 고통이 어느 정도의 고통이었을까 하는 것이 발표되었습니다. 각 분야 최고 권위의 전문의들이 의학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연구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내린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죽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극심한 최고의 고통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비애와 아픔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위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부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우매한 인생들은 목자를 외면하는 양처럼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와 규례를 무시하고 제 주장과 제 판단만을 앞세우고 그릇된 길을 간 것입니다.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고 무서운 진노를 받아야 할 운명이 인간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도 없고, 만약에 감당해야 한다면 결국 영원한 죽음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서 죄 없으신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시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서는 속죄양의 개념으로 예수의 수난을 풀이합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장이 흠없는 어린양에게 백성의 죄를 씌워 죽인 후 속죄제물로 삼고 그렇게 함으로 인간의 죄를 무효화시켰습니다. 해마다 속죄양을 드림으로 한해 동안 지은 죄를 사함 받은 것입니다. 속죄양 두 마리를 끌고 오면 그 두마리의 머리에 안수를 하여 죄를 담당케 하였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아사셀 양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매년 1년에 한 차례씩 7월 10일 속죄일의 제사를 올릴 때 쓰는 염소입니다. 이 때가 되면 두 염소를 취하여 제비를 뽑되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를 뽑되,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산 염소에게는 아론 제사장이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하여 그 염소를 무인지경 광야에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소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사나운 짐승에게 잡히거나 굶어 죽는 것입니다.
완전히 피를 흘려 죽어 몸둥이는 각을 떠 제단에 올려 번제가 된 양과 아사셀에게 보냄을 받은 두 마리의 양의 의미가 바로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수난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이런 속죄양으로 희생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안산제일교회 고훈목사님의 "나의 주 당신은"이라는 시에 보면 "나를 올라가게 하시려고 당신은 내려오셨습니다. … 나를 부요케 하시려고 당신은 가난하셨습니다. … 나에게 하늘의 거처를 주시려고 당신은 집이 없으셨습니다. 나를 배부르게 하시려고 당신은 굶주렸습니다. 나를 마시게 하시려고 당신은 목마르셨습니다. … 나를 쉬게 하시려고 당신은 짐을 지셨습니다. … 나를 기쁘게 하시려고 당신은 슬프셨습니다. … 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은 죽으셨습니다. 나를 높이기 위해 당신은 살아 나셨습니다.. …". 예수님의 모든 고통은 나를 위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배고픔을 겪으신 것은 바로 나를 배부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낮은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바로 나를 영광스러운 높은 곳에 앉히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기와 관련짓고 있습니다.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상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난 후 거기 둘러서서 구경하는 군중 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못박았다. 나는 그 일에 동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와 그 십자가가 자신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바로 우리 죄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43절에서 47절까지를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잘못하면 손을 자르고 발이 잘못하면 발을 자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정도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리고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를 실감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손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 발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죄지은 손이고 죄지은 발이고 죄지은 눈이고 죄지은 심장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수없는 매를 맞으셨고 손과 발에 못을 찔리시고 심장에 창을 찔리신 것입니다.
북미 일대에서 사는 고기 가운데 크기가 1미터가 넘는 King Salmon이라는 연어가 있습니다. 연어는 매년 2월을 전후해서 알을 낳고 부화하게 됩니다. 새끼가 부화하게 되면 어미 연어는 곧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어린 새끼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미 거미의 잔등에 달라붙어서 어미의 살을 파먹고 사는 새끼 거미들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미물이지만 새끼를 위한 어미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로서 거룩한 희생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도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잔에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살이 찢기셨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귀한 사랑을 더 깨닫고 바른 믿음 안에 사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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