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젊은이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예수만이 진리입니까? 많은 종교가 있고 더 많은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독단이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옹졸하고 협소하다는 뜻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학생에게 '자네는 무엇이 전공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수학과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수학과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학생에게 '2+2=얼마지?'라고 물었습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나를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독촉하듯이,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2+2은 얼마냐고?'라고 물었습니다. 정색을 하고 묻는 목사에게 학생은 '4'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왜 하필이면 4야, 5나 6이면 안되나?'라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어리둥절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거야 간단하지. 왜냐하면 정답은 4밖에 없으니까! 마찬가질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거든. 그러니 예수만이 유일한 길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지'라고 하였습니다.
유일한 것은 언제나 유일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고 바꾸고 싶어도 유일한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 2+2=5라고 하자'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그것을 동의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애인이 '2+2=4라고 고집하지 말고 이왕에 넉넉하게 6이라고 하자'라고 말하면 그것을 그렇게 하자고 동의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정답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만이 인생이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전할 수 없고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여 오직 예수만이 인생이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외에는 어떤 길로도 인생이 바른 길을 갈 수 없고 참된 진리를 찾을 수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는 누구도 예수를 떠나서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인생답게 살기 위하여 가야할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헬라어로 길을 s라고 하며 이는 사람이나 배나 차나 비행기 등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통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길'이라는 단어 앞에는 본래 정관사가 붙어 있어서 그 길(The way)이라는 말로 유일한 길, 하나밖에 없는 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길이라기 보다는 아주 크고 분명한 길을 말할 때 특별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야말로 인생이 따라가야 할 유일한 바고 그 길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길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하신 것도 같은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자기 인생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올은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생각하고 걸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라고 하여 우리가 보기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길이 때로는 전혀 잘못된 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가야 할 유일한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민족 시인인 한용운의 시 가운데 [나의 길이]란 시가 있습니다.
[나의 길]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들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내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습니다. 의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 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시인 한용운은 두 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한용운 시인도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 님의 품에 안기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찾아야 하고 따라 가야 할 길은 여기 저기 있는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 분만이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철학자는 길은 생각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는 길은 창안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입법자는 길은 법을 정하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정치가는 길은 시간을 잘 보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애주가는 길은 마시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애연가는 길은 담배를 피우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정신의학자는 길은 대화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독재자는 길은 겁을 주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재벌은 돈으로 길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산업가는 길은 일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인은 길은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사탄은 길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만이 인생이 찾아야 하고 따라가야 할 유일한 길임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예수라는 길만이 유일한 길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그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생을 걸고 찾을 진리가 바로 예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란 말은 헬라어로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사실, 또는 진실을 의미하는 말로 진리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참 이치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로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3절에서 38절까지를 보시면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네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한 말 중 가장 빼어난 말이 바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이 질문입니다. 빌라도가 물은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빌라도의 물음은 진리에 대한 열망적인 탐구의 표시도, 오랜 탐구 후에 온 실망의 표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인에게서 특히 정치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성의한 표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여튼 그의 말은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참된 진리를 찾으려는 탐구자나 구도자의 말이 아니라 잡혀와 주위 사람들에게 조소와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인 주제에 무슨 진리를 논하고 있느냐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진리와 어떤 법칙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인간은 늙고 죽는다'등은 진리라기 보다는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인간과 하나님이 통하는 방법이요,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요, 영원히 죄 값으로 죽어 지옥 갈 사람이 천국으로 가게 되는 방법이요, 단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기회로 삼아 영원한 구원을 발견하는 방법,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영원하고 분명한, 그러면서도 유일한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발견하고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
왜 예수만이 길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예수 안에 진정한 참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말하는 헬라어 는 삶의 과정, 생명유지에 필요 불가결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부활생명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도 역시 생명의 과정, 영혼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이 "생명"이라는 단어는 본래 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생명은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없으면 재물을 모아도, 명예를 쥐어도,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많이 갖춰도, 삶은 끝없는 권태요 허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게로가 "선생님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우리가 살았을 때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죽은 후의 일을 알겠느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인생의 이치를 발견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참 생명에 대하여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제외하고 진정한 생명이나 영원의 문제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산 것이 산 것을 낳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죽은 것이 산 것을 낳지 못합니다. 무기물이 유기물을 만들지 못합니다. 절대로 무생물이 생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우주의 생명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이 장례식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접촉하면 죽은 생명도 새 생명을 일어났습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접촉하고 그냥 죽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스텐리 죤스 라고 하는 인도의 상류층을 대상으로 전도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씨크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각종 종교가 만연한 곳입니다. 그는 이런 종교가들을 대할 때에 포용력 있게 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텐리 죤스를 포용력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 때 스텐리는 말하기를 "아닙니다. 나는 가장 속 좁은 옹고집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가 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할 수는 있을지라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는 고집쟁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예수만이 인생이 따라가야 할 유일한 길이요, 진정한 진리요, 영원하고도 참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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