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례 받은 사람들 2001-12-28 16:38:37 read : 1088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 3:21-22
일시: 10/28/2001(주일 낮)
-----------------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세례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에 세례를 베푸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종교개혁 주일은 날마다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물론 종교개혁은 당시 잘못된 길로 가던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취지에서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이루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대개 "오직 은혜(恩惠)로"· "오직 믿음으로" · "오직 성경(聖經)으로"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또 말씀(성경)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다시 은혜와 믿음과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그 외에 다른 것들로는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없으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다른 어떤 요소가 은혜와 믿음과 말씀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洗禮)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이제는 죄에 죽고, 의(義)로 살겠다.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 믿음, 말씀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은 본문 이야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21절에 보면,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개천'(開天)이라고 합니다. '개천,' 즉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늘과 통(通)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交通)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 막혔던 초월적인 세계와의 관계가 이제 회복(回復)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주 하나님과의 인격적(人格的)인 교제(交際)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생긴 일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저는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받길 권하면, 어떤 때 세례 받는 걸 꺼리는 이들을 가끔 봅니다. 사실 세례란 완전해서 받는 게 아닙니다. 세례 받는 것은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결단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印)침을 받는 거룩한 예식(禮式)"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세례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시요, 동시에 구원(救援)받았음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개인에게는 물론 교회에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위로부터 내리며,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 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새롭게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신자(信者)는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여럿 나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인 후, 그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벧엘이라는 빈들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때 돌을 베개삼아 누워 자다가, 꿈을 꿉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기서 만납니다. 그는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던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하나님과 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의 삶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스데반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한 분입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할 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 죽으면서도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하고 잤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는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때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또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간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시록 3장 8절과 4장 1절에도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매일 마다 하늘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비둘기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평화, 순진, 온화, 유순을 상징합니다.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뭍이 드러났나 알아보기 위해 방주에서 비둘기를 날렸더니, 얼마 후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능력(能力)의 영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 엄청난 능력을 받아, 복음의 사도로 투신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은 위로의 영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나,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위로 받지 못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더군다나 성령은 평화(평안)의 영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의 영이 당신에게 내리실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내리면 능력 있게,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평안한 가운데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위암(胃癌)을 앓고 있는 목사님이 다녀갔습니다. 얼굴이 아주 좋았으며, 하루하루를 편안하게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극히 몸을 조심하며, 목회를 그대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암을 없애 버려야 할 적으로 보지 않고, 친구처럼 잘 사귀다가 나중에 내 보내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어떤 의사 한 사람이 간암에 걸렸었는데 그것이 폐까지 전이되었지만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지고 투병을 한 결과 지금은 건강해 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분과 잠깐 만나면서 "이 목사님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사는 분이구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계속 그런 자세로 살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심으로, 병중에서도 꿋꿋하게 살 수 있고, 나아가 치유 받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문제가 전혀 없기를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유지하고, 또 주님의 위로 가운데 능력 있게, 주신 사명을 다하며 살 수 있습니다.
3.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22절 뒷부분에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변화산상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는 소리였습니다. 수난 주간에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오늘 본문에 어떤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아들로 인정받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聖父)께서 격려하고 보장해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짧은 생애지만―평생을 사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산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늘 새 힘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들려주신 음성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마귀의 음성이 있습니다. 마귀의 음성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범죄 하게 하고, 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격려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음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찬송 292장 1절)라고 찬양하듯이,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원할 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내가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斷言)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그 유명한 믿음과 기도의 사람, 이 용도 목사님은 1930년 11월 7일 김 광우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여 죽으소서. 죽어야 되리이다. 모든 의식도 버리고 교만도 버리고 수단도 방법도 버리소서. 그리고 예수의 피로 다시 살으소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 소생! 이것은 예수의 주장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 형제여 나는 죽기를 오래 바랐으나 아직 죽지 못하였나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 편에 살아있나이다. 내가 미쳐야겠고 내가 죽어야겠나이다. 주만이 나의 힘이요, 위로요, 소망이요, 수단이요, 방법이요, 생명이외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아 이리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를 모르고 사는 것보다 주를 알고 죽기 원하나이다. 주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올시다. 이것을 모르고 삶은 저주요, 이를 알고 죽음은 곧 영생이외다."
세례란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뜻, 내 욕망이 죽을 때, 나의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신 이야기는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만 나옵니다. 다른 곳에는 그냥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셨다"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내려오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9장 14절에 보면,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10장 14절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자기 멋대로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신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계획할 때 하나님께 여쭈어 보십니까? 아니면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지식에 의존해서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십니까?
역대상 14장 14절에 보면,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라고 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다윗은 늘 물었고,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묻고 일을 처리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멋대로 했습니다. 하나님께 일일이 여쭈며 사십시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안전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삽시다. 그러기 위해서 늘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묻는, 기도생활에 힘씁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