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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아이를 소생시켜 주옵소서
    2001-12-28 16:30:47   read : 107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왕하 4:32-37; 마태 16:26

    일시: 8/5/2001(주일 낮)
    -------------------------------
    선지자(先知者) 엘리사가 수넴이라는 곳을 지나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부유한 여인이 그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여, 엘리사는 그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 여인은 옥상(屋上)에 작은 방 하나를 꾸미고 침대도 갖다놓고 책상과 의자를 갖추어서 극진히 엘리사를 모셨습니다. 어느 날 엘리사가 그 집에서 쉬고 있으면서 그 여인에게 아들이 없음을 알게 되자, 그 여인이 내년 이맘 때 쯤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처음에 그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말대로 일년 후에 수넴 여인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수넴 여인의 남편이 나이가 많았기에 도무지 불가능한 일 인줄 알았는데 아들을 얻자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있다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갑작스럽게 죽자 수넴 여인과 그 남편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수넴 여인이 한 행동이 매우 특이합니다. 그 여인은 통곡을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동네에 아들이 죽었다고 떠들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먼저, 죽은 아들을 안고 하나님의 사람이 묵던 방으로 올라가 그의 침대에 눕혀 놓았습니다. 아마 그 아이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아이이므로 지금 이 아이를 살릴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러므로 엘리사가 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에 수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 하인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달라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여기서도 문제의 해결 자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밖에 없다는 확신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수넴에서 부터 엘리사가 살고있던 갈멜 산까지는 25km(약 60리)정도의 거리였으므로 빨리 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수넴 여인은 어떻게 하던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모셔 와야 된다는 마음뿐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인에게 나귀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자기가 별 말이 없으면 계속 달려가야 한다고 합니다. 드디어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있는 산 위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때 수넴 여인은 다짜고짜로 엘리사의 다리를 부둥켜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무언가 강력한 요구를 할 때의 표시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갑작스럽게 수넴 여인이 자기 주인 엘리사의 발을 붙잡는 것을 보고 이 여인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그녀를 그대로 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인에게 무언가 아픔 아픈 일이 생겼나 보다. 여호와께서 그 일을 나에게 감추시고 알려 주시지 않으셨구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여인은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털어놓습니다. "선생님, 제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했습니까? 공연히 가슴만 부풀렸다가 낙담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때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을 안 엘리사는 자기의 시종 게하시를 대신 보내어 아이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너무나 간곡하게 엘리사가 직접 와서 해결해 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너무나 강하게 청함으로 그 여인을 따라 나서게 됩니다. 드디어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집에 도착한 후에, 엘리사는 자기가 쓰던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방 침대에 그 죽은 아이가 뉘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신앙적인 교훈을 몇 가지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영혼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이 이야기를 문자적(文字的)으로 보는 것은 현대인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죽었던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상징적으로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은 바로 우리 "영혼의 상실"(또는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서 '목숨'(life)을 '영혼'(soul)이라고 바꾸어 읽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오늘날 바로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삶의 정황(情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 많은 것을 인생에서 얻었다는 사람들 중에도 삶의 만족 없이 매일 마다 무의미하고 피곤하고 공허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영혼 상실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이것이 바로 수넴 여인이 아들을 잃어버린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가장 값진 존재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우리 영혼>이라는 등식(等式)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 또는 영성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 기독교인들(우리)도 때로는 영혼 상실의 위기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너무 지쳐서 멍하니 있다보면, "무엇을 위해 내가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맥이 탁 빠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 곧 우리 자신이 영혼 상실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아들이 죽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곧장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달려갔습니다. 60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을 살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자기 시종 게하시를 대신 수넴 여인에게 딸려 보내려고 했을 때,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엘리사가 직접 가야 된다고 간청해서 허락을 얻었습니다. 여기서도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수넴 여인의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며, 우리도 세상의 그 무엇을 다 얻는다 해도 영혼을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다시 소생하는 길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잃거나, 명예를 잃거나, 자존심을 손상 당하면 펄펄 뛰지만,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오늘날 현대인,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살피면서 영혼 상실의 위험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이 다시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기반이 되시며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때로는 세상을 향한 문(門)을 닫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혀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쓰던 방에 들어가서 엘리사가 한 행동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33절 앞부분을 봅시다.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 NEW RSV에 보면 "So he went in and closed the door."라고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기도에 대한 것을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隱密)한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여기서는 '골방'이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그냥 '네 방'(your room)이라고만 했습니다. 어찌되었건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close the door)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이나마 "세상과의 단절"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잠시나마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문을 닫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사에 너무 바쁜 현대인들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바빠서라기 보다는 세상과 단절될 까봐 "두려워서" 세상을 향한 문을 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고 시끄럽습니다. 이런저런 소리가 너무 많이 들려옵니다. 저는 요즘에 정치 얘기를 늘어놓는 게 아주 싫습니다. 신문마다 각기 여당과 야당이 갈려서 시끄러운 소리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러고 저러고 떠드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게 피곤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중에서도 그분은 자주 혼자 산으로 올라가셔서 조용히 머무르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마태 14:23). 이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바쁜 일상(日常)에서 물러 나셔서 혼자 조용히 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쉬신 것이 아니라 세상사에서 벗어나서 잠깐이나마 하나님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버리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세상으로 더 깊이 나가기 위한 잠깐 동안의 물러섬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한 행동입니다. 그는 그 죽은 아이를 살리기 전에 먼저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단 둘이 대면하고자 하는 행동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영혼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복잡한 상념(想念)에서 잠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문을 닫고"(close the door), 은밀한데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시간이야말로 즐겁고 복된 시간이며, 진정한 휴식의 시간이요, 영혼이 사는 길이 열리는,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열러있는 문을 가끔 닫아야 합니다.

    셋째로, 주 하나님께 기도(祈禱)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쓰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33절에 보면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엘리사와 죽은 아이를 가리킵니다.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헤아린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 죽은 아이가 침상에 뉘어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을 보면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는 주문(呪文)이 아닙니다. 중얼중얼 자기 소원을 비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요,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헨리 나웬은『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란 단순히 이 시대의 불붙는 이슈들에 대하여 박식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지도력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속적(永續的)이고 친밀(親密)한 관계(關係)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하며, 거기에서 바로 그들의 말과 충고와 지침들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묵상(默想) 기도(祈禱)를 통하여 사랑의 목소리를 거듭해서 듣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이슈가 주어지든지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도 그 사랑 안에서 찾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교인이 일이 잘 안되어 만사가 힘들다는 소리를 하기에,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엎드리면 길이 보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권면을 한 겁니다. 자신들이 왜 악령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혀 하나님과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이 없으면 새 생명의 역사(役事)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함으로써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기도함으로써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고, 죽었던 영혼이 소생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끝으로, 영혼이 다시 살려면 하나님의 숨결, 즉 성령(聖靈)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4절에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몸)이 차차 따뜻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자기의 입을 그 아이의 입에 댄 것은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의 눈을 아이의 눈에다 댄 것은 생명의 빛이 들어감으로써 그 눈이 뜨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의 손을 그 아이의 손에 댄 것은 그 손의 능력을 아이에게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몸이 따뜻해 졌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면 죽은 자가, 냉랭했던 자가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두 번째 다시 이런 행동을 하니까 아이가 7번 재채기를 한 다음에 아이가 눈을 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면 죽은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을 때 그것은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숨(생기)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living being)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죽으면 우리는 나무 등걸이나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존재(생령)가 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좀 이상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요한 20:22)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겁쟁이였던 베드로도 성령을 받을 때에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삶의 비전이 생기고, 없어졌던 자신감이 회복되고, 새로운 희망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신, 성령이 임하면 여러분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 61장 1-2절을 조금 변형하여 소개함으로써 말씀을 마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며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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