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 2001-12-25 19:44:12 read : 90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히 10: 19∼25
이 예배에는 가족 또는 친척이 권사에 취임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많이 참석하셨는데 그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른 교회 나가시는데 오늘 저희 교회에 오신 분들, 이름은 다르고 교파는 다르더라도 모든 교회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지체들입니다. 이 예배가 은혜가 되고 힘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 안 나오시다가 오늘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 이 예배에서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찾던 것을 찾게 되기 바랍니다.
저희가 재작년 7월에 이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작년 시월에 준공했는데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기공예배를 드렸습니다. 건축회사 책임자가 기공예배에 참석했는데 기공예배가 끝난 다음에 이 책임자가 "참 좋네요" 소리를 여러 번 했습니다. "나는 교회 의식에는 생전 처음 참석했는데 분위기도 좋고 무언가 알지 못할 감동을 받고 참 좋네요. 돼지 대가리에 절하고 공사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도 이 분처럼 감동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깊은 경건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이야기할 때 남을 비난하거나 남의 좋지 않은 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모임에서 남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심해지면 표가 나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이 목사님이 계신 자리에서는 남을 헐뜯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장점, 칭찬, 격려,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생전에 수원에 신학교를 하나 세우셨는데 그 신학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파가 탄생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이런 태도가 무언중에 그 신학교와 그 교파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교파가 총회를 할 때 가보면 조용조용 잘 진행됩니다.
이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점점 따뜻해지고 밝아집니다. 변화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주변을 평화롭게 만드는 피스 메이커(Peace Maker)들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인데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기에 힘쓰는 것은 피스 메이커가 되는 지름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제 두 주일이 지나면 새 학기가 됩니다. 학교에서는 새 학기에 학급을 새로 편성합니다. 한 선생님은 짝을 정하는데 참고하기 위해서 매년 "너희들 누구와 짝이 되고 싶은지 써내라. 한 사람이 여럿을 써내도 좋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방법은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비행기 승무원 팀을 편성할 때 그런 사람들끼리 승무원을 구성하면 사고가 적고 승객들이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사회계수(社會係數: 소시어메트리)라고 하지요.
그러면 "나는 이 애하고 짝이 되고 싶어요"하고 이름이 많이 나오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친구를 격려하기 좋아하는 학생이라는 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격려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오늘 본문에 한 번, 요엘서에 한 번, 두 번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서로 격려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을 퍽 불우하게 보냈습니다. 사울의 시기 때문에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힘이 된 것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격려였습니다. 사무엘상 20장 17절은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라고 하면 사람들과 사회의 잘못을 날카롭게 꾸짖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예언자들에게는 그런 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메시지도 많이 선포했습니다. 예언서들을 정밀하게 읽어보면 격려하는 내용이 의외로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뒷부분은 격려와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장차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 세력들은 다 멸망하고 포로생활에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며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을 제시하며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을 격려했습니다.
미가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날,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 받게 한 자들이 축복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는 의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그의 의 태양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언자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언자 정신은 고발정신이 전부인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예언자 정신에는 이렇게 격려하는 정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금은 위로하는 예언자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격려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모든 사람이 돌로 치려하는 여인을 구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격려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뒤에는 틀림없이 정결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 마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이중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다섯 남편을 거쳐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남편들이 모두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여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더운 한낮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따뜻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는 누군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것만 하더라도 반가운 일입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그 사람은 자기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와 현재를 다 알고 있습니다. 대화를 더 나눠보니까 그 사람이 자기들이 그렇게 바라고 기다리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이 여인은 변화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피해 다니던 이 여인이 이제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격려가 그 동네 사람들을 구원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달린 강도를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는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얻는 격려는 지난 한 주일 사회생활에서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교회에서 나누는 격려는 다음 한 주간 거친 세상에서의 삶을 이길 수 있는 영양소가 됩니다.
교회에는 위로부터의 격려, 주님이 주시는 격려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옆으로부터의 격려, 성도들이 서로 나는 격려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격려의 한 가운데 앉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 교회 주변에는 들고양이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올 때 고양이들이 자동차 불빛을 피해서 숨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배에서 나온 누런 고양이 세 마리가 있는데 추운 날 이 세 마리가 몸을 맞대고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보기 참 흐뭇합니다. 그리고 교훈을 얻게 됩니다. "미물들도 저렇게 서로 돕고 의지하는데…"
고슴도치는 피부에 가시가 많이 있어서 서로를 찌릅니다. 모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추어도 서로 떨어져서 덜덜 떠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고슴도치들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서로 격려하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이웃돕기 운동을 늘 하는데 물질을 주는 것이 돕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격려가 더 큰 도움이 됩니다.
트루게네프라는 철학가가 어느 겨울날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돈을 주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트루게네프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그 걸인의 더럽고 터진 손을 잡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걸인은 밝은 얼굴로 아니라고 선생님은 오늘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도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사느라고 지쳐있는 사람에게 격려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약한 형제에게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합니다.
슬픔, 곤궁, 질병, 실업, 그 밖의 어려운 일을 만난 사람들, 진학문제가 뜻대로 안 된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위로와 격려의 말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기대하고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사람에게 아주 훌륭한 밧줄이 됩니다.
어려움을 만난 사람을 위로하면 어려움을 만나기 이전보다 더 훌륭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혈을 하면 피가 필요할 때 우리도 도움을 받게 되는데 격려할 줄 아는 사람, 평소에 남을 잘 격려하는 사람이, 필요할 때 격려를 받습니다. 격려는 격려를 확대재생산합니다.
어느 기독교 대학의 야구 선수 하나가 슬럼프에 오래 빠져 있었습니다. 야구팀이 중요한 경기에 출전하게 되어 교목이 선수들을 앞에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선수는 기도가 끝난 다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교목은 그 선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는 자네의 팬일세. 나뿐만 아니라 내 아내도 자네의 팬이고 우리 딸도 자네 팬일세. 우리 가족은 오늘 자네의 경기를 지켜보며 자네를 응원할 걸세"라고 격려했습니다.
이 선수는 그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습니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 이 선수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의 격려 덕분에 제가 힘을 얻어 연타석 홈런을 날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페터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교목은 축하한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네가 알지 모르겠네만 나는 30년 전에 이 학교 사학과의 학생이었다네. 그런데 공부하기 싫어서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냈지. 성적은 떨어지고 학생들과 교수들에게는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지. 그런데 하루를 지도교수가 이런 말을 하더군. '나는 자네의 형편도 잘 모르고 자네의 학업태도가 왜 그렇게 부진한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기 바라네. 자네는 우연히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일세. 다시 말해 하나님이 자네를 이 곳에 인도하셨고 자네를 계속해서 보살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나는 이 격려에 힘입어 학업을 잘 마칠 수 있었고 이렇게 모교의 교목이 되어 후배들을 보살피고 있다네. 지도교수의 한 마디 격려가 오늘 나를 있게 하는 큰 힘이 되었고 격려하기에 힘쓰는 사람을 만들었지"
이 야구 선수도 감화를 받아 격려하기에 힘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의 일인데 이스라엘의 중요 인사 한 분이 저희 교회 주일 저녁 예배 와서 이스라엘의 교육법에 대해 강연한 일이 있습니다. 대사였는지 사업가였는지 그 분의 직함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분의 강연 내용 가운데 이것은 지금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가 담임교사가 부모들에게 보내는 통지표에 학생들을 격려하는 말을 쓰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이 아이는 이 것밖에 하지 못합니다" 하지 않고 "이 아이는 여기까지 잘 합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여기까지 할 수 있겠습니다", 마땅히 백까지 세어야 할 학년의 어린이가 백까지 세지 못하면 "이 아이는 2학년이 되었는데도 백 단위 숫자를 모릅니다" 이렇게 쓰지 않고 "이 아이는 십 단위 숫자를 잘 셉니다. 조금만 더 힘쓰면 백 단위까지 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적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단일 민족으로는 노벨 상 수상자를 제일 많이 배출한 우수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24절의 말씀 그대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격려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야 됩니다.「표준 새번역 성경」은 24절의 "서로 돌아보아"를 "서로 마음을 써서"라고 번역했습니다. 24절이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격려하려면 마음을 써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격려할 수 있을까?'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격려는 어떤 것일까?' '저 사람에게 가장 효과적인 격려의 말은 어떤 것일까?' 마음을 써야합니다.
신년축복심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제로 1교구와 3교구 신년 축복대심방이 끝나고 다음 주일부터 2교구와 4교구 심방에 들어가는데 심방 가기 전에는 '이 가정에 필요한 격려는 무엇인가?' 면밀하게 살피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써야 좋은 격려를 할 수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아는 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에 대해서 잘 아시지요?" "예, 조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중요한 일로 그 분과 만나야 하는데 참고가 되도록 그 분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해 주세요" 그래서 아는 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언론기관과 수사기관에서는 사람들의 단점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요. 그분이 "목사님, 그런 것도 참고가 되지만 그 사람의 장점, 칭찬할 점, 이런 것을 좀 알려 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격려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했습니다.
저는 그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성공적인 만남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사람을 만나면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취임하는 권사님들, 격려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교회 직분 이름을 누가 집사, 권사로 정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이 참 재미있습니다. 집사는 봉사하는 직분인데 집사- 일을 집는다, 일을 잡는다, 일을 집행하는 사람,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면 권사(勸士)는 어떻게 됩니까? 권하는 사람, 격려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권하는 것은 곧 격려를 말합니다. 권사는 격려의 모범을 보여야합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권사로서 모범을 보인 사람은 잘 아시는 대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 자체가 권위자(勸慰子), 권고와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회심을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울을 믿지 않았습니다. 겁을 냈습니다. "이 녀석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거야?" 했습니다. 바울이 왕따를 당했습니다.
바울이 아마도 의기소침해졌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을 격려하고 제자들과 교제를 주선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당했습니다. 성도들이 여러 곳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안디옥으로 피난간 성도들이 거기에서 모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사람들을 잘 권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3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박해에 쫓겨 피난 온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고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권고에 힘입어 믿음 안에 함께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바나바의 격려와 권고가 안디옥 교회의 두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고하고 있고 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랑으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선행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도록 서로 격려해야합니다. 감자나 고구마도 조금 손질해 주면 더 탐스러워진다고 합니다. 격려가 손질이 되어 탐스러운 열매를 맺도록 해야 됩니다.
특별히 잘 모이도록 권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에도 "모일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매스컴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교회에 갈 필요 없다. 집에서 기독교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예배보면 그만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모여야 믿음이 자라고 모여야 힘도 생깁니다. 부뚜막의 소금은 집어넣어야 짜고 교회는 모여야 일이 됩니다. 모이는 것은 교회의 기본입니다.
「공동번역」성경은 2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이렇게 모이는 일에 악센트를 두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이미 백 여 명의 권사님이 계시고 오늘 스물한 분이 더 취임하는데 이 분들이 권사의 소임을 잘 감당할 때 저희 교회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에 힘쓰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22절에서는 믿음, 23절에서는 소망, 24절에는 사랑을 말하고 그리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될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에 힘쓰는 목양교회가 되고 이 일에 앞장서는 권사님들, 특별히 신천권사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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