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 2001-12-25 19:38:52 read : 81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고후 6: 1∼2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대단히 모순된 말입니다.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그 자신도 목수의 고달픈 삶을 살았고,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고 젊은 나이에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어떻게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실패했다"해야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모순으로 여겨지는 말들을 한 분들이 많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죽을 때 당당한 유언을 남깁니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신32: 2),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무슨 남길 교훈이 있겠습니까? "너희는 나처럼 되지 말아라"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긴 교훈을 남기고 후손들을 하나하나 축복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처형될 날을 기다리면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딤후4: 7). 바울은 로마에 와서 전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전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극히 제한된 전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중요한 인물들이 바깥으로 보기에는 초라하고 고생이 많았고 불행해 보이는 시간들을 보내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했으면서도 끝에 가서는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아쉬움이 없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성공했다" "나는 이겼다"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여기서 "이겼다" "성공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기고 성공한 것을 말합니다.
내 생애의 끝에 가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2000년의 제일 끝 날인 오늘, 2000년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설교 제목처럼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2000년의 하루 하루는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
올해 좋은 일이 있었던 분들은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 그저 평범했거나 다른 해보다 못했다하더라도,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영적인 시간들이었습니다"라는 뜻과 "좋은 날들이었습니다"이라는 뜻입니다.
2000년이 왜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왜 좋은 시간들, 복된 시간들이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첫째, 믿음 안에서 보낸 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84편 10절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하루는 믿지 않고 산 천 날보다 좋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초가삼간에서 사는 것이 믿음 없이 호화주택에서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감옥 안에 있는 것이 믿음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을 가지고 죽은 것이 믿음 없이 장수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을 믿음 안에서 보냈습니다. 2000년이 시작되는 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출발했고 2000년의 끝날 이와 같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밤에는 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2000년을 믿음으로 시작했고 믿음으로 끝냅니다.
풍성한 믿음 가운데서 보낸 분들도 있고 조금 빈약한 믿음 가운데서 보낸 분들도 있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했었지만 여하튼 믿음 안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 됩니다. 좋은 시간들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 안에서 보낸 이 한 가지를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실패로 보이는 일에도 유익과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6·25 때 국군이 압록강까지 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양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있던 분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수많은 피난민들 틈에 끼어 남으로 내려옵니다. 중화(中和)라는 곳에 와서 다리에 병이 났습니다. 꼼짝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뒤에 쳐졌습니다. 주인이 피난 간 빈집에 들어가서 누웠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무사하게 남으로 내려가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나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이렇게 뒤에 쳐져야 하는가? 아파도 다른 곳이 아프지 않고 피난길에 제일 중요한 다리가 아플 것은 무엇인가? 공산당에게 잡히면 제일 먼저 처형 당할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이것이 공산정권 밑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일을 한 것에 대한 보답인가? ", 이 전도사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한 편으로는 밤새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의사도 없었고 약도 없는 형편이어서 기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다리 아픈 것이 씻은 듯이 낳았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일어나 피난길을 재촉했습니다. 얼마 더 남으로 내려오니까 길옆에 총에 맞은 시체들이 수십 구 늘어서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어제 같이 피난 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난민 일행이 남으로 내려오다가 인민군 군수창고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 안에 군복 외투가 많이 있었답니다. 추운 겨울이니까 너도나도 외투 하나씩을 꺼내 입고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미군 정찰기가 이것을 보고 인민군이 남하하는 것으로 알고 기지에 연락을 했습니다. "아무개 지점에 인민군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 금방 전투기들이 출격해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사님은 얼마동안 꼼짝 하지 못하고 그 시신들을 바라보면서 어제 하나님을 원망하던 일을 회개하고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어디 있는가 깊이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월남한 이 목사님은 이 일을 늘 생각하면서 목회에 힘써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장로교 증경 총회장이며 노량진교회 원로목사님이신 림인식(林寅植)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3년 전에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온 이학철 성도와 천정순 성도가 저희 교회에 출석하면서 2년 전에 세례를 받고 올해 당회와 구역회에서 집사로 선출되어 어제 밤에 교육을 받고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이 분들의 아버지인 이용운 집사님이(저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한 일이 있습니다) 50여 년 전 북한에 있을 때 이 목사님이 전도사로 계시던 평양 창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성화신학교에 다녔습니다.
남들은 다 급하게 앞으로 나가는데 혼자 뒤에 쳐졌습니다.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꼈겠습니까?
입시에서 합격하지 못했을 때, 취직시험에서 여러 번 실패했을 때, 진급에서 누락했을 때, 구조조정에 해당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이런 감정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는 그 안에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풍성하게 있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 편으로 보면 성공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모세, 바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지난 한 해 어려운 일들이 있었습니까?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한 해였습니까? "올해는 실패의 삶을 살았다"라고 해야 되는 형편입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인도와 예비하심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하실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최흥종(崔興琮)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순검(巡檢), 지금 말로는 경찰관이었는데 어느 날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이 길에 쓰러진 나환자 여인을 끌어안아 자기의 나귀에 태우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당시에는 나환자를 끌어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오웬(C. C. Owen 한국 이름 吳基元)목사인데 호남지방에서 오래되고 큰 교회들은 대부분 이 분이 개척 설립한 교회들입니다. 광주 서원대학 강당이 이 분의 기념관입니다.
나환자 여인이 의지하던 피고름 묻은 지팡이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최흥종을 보고 그 지팡이를 좀 집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최흥종은 머뭇거렸지만 외국인이 동포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는데 지팡이를 집어주지 않을 수 없어서 지팡이를 집어줍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 분은 변화되어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 넘어 목사 되어 목회, 사회사업, 교육사업, 나환자 구제사업, 시베리아 선교 등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특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자기의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했습니다. 다섯 가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집안 일을 버리고 사회를 버리고 경제를 버리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종교적인 얽매임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런 삶에 반발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버린 다섯 가지를 도로 갖겠다"고 하면서 자기의 호를 오취(五取)라고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아들이 반발하는 삶, 실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나중에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나 역시 아버지처럼 역시 버리겠습니다"는 뜻으로 자기 호를 우방(又放)이라고 바꿉니다.
믿음을 버리면 실패가 됩니다. 그 밖의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한 때의 실패가 긴 안목으로 보면 성공입니다.
올해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많더라도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하실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 안에서의 시간에는 무익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폐품을 만들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을 구입했을 때 종종 불량품이 있어서 항의도 하고 교환도 요청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품에는 불량품이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들입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보낸 시간 가운데 무익한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보낸 시간들이 무익한 시간들입니다. 2000년의 모든 시간 역시 유익한 시간들이었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하실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결정하신 대로 진행됩니다.
올해의 모든 시간들이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지난날들을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축복을 주십니다.
첫 번째 축복은 오늘과 내일을 더욱 은혜스러운 때, 구원의 날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환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모세, 바울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성서 인물을 소개합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나이 많아져서 체포당합니다. 밧모섬으로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합니다. 아마도 채석장에서 일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 석방될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석방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 사형을 당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의 시간도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로 여기면서 살았음이 틀림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특별히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오늘을 은혜의 때 구원의 날, 좋은 날, 복된 날로 고백하며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주십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한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서 첫 부분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 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1: 3∼4),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 12∼14) 사면이 벽으로 막힌 감옥 안에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앞을 보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위를 볼 수 있었습니다.
366일 전, 2000년이 시작되었을 때 목양교회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을 중심성구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이제 이 해가 끝나는 날 우리는 "올해는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라고 말해야합니다.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직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고 공감하기 어렵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며 2000년이 그런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옆 사람을 보고 그렇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 2001년을 더욱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주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앞을 보고 위를 보게 해 주십니다.
바울 사도 이전 2,700년 전쯤에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사49: 8)라고 예언합니다.
사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예언이 이뤄졌다고 선언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우리들은 이 예언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루하루를 영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영이 나날이 새로워져야합니다. 하루하루를 좋은 날, 복된 날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2000년이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이었다고 고백하는 가운데 더 큰 은혜의 때 구원의 날들을 선물로 받고 앞을 보고 위를 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을 보며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고 또한 부족한 종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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