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리며 경배할 지어다 2001-12-25 17:21:32 read : 105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편 29편 1-2절)
<목회기도>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부족한 저희들이 오늘, 이 땅의 주인공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일인 오늘 교회에서 예배 드릴 믿음과 건강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부끄러웠던 모습
감출 수 없는 죄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그동안 무더위, 장마, 휴가 등을 핑계로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못했던 예배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주일성수를 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게 하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무더위에도 교회에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에서
이름 없이 빛 없이 봉사하고 땀흘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군대에, 외국에, 병상에 누워있음으로
이 귀한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군에 있든지, 외국에 있든지, 병상에 누워있든지
저들이 예배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가 받는 은혜와 평강의 복도 함께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귀한 시간,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여 주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지난 7일이 입추였고, 15일이 말복이었습니다. 이젠 우리나라 절기로 가을에 들어섰습니다. 가을의 더위는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는 데 좋은 것입니다. 이 가을에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더위를 오히려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예배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를 유형별로 구분한 것이 있어 소개합니다.
1. 설교시간에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멀대파"(눈은 목사님, 생각은 멀리 출장 중)
2.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
3. 졸면서 끄덕끄덕 콤마를 찍는 엉터리 "아멘파"
4.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안절부절파"
5.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파"
6.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붕어파"
7. 기도시간의 틈을 노려 묵상(?)에 잠기는 "기회주의파"
(어휴, 어제 못 잔 잠 보충해야지)
8.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며 인원 체크하는 "경비파"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속하십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요4:24)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29편 1-2절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합당한 예배를 드릴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권능있는 자들
1절에 나오는 "권능있는 자들"은 특별한 권세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학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합니다.
혹자는 천사를 가르친 것이라 하고
혹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경건한 성도라 합니다.
"권능있는 자들"은 쉽게 표현하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정하고
•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와 존재하는 자신에 대해 감사하며
•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맡기셨든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합당한 영광을
본문 시편 29편 2절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는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고, 우리는 피조물로 제한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미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본문 시편 29편 2절에 여호와께 경배하는 자는 "거룩한 옷을 입고"하라고 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씀은 [구별되었다]는 뜻이 있으며
• 구약의 개념으로는 '공경하다'(레19:30, 26:2)
• 신약의 개념으로는 '온유와 두려움', '경건함과 기쁨'의 뜻이 있습니다(엡5:21, 벧전3:15)
그러므로 2절에서 말하는 "거룩한 옷"은 특별히 제작된 어떤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할 때, 하나님께 예배할 때 갖추어야 할 성도들의 "심령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자로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드리는 사람 중심"이 아닙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자리가 어떻다, 분위기가 왜 이러느냐, 에어컨이 나온다, 안나온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중심으로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는 예배로서의 거룩함인 "구별됨"이 있어야 하며 예배로서의 엄숙한 "형식"(form)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형식에 얽매인 형식주의(formalism)나 형식주의자(formalist)가 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외식(위선)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미워하시고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만남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의 거룩한 만남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시29:2), 예배자 자신을 드리는 행위입니다(요4:23-24).
구약에서 '예배'를 지칭하는 "제사"(sacrifice)라는 말에는 '희생'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 죽여 제물로 사용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에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했듯이 오늘의 우리 예배에도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최초의 예배자 가인과 아벨이 나옵니다. 아벨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는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했습니다(히11:4).
가인과 아벨은 똑같은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는 받으셨고, 한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도 어떤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둥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주일을 지켜도, 예배 한번을 드려도 보다 더 나은 것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정성이 담긴 예배
•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 주일 성수를 위해 1년 계획을 세울 때부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 달력을 받으면 휴일을 먼저 확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휴가 계획을 세워도 주일 지킬 것과 예배드릴 것을 먼저 생각하고 계획해야 합니다.
- 예배 드리는 시간, 주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토요일 오후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토요일 밤늦게까지 TV보고, 비디오까지 밤새 보고 주일날 겨우 몸 일으켜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평상시에 주일을 준비하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늦는 것은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배'(禮拜)는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사람들 가운데 예배가 아닌 '배'(拜), 즉 '절'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예를 갖추어 하는 절(예배)입니까? 아니면 그냥 절(배)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기둥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예배 드리러 교회에 오는 사람은 단정하게 와야 합니다. 새 옷을 입고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깨끗하고 단정한 복장이어야 합니다.
지난 화요일에 우리 집 아이들이 서해 바닷가에 가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오는 길에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커피를 마시려고 어디가 좋을까 찾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 호텔이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커피를 마시려고 호텔에 가는 일이 좀체로 없었지만 모처럼 분위기좀 내보자는 생각으로 호텔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유는 다른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옷차림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슬리퍼를 신었고, 동행한 사람 중에 반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옷차림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친 노출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어지럽게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터어키에서 이슬람 사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원에 들어갔지만, 같이 간 일행 중의 목사님 한 분이 입구에서 들어 오지 못하고 붙잡혔습니다. 그 목사님은 여행 중이라 반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복장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안내원이 하늘색 천(보자기)을 주면서 그것을 둘러 입고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지켜 보면서 '우리 기둥교회에서도 보자기를 만들어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성도들에게 입혀 예배 드리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커피숍에 가려 해도 경망스러운 복장으로는 못 들어가고, 이방종교인 이슬람 사원에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귀신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도 목욕을 하고, 옷을 가지런히 입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기도하는데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중심이 어떤지에 따라 외모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호화스런 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정하게 예를 갖춘 예배자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에는 최소한의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최대한의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단정함과 준비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 예의도 없는 것입니다.
희생이 있는 예배
보다 더 나은 주일성수와 예배를 위해
•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 시간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 중에 가장 큰 희생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다"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꼭 지키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정한 예배시간을 지킴으로 얻는 손해나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00년 8월에 암스테르담(Amsterdam)에 갔을 때 만난 60~70년대의 세계적 가수인 클리프 리챠드(Cliff Richard)의 간증 가운데, 자기가 "예수를 믿고 나니 어려운 점이 두가지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포기"(give up)해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일도 예수 믿고 나니 '하지 말아야' 하고, '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priority)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자기 에게 유익한 것이 먼저였는데, 예수 믿고 나니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선이고, 예배드리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팝가수가 예수를 영접한 이후 예수 믿음으로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예수 믿음으로 지켜야 할 우선순위를 지켰다고 고백했는데,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어떤 것을 포기하셨습니까? 예수 믿음으로 우선순위가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희생 중에 물질의 희생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대로, 어려운 사람은 어려운 대로 자신의 형편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고, 정성을 다한 감사의 예물을 하늘에 쌓는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주변인들도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예배드림으로, 주일 성수함으로 가족들이 나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못가고, 나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와 친척들이 나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 비판을 감수해야 합니다.
희생 중에 견디기 어려운 희생이 비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려면 주변 사람들이 비판합니다. "야, 웃기지마, 너만 예수 믿냐?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비판으로 인해 거절을 당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가야 돼. 제껴 놓지 뭐."라는 말도 듣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거절당해 보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보았던 루오의 판화 제목을 늘 머릿속에 기억하며 삽니다.
[향나무는 치는 도끼 날에도 향을 묻힌다]
예수 믿는 우리는 우리를 향해 비판하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어야 합니다.
- 무엇보다도 자기가 자신을 비판 하는 것을 견디기가 힘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 "내가 뭔데, 꼭 이렇게 예수 믿어야 하나?"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왜 나만 이렇게 해야 하나,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데..."하는 타협의 마음, 비교의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을 예수 이름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흔적이 있는 예배
보다 더 나은 주일성수와 예배를 위해
• 정성을 다하고 희생을 각오하며 살다 보면 그로 인한 흔적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가진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 믿음으로 받은 상처가 있습니까?
예수 믿음으로 겪은 손해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받은 상처와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란 종이나 가축에게 찍는 낙인처럼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핍박들(참고, 고전4:11, 고후4:10-11, 6:5, 9, 11:24-25)로 말미암은 그의 몸의 상처들을 언급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그가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자기가 갈 곳에 다 가고 시간이 남아 여유 있을 때 주일 지키고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기둥교회에는 35명의 장로님과 334명의 권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둥교회에서 대예배실에서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인 주일낮예배, 주일밤예배, 수요일예배에 장로, 권사 중에 이런 저런 사정을 가진 분들을 제외하고는 최소한 200명 정도는 참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일밤예배를 드리지 않는 권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본이 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들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예배 드리는 시간] 보다 더 귀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모이는 모임 중에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이는 모임]보다 더 귀한 모임은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지대(광야)를 지나며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동안 어느 곳에 머물든지 먼저 성막을 치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각 지파별로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천막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 놓았던 "이동식 예배처소"였습니다. 이것은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배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집을 사고 방을 얻을 때도 교회 나가기가 어렵지 않은 지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둥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리는지 아닌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와 받지 않은 예배로 인해 가인과 아벨의 후손들의 삶이 엄청나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생활속의 예배
그러나 예배는 교회라는 건물 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삶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미국의 저술가이며 강연가인 '지그 지글러'(Zig Ziglar)가 가정예배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지글러가 자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6척 장군 골리앗이 있었단다. 그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전쟁하자고 외쳤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무서워 나무 뒤에, 숲 속에, 굴속에 숨었단다. 이스라엘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고 있을 때 17살밖에 안되어 솜털밖에 안 나서 면도칼도 필요 없는 소년 다윗이 용감하게 싸우러 나갔단다."
여기까지 설교가 이어졌을 때 아들이 설교를 갑자기 중단시키며 말했습니다.
"아빠! 다윗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용감하네요."
지글러는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얘야! 다윗이 용감하지 어째서 골리앗이 용감하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소년 다윗은 아무리 조그마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나가서 싸우는 것이 당연하지만 골리앗은 아무리 커도 하나님도 함께 하지 않는데 자기만 믿고 싸우는 것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살면서 어떤 종류의 용기를 가지고 사십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용기로 사십니까? 아니면 내 멋대로, 의지대로, 힘과 경험, 지식을 가지고 사는 용기를 가지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용기를 가지고 사십니까?
누가 예배 드립니까?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이 드립니다(히11:6). 그렇다면 생활속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 바로 거기가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 됩니다(고전3:16, 엡2:22). 그래서 찬송가 456장에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가 447장 "오 신실 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고백하며 사십시오.
오 신실하신 주 ♬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 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중심에 뫼신 주와 같이 길 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내 속에 언제나 함께 계시며
생활 속에 예배하며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의 삶,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주일 성수의 삶이 되어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
찬양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이기를 원하며
기둥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 교회에 찾아 나오며
생활속에서 땀흘려 애써 모은 물질 가운데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일천번제예물
가지 가지 제목을 적어 정성껏 예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구별하여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2001년 8월 19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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