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명 세례 논산훈련소 새 예배당 착공예배 / 교회 불량배 솎아내야 건강한 성전된다 2015-04-17 11:16:44 read : 224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年 7만명 세례 논산훈련소 새 예배당 30일 착공예배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이사장 곽선희 목사)와 민·군 공동 건축위원회(위원장 김진영 장로)는 14일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연무대교회 새 예배당 신축부지에서 오는 30일 건축 착공예배를 드린다”고 밝혔다. 2012년 10월 기공예배를 드린 지 2년 6개월 만이다.
군선교연합회는 “23일까지 시공사를 선정하고 30일 오후 2시 착공예배를 드린 뒤 본격적인 건축에 들어가 내년 추수감사절을 전후해 완공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새 예배당이 완공되면 현재 좌석이 2500석에서 5000석으로 늘어난다. 3층 규모로 예배당 선교관 목회실 행정사무실 식당 등 각종 시설이 갖춰진다.
연무대교회의 새 예배당 건축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름에 따라 건축 후원금 모금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건축비 약 130억원은 군선교연합회와 군목 파송 교단, 군선교 회원 등 모두 후원으로 마련된다. 군선교연합회측은 건축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날 착공예배와 함께 ‘연무대교회 새 예배당 건축후원회’를 발족할 계획이다.
군선교연합회를 비롯해 한국교회연합 건축위원회, 군종목사 파송 11개 교단, 민·관 공동건축위원회, 한국군종목사단, 육군군종목사단, 한국기독교군인연합회(KMCF), 한국예비역기독군인회연합회(KVMCF), 국군장로연합회 등이 연무대교회 건립에 참여하고 있다.
착공예배를 앞두고 기도 열기도 뜨겁다. 연무대교회는 지난달 16일부터 착공예배가 열리는 30일까지를 특별새벽기도 기간으로 정하고 군 선교를 위해 합심 기도했다. 또 이 기간에 40개 조각으로 된 연무대교회 조감도 퍼즐을 마련해 하루에 한 개씩 퍼즐을 맞춰나가며 새 예배당 건축 의지를 다지고 있다.
1987년 지어진 연무대교회 예배당은 협소한 환경조건과 노후화로 주일예배를 3부로 나눠 드리고 예배시간마저 빠듯해 참석하는 장병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이에 군목 파송 11개 교단과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는 2010년 1월 22일 교단장협의회 모임에서 연무대교회의 상황을 보고받고 ‘한국교회 군종목사 파송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새 예배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김종천 연무대교회 목사는 “한 해 12만~13만명이 훈련받는 육군훈련소에서는 6만~7만명이 세례를 받고 있다”며 “새 예배당이 아름답게 건축되면 보다 많은 장병들이 연무대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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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믿음으로 전진할 때 반드시 부흥”…
이영훈 목사, 中서 2년여 만에 주일 설교
베이징서 가장 오래된 충원먼교회서 복음 전파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가 12일 중국 베이징의 충원먼 교회 주일 예배에서 ‘십자가 신앙’을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다. 순복음가족신문 제공
“중국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으로 전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는 12일 중국 베이징 시내에 있는 충원먼(崇文門) 교회(리우추이민 목사) 주일 예배에서 설교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가 중국 교회에서 주일설교를 맡은 건 2013년 1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종교비자를 받아 중국 최대교회인 저장성 항저우 충이탕(崇一堂) 교회에서 설교한 이후 2년여 만이다.
이 목사는 이날 현지에서 2차례 오전 예배에 이어 오후 한국어 예배까지 모두 3차례 말씀을 전했다. 오전 예배 설교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2·3부 예배 설교시간에 맞춰 녹화 중계됐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할렐루야∼.”
‘십자가 신앙’(갈 2:20)을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이 목사는 평소 성도들에게 전하는 익숙한 인사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예수님이 없는 ‘옛사람’에게는 죄와 절망밖에 없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충만함으로 죄를 다스릴 때 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이어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때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교회 성도들은 통역을 통해 이 목사의 메시지가 한 문장 한 문장 전달될 때마다 “아멘” 하고 화답했다.
이 목사가 설교한 충원먼 교회는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1870년 미국 남감리교 출신인 에즈버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됐으나 1900년 반외세를 표방한 의화단운동 때 불에 탔다. 1904년 재건됐으며 800석 규모의 본당과 400석 규모의 반지하 예배당으로 나눠져 있다.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부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2차례 설교한 유서 깊은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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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본 후 믿음을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신은 죽지 않았다’ 오늘 전국 상영관 개봉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결 참신앙 성찰케하는 계기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 스틸. 에스와이코마드 제공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대결을 담은 미 할리우드 영화 ‘신은 죽지 않았다’가 16일 전국 상영관에서 개봉한다. 미국 한 크리스천 대학생이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쓰라는 교수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의리’의 영화배우 김보성은 14일 저녁 서울 왕십리 CGV에서 진행된 시사회 참석 후 “크리스천인 나는 믿음을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신앙에 회의를 갖는 이들이 본다면 믿음을 얻을 것 같다.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일 유익한 영화”라고 말했다.
영화는 유신론자나 무신론자가 갈라서는 지점, ‘우주는 어떻게 창조됐는가’ ‘왜 악이 존재하는가’ ‘윤리의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한 이견도 다룬다. 신앙 유무에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대다수 기독교 영화가 성경 속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데 비해 ‘현재 우리가 있는 곳(Now and Here)’을 다뤘다는 호평도 있었다. 팝아티스트이자 방송인인 낸시랭은 “주인공은 교수의 명제를 거부함으로써 로스쿨에 못갈 수도 있었다. 구약의 모세나 요셉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한 점이 크게 와 닿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크리스천에게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홍현국(47·묵향교회) 장로는 “우리가 일상에서는 기계적인 신앙생활을 많이 하지 않나. 평일에는 직장 가고 주일에는 교회 가고. 하나님이 마치 나에게 ‘너는 누구를 증명하며 살고 있느냐’를 묻는 것같이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홍 장로는 “영화를 주변에 추천하고 싶다. 우리 신앙을 돌아보고 정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영민(35·높은뜻정의교회)씨는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잊고 있는 진리를 되새겼다”고 했다.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최성수 목사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 복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기독교적 영화이지만 ‘인격적인 유신론자와 괴팍한 무신론자’라는 캐릭터 설정은 보는 이에게 불편감을 준다”고 평가했다. 113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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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신천지 관련해서 색깔빼기 나서
천지일보가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과의 관련성을 부인하며 ‘색깔빼기’에 나섰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씨가 천지일보는 신천지 신문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동영상을 단독 입수했다’는 국민일보 보도(본보 4월 10일자 29면 참조) 이후 취하고 있는 조치다.
천지일보 이상면 대표는 ‘천지일보는 신천지 신문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사고(社告)를 지난 14일 게재하고 “천지일보 대표이사가 신천지 교인인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출자한 천지일보가 신천지 신문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천지일보는 신천지가 아닌 뜻있는 개인 4명이 출자해 창간한 전국종합일간지”라면서 “국민일보 보도는 독자들에게 천지일보에 대한 왜곡된 사실을 인식시켜 천지일보 경영에 타격을 입히려는 악의적 보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천지일보는 국민일보 보도 이후 메인화면에서 신천지 관련 기사 검색을 차단하는 이율배반적 결정을 내렸다. 지난 12일까지만 해도 천지일보의 온라인 신문인 ‘뉴스천지’ 메인화면에서 ‘신천지’로 검색하면 1808건의 기사가 검색됐지만 16일 오후 현재 35건의 기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만희씨와 관련된 기사도 936건에서 273건으로 줄었다.
실제로 이 대표의 칼럼 ‘이만희 신천지 총회장의 아프리카 순방이 갖는 의미’ ‘신천지, 이 시대 모든 나라와 교회가 본받아야 할 곳’ 등 신천지를 적극 두둔했던 기사는 모두 메인화면 검색창에선 검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지 마태지파 섭외부장 출신인 최모 천지일보 상무는 “우리는 홈페이지에 손대지 않았다. 언론사로서 그런 야비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만 늘어놓고 있다.
천지일보 구성원의 종교성향을 보더라도 ‘신천지 신문이 절대 아니다’라는 이 대표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천지일보는 대표이사-사장-상무-논설위원실, 편집국, 디지털미디어국, 광고국, 경영지원국 체제로 돼 있다.
최 상무는 지난 13일 국민일보를 찾아와 “신천지에서 천지일보에 10원짜리 동전 한 푼 지원하지 않았다”면서 “천지일보 이 대표가 신천지 신도이고 천지일보 직원 중 3분의 2가 신천지 신도이다. 그렇다고 신천지 신문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의 글과 최 상무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천지일보의 대표이사(사장), 상무 등 핵심간부와 직원 대다수는 신천지 신도다.
신천지 탈퇴자인 조민수씨는 “천지일보가 신천지의 위장 신문사이지만 이 대표는 이런 사실을 지적했던 나를 오히려 명예훼손, 업무방해로 수사기관에 고소했다”면서 “모두 불기소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이 대표를 창원지검 마산지청에 무고로 고소했다. 조만간 천지일보의 정체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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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따라 기독교인 되는 시대는 끝났다”
애틀랜타연합교회, ‘2세를 향한 교육 비전’ 주제로 G2G 콘퍼런스
▲G2G 교육 콘퍼런스 강사들.
애틀란타연합장로교회(담임 정인수 목사)는 10~12일(이하 현지시각) ‘2세를 향한 교육 비전’을 주제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강사로 나선 이학준 박사는 G2G교육연구소(Generation to Generation Christian Education Center, 이하 G2G) 소장이자 풀러신학교 기독교윤리학과 학과장이며, 박길재 박사는 G2G 상임총무로 사역하고 있다.
G2G는 ‘세대에서 세대로’라는 뜻으로, 이민가정의 부모와 자식 간 문화적 차이를 줄이고, 이민 2세 자녀들의 정체성 교육에 관심을 갖고 신앙을 물려주자는 취지로 2007년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이학준 박사는 컨퍼런스에서 “이민교회에서 2세 교육은 아직 변두리다.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 후세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보다 ‘교육 프로그램이 좋아야 부모(교인)가 온다’는 생각에 2세 교육에 대한 비전도 열정도 없다”고 지적한 뒤, “부모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자녀도 당연히 기독교인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한인교회를 잘 다니던 아이들 가운데 대학에 들어가면 술·마약에 빠지는 등 믿지 않는 아이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젊은이들이 ‘진짜 기독교인으로 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고민하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이어 “지금까지 한인교회는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행동’은 많이 강조해 왔지만, ‘왜 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 1세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 경험을 해석해 주는 신학과 이야기 없이 행동만 요구하다 보니 2세들이 다 떠나는 것”이라며 “한인교회들마다 2세 사역자 부족 현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교회 내에 1.5세와 2세 청년들을 훈련시켜 장기적으로 평신도 2세 사역자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학준 박사는 프린스턴신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드류대학교와 NYTS 등에서 강의했으며, 1998년부터 13년간 뉴브런스윅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지도하여 동양인 최초 종신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는 풀러신학교 기독교윤리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특별히 11일(토)에는 20년 이상 청소년·청년 사역 경험이 있는 케빈 박 교수(PCUSA 본부 신학과 예배국, 전 프린스턴신학교 아시안 아메리칸 프로그램 부디렉터, 전 뉴브런스윅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박길재 박사가 강사로 나선 교사 콘퍼런스가 진행됐다.
케빈 박 교수는 “한인 청소년들에게 ‘구원받은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안 가르친다. 그래서 대학에 가면 많이 힘들어한다. 이 세상 커뮤니티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살까를 가르쳐야 한다”며 “또한 소수민족으로서 당하는 인종차별이나 다른 문제들을 마음속에 감추기보다, 서로 나누며 말씀을 통해서 치료받아야 한다”며 아이덴티티(Identity) 교재를 만든 이유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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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 예은이 아빠가 교회를 안 나가는 이유
유경근 집행위원장, 세월호 1주기 예배서 "기독인들이 앞장서 행동해 달라" 호소
이은혜 기자
세월호 1주기를 앞둔 4월 14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광화문광장에 기독교인 약 600명이 모였다. 1주기 추모 예배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날 오후,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4·16가족협의회)와 관련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4월 16일의 약속 국민 연대'(4·16연대)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온전한 선체 인양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 선언이 없으면 16일로 예정된 추모식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예배를 주최한 세월호기독교원탁회의는 피해자 가족들의 뜻을 따라 추모 예배가 아닌 '시행령 폐기, 선체 인양, 배상·보상 일정 중단을 위한 기독인 연합 예배'로 바꿨다.
예배 시작 시간인 저녁 7시가 되자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희생자와 실종자를 기리기 위해 깔아 놓은 304개의 의자는 금세 주인을 찾았다. 시간이 더 지나자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은 약 600명의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직장을 마치고 정장 차림에 온 사람들과 대학 기독교 동아리에서 온 대학생들,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단체로 방문한 고등학생들 등 다양한 연령대가 모였다. 영상 5도의 추운 날씨였지만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예배를 드리는 엄마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 4월 14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기독교원탁회의가 '시행령 폐기, 선체 인양, 배상·보상 일정 중단을 위한 기독인 연합 예배'를 주최했다. 원래 1주기 추모 예배로 모일 예정이었지만,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이 추모식을 연기하겠다고 밝히면서 바뀌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날 예배에는 약 600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했다. ⓒ뉴스앤조이 이정만
예배가 시작되고 유가족을 대표해 말하기로 했던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예정보다 앞서 마이크를 잡았다. 팽목항에 가야 하기 때문에 먼저 발언한다는 그는, 우선 1주기 추모식을 연기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정부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선체 인양과 대통령 시행령 폐기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1주기를 추모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일 년이 지나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추모하냐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공식적인 추모식은 연기할 수도 있지만, 1주기 전후로 진행 예정인 행사에는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4월 16일과 18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범국민 행사에 기독교인이 가장 선두에 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유경근 위원장은 유가족들의 대변인으로서 오래 활동했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많지 않다. 그러나 연합 예배에 선 예은이 아버지는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전해 보겠다며 말을 이어 갔다. 다음은 유 위원장 발언의 전문이다.
"오늘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읽었는데요, 마음에 크게 와 닿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 본문을 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성경은 '여러분은 나가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십시오. 여러분은 나가서 이 세상을 바꾸십시오. 여러분은 나가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선한지를 알려 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 변화해야 하느냐. 바로 나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기준과 선택, 그 가치관을 내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가끔 교회나 성당에 가면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참사가 일어난 직후 기울어 가는 배 안에서 2학년 3반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묵고 있던 방에 둘러앉아서 마지막으로 기도했습니다. 영상으로도 있는데요, 빛나라가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기서 그 아이들이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배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셔야 맞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 아이들과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을 번쩍 들어서 공간 이동하듯이 육지로 옮겨 주셔야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절박한 순간에,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그 기도를 왜 외면하셨을까요. 제가 답을 듣고자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 비는 멈추지 않고 기온은 점점 떨어졌지만 예배에 참석한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들은 예은이 아버지 유경근 위원장의 발언에 귀 기울였다. ⓒ뉴스앤조이 이정만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배가 기울어진 바로 그 순간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여서 정말 간절한 기도를 했는데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그들이 모여서 기도한 것은 잘한 걸까요 잘못한 걸까요. 이것 역시 답을 듣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참사를 직접 겪으면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많은 반성과 후회, 회개를 한 부분입니다. 여기에 나오신 분들은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이 궂은 날씨에 비를 맞으면서, 이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나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해당이 안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많은 신앙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만 하면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기도를 얼마나 세게, 열심히 또 자주 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고요. 4월 16일, 그 배 안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던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있었으면 저도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왜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도할 때와 행동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아플 때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참사를 겪으면서 제가 배운 것은 (그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기도는 평안할 때, 아무 일 없을 때, 평소에, 늘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익히 알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순간에 내가 행동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 유경근 집행위원장은 팽목항에 가야 하기에 예정된 순서보다 먼저 발언을 시작했다. 약 30분 동안 계속된 그의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 뉴스앤조이 이정만
제가 왜 이 로마서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았냐면,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 자신이 변화되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화되어야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할 줄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을 하시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ㅤ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을 하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배 안에서 기도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얘들아,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야, 뛰쳐나갈 때야! 임화영 선생님, 왜 애들 붙잡고 기도하고 있어! 나가라고 떠밀어야지!' 그 순간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평소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잘 알기 위해 기도했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감히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데요. 여러분은 기울어져 가는 세월호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서 일어나지 못하고, 여기서 탈출하지 못하고, 여기 함께 서서ㅤ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다 함께 가라앉아 죽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작년 4월 16일 이후로 1년 52주 가운데 딱 한 주만 교회에 갔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온 교인이 함께 기도를 하실 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활동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담임목사님 혼자서 2만 명이 넘는 분들의 서명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는 광화문광장에 나와서 1인 시위를 계속하셨습니다. 또 교단 내에서 세월호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계신 다른 목회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회개를 요구하시는, 매우 좋으신 감사한 목사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딱 한 번, 작년 추수감사절에 교회에 갔다가 지금까지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 유경근 위원장은 물론 신앙에 회의가 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자신을 잡아 준 것은 또한 기독교 신앙인들이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정만
당연히 신앙에 회의가 있지요. 나는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예은이에게 신앙이 정말 중요하다고 가르쳤는데, 그래서 늘 교회에서 좋은 일에는 앞장서서 많이 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을까. 당연히 신앙에 회의가 오지요. 그러나 거꾸로, 회의를 갖게 된 저에게 힘을 주시고 새로운 용기를 주신 분들 역시 저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계신 기독교 신앙인들이셨습니다.
제가 영원히 교회에 안 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죠. 결정적으로 못 나가는 이유는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에요. 교회에 나가면 예은이가 보입니다. 예은이가 앉아 있던 의자. 예은이가 뛰어놀던 잔디밭과 놀이터. 예은이가 노래하기 위해 붙들고 있던 마이크와 기타. 탁구 치던 탁구대, 함께 텃밭을 일구던 교회 뒤 작은 밭. 교회에 온통 예은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가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어요. 예은이 생각에. 그런 이유가 사실 가장 크긴 합니다. 이건 저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이번 참사를 겪은 모든 가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이것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트라우마센터를 지어서 심리 치료를 해 준다고요? 필요 없습니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우리 예은이가, 우리 아이들이 왜 그렇게 죽도록 방치되었는지, 왜 아무도 구조를 안 했는지. 그거 하나만 알면 살 것 같습니다. 아니 살 것 같은 게 아니라 그거 하나만 알면, 잘 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은이에게 가고 싶습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예은이가 간 모습 그대로 저도 빠져서 예은이한테 가고 싶습니다.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그런데 못 합니다. 왜요? 이 상태에서 제가 가면 저는 지옥 갈 것 같거든요. 예은이는 천국에 가 있는데, 저는 지옥ㅤ갈 것 같거든요. 그러면 죽어서도 못 만나는 거 아닙니까. 천국에 가서 예은이 만나고 싶습니다.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면 못 만날 것 같아서 못 갑니다.
▲ 지난 1년 동안 한 번밖에 교회에 가지 않았다는 유경근 위원장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회에 가면 여러 곳에서 예은이가 보입니다. 예은이 생각이 나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뉴스앤조이 이정만
제발 미안한 아빠, 부끄러운 아빠로 만들지 마시고 단 한마디라도 예은이한테 '이렇게 된 거란다'라고 설명해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만 되면 저희들은 돈, 필요 없지요. 그깟 돈 아무런 필요 없지요. 백억, 천억 원을 준다고 해도 필요 없지요. 억울하게 눈도 못 감고 가게 만들지 마시고, 예은이를 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그것만이 저희 유가족들이 바라는 소망입니다. 더불어 안전한 사회, 안전한 나라 만들어지면 그때 가서는 예은이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지요. '정말 미안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했잖아. 그걸로 용서해 줘.' 한마디 더 할 수 있겠지요.
날이 많이 궂습니다. 비도 많이 오고요. 오늘 날씨가 어떤 날씨인지 아세요? 작년 4월 16일, 제가 정신없이 시속 200킬로로 차를 몰고 세 시간 만에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한 주간 내내 바로 이 날씨였습니다. 비가 끊이지 않고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은 너무 차고 발은 시리고 온몸은 꽁꽁 얼고,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사흘 내내 의자에 엉덩이도 한 번 붙이지 못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날씨가 바로 이 날씨입니다.
유가족들이 밖으로 나올 때마다 비가 와요. 밖에서 뭘 하려고만 하면 비가 와요, 거르지 않고. 저희들은 '아이들이 우는 거다'라고 얘기합니다. 비는 누가 내려 주나요. 이 세상은 누가 만드셨나요. 저희들이 뭐라도 외치려고 나올 때마다, 밖으로 뛰쳐나올 때마다 날씨가 궂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보라가 치는 것은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 차가운 바닷속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갔던 아이들, 그 고통에 비하면 지금 너희가 겪은 고통이 비할 바나 되겠느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제라도 나는 너희들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믿고 저희들은 그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항상 힘을 내는 것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미안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던 여러분, 그 약속이 얼마나 큰 약속인지 저희들이 지금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번 주 지나서 시행령 통과되고 선체 인양 안 되면, 이제 우리는 부끄러운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부끄러우냐 안 부끄러우냐 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함께하실 수 있도록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경근 집행위원장의 이야기는 예배에 참석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말씀을 전하기로 했던 교계 원로 문대골 목사도 예은이 아버지가 성경 본문을 가지고 정확하고 꼭 필요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자신은 더할 것이 없다며 짧게 설교를 마쳤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예배가 끝나고, 참석했던 기독교인 중 일부는 열을 지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했다. 행진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기독교인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평화 행진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청와대 방향으로 계속 가길 원했고, 경찰은 미신고 집회라며 막아섰다. 이 과정에서 격렬하게 대응하던 김준영·백인혁·이종건 등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생들과 이관택(고난함께)·배성진(한국기독교장로회) 등 목회자 몇몇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현장에 남아 경찰 병력과 계속 대치하던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15일 새벽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동료 목사와 신학생이 연행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냐며, 자신들도 집시법을 위반했으니 체포하라고 주장했다. 결국 조헌정(향린교회)·박승렬(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장병기(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정태효(기독여민회)·양재성(예수살기)·이승열(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목사 등 목회자 9명과 안성용(기독교평신도시국대책위)·최욱준(성서한국) 등이 15일 새벽 1시에 종로경찰서로 자진 출두해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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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불량배’ 솎아내야 건강한 성전된다
항상 ‘적’ 만들고 연약한 교인들 굴복시켜... 자신만의 어젠다에 모든 것 맞추려 싸움
유정원 기자
어디 가나 있는 골칫거리 인물들
교회에 큰 상처 입힌 후 옮겨가서 또 분란
교회는 ‘죄인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죄 없는 인간이 없으니 맞는 말이다. 별의별 배경과 습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 군데 모여 가장 지고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곳이 교회다. 부딪히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중에도 고질적인 골칫거리 교인이 따로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교회 사역과 다른 성도에게 암적인 존재다. 분열과 분쟁, 파괴와 파멸을 초래한다. 이들을 분별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은 교회를 살리고 건전한 교인들을 보호하는 길이다.
라이프웨이 크리스천 리소스 대표인 톰 레이너 목사는 지난달 30일 칼럼을 통해 이같은 부류의 교인을 ‘교회의 불량배’(church bully)라고 정의했다. 또 대다수 교회에서 이런 교인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들은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고 분란을 조장하는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불량한 교인을 솎아내기 위해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교인은 항상 교회 안에 자기의 ‘적’으로 삼은 대상이 있다.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적이 필요하다. 또 장로나 권사, 집사, 재정담당 등의 교회 리더십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런 직책이 없더라도 ‘교회의 불량배’ 역할은 얼마든지 한다.
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불량배 교인이란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이들은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이며 교회를 구하고 지키는 영웅으로 자신을 착각하고 산다.
‘교회 불량배’ 교인은 ‘자기만의 교회상’을 갖고 있다. 자신이 멋대로 정한 교회의 모습이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 기준에 어긋나는 목회자나 사역, 프로그램, 교인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들의 전형적인 전략은 성도 중에서 연약한 교인을 골라 자신의 세력으로 삼는 것이다. 교회 그룹이나 위원회, 성도를 괴롭히고 설득하며 자기의 목적에 따르는 연합군으로 만들려 한다. 이때 신앙이나 정신력이 약한 사역자나 교인은 ‘불량배’의 힘에 굴복하게 된다.
또 다른 특징의 하나는 집요하고 감정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의 집중력을 본인의 뜻대로 교회를 끌고 가는데 이용한다. 이 밖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경향이 크다. 이들은 떠도는 정보의 작은 조각을 모아서 재구성한 다음에 본인의 어젠다에 맞춘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퍼뜨리길 좋아한다.
이와 같은 ‘교회 불량배’들이 활개를 치며 득세할 기회를 찾는 교회는 대부분 교인들 스스로 기대치가 낮은 교회들이다. 많은 성도가 교인의 권리를 우선으로 여기는 인식을 품고 있다. 교회 일이나 신앙생활에서도 자기들이 필요한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몇몇 불량한 교인들이 교회를 망치고 있어도 정면으로 막으려 들거나 대책을 마련하려 들지 않는다. 골치가 아프다고 여기며 외면하고 행여 손해를 입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교회에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결국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교인들이 ‘골칫거리 교인’의 만행을 방관하는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더욱 큰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교회 불량배’들에게는 언제나 다음번에도 이어 나갈 싸움이 준비돼 있다. 이들은 교회에서 혼란과 파괴를 야기한다. 교묘한 행위를 지속할 힘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 한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의 작업을 끝내고 잠시 쉰 뒤에는 또 다시 다음 작전에 돌입한다. 끝이란 없다.
이들 ‘교회의 불량배’들 중에서는 한 교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힌 뒤에 다른 교회로 자리를 옮겨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는 사람들도 많다. 힘을 잃었든지, 단지 흥미를 잃었든지, 이유는 상관이 없다. 3~4개 교회를 옮겨가며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주한국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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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말하는가?
<김대식의 빅 퀘스천>과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
최성수
<김대식의 빅 퀘스천>과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을 읽은 기독교인이라면 분명 인생의 문제와 관련한 과학자와 철학자의 대답에 대해 신학자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그래서 두 저자의 글에 대한 간단한 평을 적었는데, 조금 부족하다 생각해 이 글을 통해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첨언하려 한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혹은 인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면서 듣게 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수사학적인 질문에 불과하다. 대답을 발견할 의도에서 제기했다기보다는 단지 질문함으로써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라는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여러 대답을 들을 수 있지만, 줄리언 바지니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 어느 것도 보편적인 대답은 아니다.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른 대답을 원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줄리언 바지니는 인생의 의미는 각자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누구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두고 흔히 '수사학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 질문 자체를 문제로 삼아야 한다. 질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꼬리를 잡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수사학적인 질문은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았지만,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이 질문은 여러 질문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서 대답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질문들로 분석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럴 때는 '실제적'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바지니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대답할 수 있는 다른 질문으로 전환한 것은 매우 정당한 일이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서 수사학적인 질문과 실제적인 질문을 구분했는데, 독일의 조직신학자(은퇴) 게르하르트 자우터의 구분 방식에 따른 것이다. 그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수사학적(구조적)인 문제라 했고, 해결 가능한 문제를 실제적인 문제라 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구조적이다.
첫째, 의미는 전체와의 관련해서 적합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졌을 때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예컨대 텍스트의 의미는 문맥이 결정하지만, 사람의 경우 인생의 의미는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까지 포함해서 고려될 수 있다.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인생의 의미는 단지 목적으로 설정되거나 혹은 과거와 현재를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될 수 있을 뿐, 정당한 근거를 갖고 확정할 수는 없다. 죽은 후에야 가능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과거 신화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전체를 의미하는 신과 신에 대한 신앙을 전제했기 때문에 의미를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 인간의 사고에 큰 전환을 가져온 근세 때에는 비록 부분적이긴 했지만 인생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비록 신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기독교 혹은 신화적인 세계관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근세 이후 거대 담론의 해체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과거에 생각하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겨진다. 의미는 더 이상 전체가 아니라 부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았다. 삶의 주인으로서 통제력을 발휘하는 존재는 개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을 믿으며 살거나 혹은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조명하거나 탐색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왜 줄리언 바지니가 <빅 퀘스천>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비판하며 거부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유신론적인 세계관을 처음부터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유는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신학적인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계시하시되 동시에 은폐하신 하나님 행위의 본질적인 속성에 있다.
칼 바르트 계열의 신학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신학이다. 특히 게르하르트 자우터는 이란 책에서 이 점을 신학적 인간학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드러내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 자신을 숨기신다.
이사야 55장에선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는 인간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고 또한 그 깊이에서 결코 인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게다가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이 보는 것은 모두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할 뿐이며 정확한 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곧 종말에 가서야 가능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갈 뿐, 그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결코 조망할 수 없다.
요한 역시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그는,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예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야와 바울, 그리고 요한이 증언하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다.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규정할 수도 없으며, 다만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또한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 없다면, 기독교는 인생의 의미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기독교는 허무주의를 지향하는가? 헛되다고 선언하는 전도서가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듯이, 기독교가 인생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수사학적인 혹은 구조적인 질문으로서 실제적으로 대답될 수 있는 질문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인간의 기원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마땅히 관계를 갖고 살아야 할 존재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 혹은 누구를 소망해야 하며, 또 소망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등이다. 이런 질문들은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함의되어 있는 것을 분석한 것으로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생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접한다면, 기독교인은 성경 안에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행위와의 관계에서 대답할 수 있다. 특히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말하는데,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인생이 허무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생이 유의미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적임을 말한다.
특히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인간은 미래를 알아야 한다거나 과거를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거나 현재를 아무런 염려와 근심 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미래를 모르고 과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불안과 염려의 요소는 여전히 현존한다 해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삶이 유의미하다고 강조한다.
근대를 거치면서 거대 담론에 의해 다양한 폭력을 경험한 세대가 탈근대, 곧 거대 담론을 해체하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교회가 기독교의 교리를 남용한 일은 반드시 지양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하나님 신앙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으로 여겨서도 안 되고 또한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규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사는 삶을 실천하면서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면서 인생의 참 의미를 실천하는 삶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소망의 이유를 물으러 오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최성수 / 하늘땅사람교회 담임목사. 서강대 철학과, 독일 Bonn대학교 선학석사·신학박사, 영화 및 문화 평론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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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가룟 유다와 선한 말의 악한 이용
선한 말을 하면서 악한 일을 도모하는...성경은 양심의 문을 두드린다
이국진
사탄은 너무나도 재주가 좋아서 정말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바꾸어 버리고 악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선한 말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영혼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악한 줄도 모르고 대담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가룟 유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유월절이 이르기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을 때였다. 그 동네에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가 열렸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함께 식사 자리에 있을 때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인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
성경은 그때 부었던 향유의 가치가 대략 남자 장정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향유를 부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두둔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가룟 유다가 나서서 참견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어쩌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동의를 이끌 수 있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것을 이렇게 낭비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정도의 금액이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경건이기 때문이다(약 1:27).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사람이 아닌 가룟 유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가룟 유다는 100%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한 것이지만, 그 말 뒤에는 그의 탐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도둑이었는데 더 많은 돈을 훔쳐 가기 위해서 선한 말을 이용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가룟 유다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가룟 유다처럼 선하고 좋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선교를 한다고 말하고,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한다고 말하고, 아프리카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고 말하고,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고, 장애인들과 고아를 돕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한 목적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가 종종 있다.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남의 업적을 자신의 업적인 양 널리 홍보하면서 거두어들인 선교 헌금으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장애인들과 고아들을 학대하고 방치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이용해서 더 많은 후원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악을 행하는 데 선한 말처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더 나아가 가룟 유다는 선한 말을 자신을 책망하고 돌아보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외쳐야 하는 구호가 아니라, 사실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용도로 사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런 선한 말을 한 것이다. 그의 말은 100%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철저하게 악한 동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가룟 유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가룟 유다처럼 선하고 좋은 말을 주장한다. 선교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서 자신의 것을 직접 희생해 가면서 참여하는 일은 드물다. 선교와 부흥과 구제는 교회를 비판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신이 직접 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몇몇 교회에서 그러는 것처럼 '교회의 부흥'이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담임목사를 축출해 내기 위한 명분일 뿐이지,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직접 자신이 기도하는 일에 매진하거나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거나 예배나 기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교회 전체의 영적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보수주의 신학이나 신본주의란 구호는 교수들을 통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 옛날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사악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선한 구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말이다. 성경에서 권고한 대로 차라리 손해를 당할 생각은 없고 성경에서 권고와는 정반대로 빈번하게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의 법정으로 달려가면서 개혁주의를 외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선한 구호는 언제나 자신들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이익을 담보하는 데 사용될 때가 많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구호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
현대판 가룟 유다들은 어쩌면 계속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가룟 유다가 잠시 성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 은 30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며 그때에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하는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룟 유다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입으로는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악한 일을 도모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사탄의 기묘한 재주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 오늘도 현대판 가룟 유다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마 26:23)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을 통하여 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의 문을 두드릴 때 애써 외면하지 말고 회개의 길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살 길이다. 바로 그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신 것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국진 / 대구 남부교회 목사. 저서로 <예수는 있다>,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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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성추행범으로 몰린다면
<더 헌트>, 진실과 정의가 반대편에 서다
김기대
목사, 장성, 대학교수 등의 성추행 사건이 잊을만하면 뉴스의 중심에 등장한다. 이런 기사 밑에는 항상 세태를 한탄하는 댓글에서부터 거세를 주장하는 댓글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줄을 잇는다.
교단의 재판절차를 비껴 갔다고 무죄를 확신하는냥 뻔뻔하게 나오는 아무개를 보면 이 정도의 댓글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사회 지도층’ 뿐 아니라 언론에 쓰기에는 ‘격’이 안되는 이들의 추행을 포함하면 그 경우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런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그것도 믿던 사람이 그랬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 사람과의 친밀관계에 따라 그의 결백을 믿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발 더 나가서 그 피해자가 나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도시에 나가 살던 루카스(매즈 미켈슨 분)는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와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된다. 아무리 전직 교사였다 할지라도 중년의 이혼 남성을 유치원 교사로 채용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한국과는 다른 덴마크여서 가능한 일인지, 아니면 조그만 마을에서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온 친구를 위한 연고주의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는 영화 <더 헌트>(Jagten,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 2013년)만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중에는 절친 테오의 딸 클라라(아니타 베데르코프 분)도 있다. 클라라는 매일 자기와 놀아주는 아빠 친구 루카스에게서 거친 아빠와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선물도 건네주고 루카스의 입에 뽀뽀를 한다. 놀란 루카스는 선물은 또래 남자 친구에게 주고 입뽀뽀는 엄마와 아빠에게만 하라고 가르쳐 준다.
무안을 당한 클라라는 유치원 원장에게 달려가 루카스가 막대기처럼 꼿꼿한 고추도 보여주고 (클라라가 오히려 루카스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하트 팬던트도 줬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남성의 성기를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였지만 얼마전 오빠들이 ‘이상한’ 사진을 보여줄 때 얼핏 보았던 모습을 마치 루카스의 것인냥 원장에게 털어 놓는다.
어린 아이들이라도 무안할 수 있으며, 동시에 끔직한 거짓말도 가능하고 거리에 그어진 어떤 선도 밟지 않으려는 강박도 가진 ‘자아’가 이미 형성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어린 아이에게서 ‘진실’과 ‘천진난만’이라는 보편의 정서만 읽어내려 한다. 사건은 이 오류에서부터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테오와 루카스, 또 여러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테오가 루카스에게 “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네 눈이 씰룩거리거든”할 정도로 몸짓 눈짓 하나가 친구에게 다 읽히는 관계다.
북구의 추운 11월에 친구들이 함께 알몸으로 강물에 뛰어 드는 장면에서는 이 마을의 가족같은 친밀성이 한층 부각된다. 그런 사회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어린 딸을 성추행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모든 가족적 유대감을 사라지고 작가 신형철이 말했듯이 마을은 ‘지옥의 문’이 되고 만다.
경건주의도 루터주의도 풀지 못한 숙제
영화는 처음부터 루카스가 무죄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고 시작한다. 가톨릭 학교에서 신부가 학생에게 성추행을 한 의혹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던 <다우트>(존패트릭 샌리 감독, 2008)와도 다르고 <프라이멀 피어>(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1996년)와도 다르다.
<프라이멀 피어>는 시카고 지역에서 존경받던 주교가 끔찍한 살해를 당했는데 범인은 어릴 때 그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청년이라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인데 끝에 가서 반전이 뛰어나다. 이 영화에서 관객들은 살해범 청년을 위해 무료 변론에 나선 마틴 베일 변호사(리처즈 기어 분)와 범인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살해당한 신부의 양면성에 초점을 맞추다가 마지막에 가서 진실이 드러난다.
반면 <더 헌트>에서 루카스의 무죄는 확실하다. 우리가 루카스의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에 이르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엄습한다. 다른 곳에서 임신한 마을 처녀가 그 책임을 애꿎은 스님(수도사여도 좋다)에게 전가하자 그는 마을에서 쫓겨나면서도 일체 변명을 하지 않는데 결국 그에 감동한 마을 처녀가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털어 놓았다는 일화처럼 보통의 사람들은 의혹 앞에서 견뎌내기 힘들다.
상담사가 나와 아이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감염된 것처럼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털어 놓자 루카스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기억이 조작될 수 있지만 상담사는 아이들의 말을 믿어 버린다.
덴마크는 경건주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독일 할레로부터 퍼져 나간 프랑케의 영향은 경건주의를 유럽지역에서 확산시키면서 루터주의와 반대편에 섰다. 그의 열정은 할레-덴마크 선교회를 형성하고, 1620년 덴마크는 인도 동해안에 있는 트랑케바르(Tranque-bar)에 무역 식민지를 설립하면서 그곳을 선교 대상지로 삼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덴마크 영화에는 이런 흐름들이 남아 있다.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악셀 감독, 1996년) 도 그렇다. 중세의 농경사회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의 삶은 경건과 거리가 멀어져 있지만 한 사람의 범죄에서 경건치 못한 그들의 삶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명확해 보인다.
상담사가 클라라와 상담하는 동안 상담사의 질문에 나이 든 원장이 구역질을 할 만큼 ‘순수’한 것도 경건주의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엄격한 루터주의가 지배하던 마을에서 일어난 폭력을 다룬 영화 <하얀 리본>(미카엘 하네케 감독, 2010년)과 비교해 보면 결국 어떤 ‘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인간의 폭력성이 모든 사건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게 된다.
아빠 테오와 좋아하는 아저씨 루카스의 다툼 장면을 목격한 클라라가 엄마에게 “내가 바보같은 말을 했는데 아이들이 따라 한다”고 말하자 엄마는 잠시 당황한다. 진실이 밝혀 질 수 있는 순간 엄마는 정신분석학자가 되어 클라라에게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지”라고 ‘해석’한다.
무죄가 입증되었건만
루카스는 전처와 지내던 아들 마쿠스가 함께 살게 되어 기쁨에 차 있던 상태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자 더욱 당혹해 한다. 믿어주던 루카스의 새 여자친구도 의심이 깊어져 그의 곁을 떠나고 동네 슈퍼 마켓도 출입못하게 된다. 연좌제처럼 마쿠스를 바라보는 아빠 친구들의 시선도 곱지 못하다. 마쿠스는 루카스 친구들에게 외친다. “당신들은 친구도 아니다!”.
경찰에 연행되었던 루카스는 아이들의 증언이 일치않는 사실로 인해 석방된다. 루카스의 무죄는 증명되었지만 루카스를 ‘마녀 사냥’(그래서 제목이 Hunt다)했던 이들의 자기 정당화는 오히려 심각해진다. 석방을 기뻐하며 아들과 요리를 하고 있던 부엌에 돌이 날아 들어 부상을 당하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애완견 패니가 주검으로 돌아온다. 무죄 판명으로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상실한 마을 공동체는 루카스가 경찰서에 가기 전보다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제 진리(루카스의 무죄) 증명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마을 사람들은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처럼 종교적 광기로 루카스를 유죄로 몰고 갔던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 용어까지 동원한 이성적 접근으로 루카스를 ‘사냥’했다.
그런데 그 이성은 마을 공동체가 오랫동안 쌓아온 전통으로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만큼 취약한 이성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아는 ‘피해자’(라고 믿는)들은 법의 심판을 믿었으나 법은 루카스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 그들의 진리를 배신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제 진리는 정의와 반대편에 서 있다.
▲ 크리스마스 이브, 교회를 찾아간 루카스는 테오의 멱살을 잡고 자기 눈을 똑바로 보라고 소리친다.
크리스마스 이브, 폭력으로 피투성이가 된 루카스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예배당을 찾아 간다. 십자가에서 피흘리던 예수의 모습으로 예배당에 들어간 루카스는 테오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라고 외친다. 테오는 알고 있다. 루카스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눈을 찡그린다는 사실을. 이 순간 루카스의 눈은 찡그려 지지 않았다. 이성이라는 것이, 마을의 전통이라는 것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모두 덧없는 것임을 루카스의 피흘림과 흔들리지 않는 눈이 증명한다. 진리를 지켜낸 것은 루카스의 눈이었다.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예배당에서 루카스에게 폭행당한 테오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카스를 찾아가 화해한다. 시간은 1년이 흐르고 떠났던 루카스의 여자 친구도 돌아왔다. 그 마을의 성인식과 같은 사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마쿠스를 위해 성인식을 열어주고 사냥총을 선물한다.
1년 전 사건의 갈등을 모두 잊은듯 파티는 성대하고 파티 뒤에 모두 마을의 전통인 사슴 사냥을 떠난다. 루카스는 바로 눈 앞에 사슴을 보고도 쏘지 못한다. 1년 전 마을 사람들에게 ‘사냥’당했던 자신이 생각나서였을게다. 그 순간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루카스를 비켜 간다. 1년 전 마을의 희생양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 부채감을 덜어 주었던 그가 다시 마을 사람으로 복귀해 전통에 참여하는게 싫었던 누군가가 그를 향해 총을 쏘았던 것이다. 총을 쏜 사람은 햇빛에 반사되어 실루엣만 보일뿐이다. 희생양을 향한 사냥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며, 실루엣은 그 폭력의 가해자들은 모두 익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 6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종북’ ‘빨갱이’라는 희생양 사냥은 그치지 않는다. 그나마 덴마크 영화여서 진리가 밝혀진 뒤에도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실루엣으로 처리된 것일까? 우리 사회는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 역할 놀이를 하면서 실루엣은 커녕 매체를 통해 선명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예수의 피흘림으로 그것을 막아야 할 교회는 거대한 권력이 되었음에도 늘 피해자인냥 행세한다. 그래서 사찰에서 따온 지하철 역 이름도 싫고, 한국에 들어와 사는 무슬림들을 모두 IS처럼 보려고 한다. 성소수자들은 압도적 다수인 이성애자들의 성생활까지도 바꿔 놓을 막강한 힘을 가진 악의 세력으로 둔갑한다.
루카스는 성추행범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전통에 기대어 폭력을 행사하거나 누군가를 ‘사냥’해 왔을 것이다. 피흘림을 경험한 루카스는 이제 더이상 사슴을 향해 쏠 수 없다. 반면 피흘리게 한 자들은 끝까지 그를 괴롭힐 것이다. 사냥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냥터와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한겨레 21에 이 영화 평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런 고백위에 살아간다면 사냥터의 살기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정의와 진리는 같이 가야 하건만
근대 계몽주의 사회는 정의의 근거를 법에서 찾았지만 이런 관계가 깨어진지는 이미 오래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법에서 정의를 찾다가 법이 진실을 증명해주자 스스로 정의가 되어 폭력을 행사한다. 진실과 정의가 맞은 편에 선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결국 진실도 정의도 모두 선물일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와 율법의 관계를 성서 밖 세계로 꺼내와 정치적 차원의 정의와 법의 관계로 파악한 사람은 <바울의 정치신학>(1987년에 행해진 강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린비 출판사가 2012년에 출판했다)을 쓴 야곱 타우베스다. 이후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존 밀뱅크 등이 바울에게서 진리와 정의의 관계를 찾으려고 애썼다. 최근 테드 제닝스는 <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그린비, 2014년)에서 정의(칭의)를 선물로 규정하면서 로마서 5:15-17을 인용한다.
그러나 값없는 선물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죽었다면 분명히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많은 사람들을 위해 넘쳐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값없는 선물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값없는 선물은 한 사람의 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의 죄를 따르는 판결이 정죄를 초래했으나 이 값없는 선물은 많은 죄들을 따라 칭의를 가져 옵니다. 만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그 한 사람을 통해 죽음이 지배권을 행사했다면 은혜의 넘쳐남과 정의의 값없는 선물을 받는 그들은 더욱더 확실히 생명 안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책 속의 성서 번역을 그대로 따옴). (186-187)
(율)법도 정의의 기초가 되지 못했고, 마을의 전통도, 친구들의 유대감도 진리와 정의의 거리를 오히려 멀게 만들었다. 아들 마쿠스의 성인식이 있던 날, 루카스는 클라라와 마주친다. 이 천진한 아이 때문에 당한 고통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겠지만 루카스는 클라라를 안아 준다. 클라라는 선을 밟지 못하는 강박증이 있는데 마주친 공간은 촘촘한 선이 그어져 있는 바닥이다. 루카스는 클라라를 안아 건너편으로 옮겨 준다. 어린 아이, 그러나 모든 거짓의 발단이 되었던 클라라가 선이 얽히고 설킨 공간을 넘을 수 있도록 루카스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 준다.
처음 유치원 교사로 루카스가 왔을 때 클라라에게 아저씨는 아빠와는 다른 선물이었다. 그 선물에 답하는 마음으로 뽀뽀를 했는데 거절 당하자 루카스를 거짓 증언의 대상으로 삼아 마치 십자가에 달듯이 공개 모욕을 준다. 예수에게서 군중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배신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인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 철부지 아이의 증언을 믿어주면서 정의도 진리도 실종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는 선물처럼 다가와 다시금 진리와 정의가 함께 갈 수 있도록 자신을 버린다. 그런 점에서 <더 헌트>는 한편의 성서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을 준다. 희생양을 향한 사냥이 끝나지 않은 마지막 장면까지도 진리와 다른 길을 가려는 우리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더 헌트>는 무거운 주제 때문에 불편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영화다. 매즈 미켈슨은 이 영화로 2012년 65회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탔다. 글을 쓰면서 이 영화가 성추행을 진짜로 행한 이들에게 혹시라도 면죄부를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이 좋은 영화를 자기들의 면죄부로 사용하는 자들이 부디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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