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자가 직면하는 문제 - ‘빤히 보이는 설교’
수난일이나 부활절 같은 절기 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청중이 이미 다 알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본문과 메시지를 어떻게 새롭게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각 절기에 따라 본문선택의 범위와 핵심 메시지가 이미다 결정되어 있어서 예년과는 다른 본문과 메시지로 ‘새로운’설교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한 마디로 ‘빤히 보이는(predictable) 설교’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빤히 보이는 설교’란 본문이 낭독되기만 해도, 심지어 제목만 보고도 ‘오늘 무슨 설교하실지 이미 알았다’고 생각하여 아예 듣지 않게 되어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마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절기설교의 어려움은 본문선택, 해석, 핵심메시지의 확정, 그리고 신학적 입장 등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똑같은 내용을 어떻게 새롭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다.
이 ‘새로움’은 처음 듣는 ‘낯설음(이것은 이단일 수 있다)’이 아니라, 익히 아는 말씀이지만 ‘신선함’의 새로움이다. 사실 ‘빤히 보이는 설교’의 문제는 절기설교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며 ,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도 여러 방면에서 제시될 수 있다. 설교자는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보는 것이 좋다.
2. 가능한 한 시도 - 고백적 스타일의 도입
교회의 절기들은 교리 확립에 결정적이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절기설교는 교리 선포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자연히 논리적 변증, 교리적 설명, 제 3자적 입장에서의 해설로 그 스타일이 고착되는 경향을 띈다. 그러나 한 번 쯤은 객관적인 사건과 그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교리를 논리적 설득이나 설교자(청중) 자신의 고백적 스타일을 도입하여 설교함으로써 같은 메시지의 신선한 새로움의 전달 교회를 거둘 수도 있다.
아래의 설교는 본문의 주해를 통한 새로운 의미의 선포라기보다는 이미 들어 아록 있는 내용을 다른 사타일로 전달해 보았다. 십자거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논리적이거나 신학적인 설명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예수를 조롱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말대로 무능력한 모습으로 끝까지 고난을 당하고 죽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갈등9이것은 청중의 갈등 혹은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확신 아래0과 그 갈등을 풀어나간 과정을 나 자신의 고백적 스타일을 도입하여 전개해 나가면서 결국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와 효과가 무엇인지 드러나도록 해보려는 의도이다. 설교가 끝난 후 하나님의 아들로서 승리가 강조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도 절기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고 실감하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3. 본문
절기설교를 염두에 두고 본문의 단락을 정하거나 본문의 각 절과 단락의 주해에 많은 할애를 하지 않고 전체적인 장면의 파악과 총괄적인 언급의 방법으로 본문을 취급하였다. 본문의 인물 배역을 정하여 낭독하게 하는 것도 지루함을 없앨 수 있다. 또 절기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수난일 설교의 실제
1. 고난의 현장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일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현장의 모습을 위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치고, 총독 빌라도는 이 여론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줍니다. 현장에 모여 있던 로마 병정들, 군중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온갖 짓으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구중 앞에서 옷을 벗겨버립니다.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놓고 조롱을 퍼붓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침을 뱉습니다. 쥐어주었던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비웃으면서 빈정댑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자나 강도를 죽이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 옷을 벗겨 제비 뽑아서 나누고 앉아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깔아뭉개는 온갖 희롱을 다 퍼붓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구경꾼들도 머리를 흔들면서 모욕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2. 예수님의 반응
그러나 예수님은 그 괴로움과 고통과 모욕을 말없이 다 견디고 계십니다. 진통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거절하시고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철저하고 극심했는지 본문 46절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채 절규처럼 말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비명소리요 신음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의탁한 신뢰의 고백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육신의 영혼이 당하는 고통의 극치에서 토해내는 예수님의 절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50).
3. 갈등의 유발(끌어들이기)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 천대와 고통, 그리고 죽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지금 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있구나. 참 감사하다. 감격스럽다”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그래서 감격의 눈물이 나오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아니면 언젠가 배운 교리 생각이 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라고 하더라’고 하면서 배운 대로 덤덤하게 이 장면이 받아들여지십니까?
저는 처음 얼마동안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장면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나고 울화가 치민 것은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정면으로 부정당하고 있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대책도 없이 마냥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입을 놀립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며 빈정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46년에 걸쳐 지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친구야, 네가 만을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퍼부어댄 말과 행위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가만히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일개 멸망당할 죄인들이 감히 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너무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것을 다 당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화가 납니다. 울화통이 치밉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이따위 죄인들이 당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얄미운 인간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한 번 나타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북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보란 듯이 한 번 잠깐만 내려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만 해 부면 안 됩니까? 그래서 이 인간들이 꼼짝 못하게 해주고 올라가셔서 죽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 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증명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좋은 전도의 기회입니까? 이 인간들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모르고 감히 까불고 있잖아요!”
이것이 한 동안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의 모습, 십자가에 달린 후의 예수님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저를 사로잡는 고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압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가 그분의 한 마디에 잠잠해졌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거라사의 한 남자 속에 있던 군대귀신이 그분이 걸어오는 것만 보고도 벌벌 떨다가 쫓겨났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송장을 명하여 일으킨 분입니다. 오늘 이 일이 있기 부로가 며칠 전의 일입니다.
4. 해결의 실마리
그래서 한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면서 읽고 또 읽고 기도하던 어느 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기가 막힌 말을 우리가 들은 것이 여기가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을 이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힘없는 모습으로 원수에게 이러한 도전을 받는 이 기가 막힌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이 사역을 막 시작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사탄의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도 똑같고 장면도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시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적인 요구를 거부하였고 그것으로 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조건을 충족시켜줌으로써가 아니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 13절은 예수님께 패한 사탄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얼마동안 예수를 떠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고개를 흔들며 비웃고 빈정대는 이 유대인이나 로마 군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도 모른 채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알지 못한 채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쏟아놓고 있는 말이나 우리가 행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5. 절정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여기에 미치자 저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과 싸우고 계셨습니다. 사탄이 첫 번째 아담을 시험하여 넘어뜨린 이래 인간에게 임한 죽음과의 싸움이 라는 것이 생생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첫 번째 아담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온 죽음을 두 번째 아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그 싸움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 위에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은 사탄이 완패를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죽음을 죽인 죽음이었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가 되는 역사가 이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의 말씀이 저에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6. 대단원
그러나 사탄이 주님을 죽지 못하게 묶어 둘 수 없었듯이 죽임이 또한 주님을 죽음에 머물러 있도록 매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3절도 주님이 죽는 순간에 일어난 일을 말하면서 동시에 부활의 순간에 일어난 일을 자연스럽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죽음은 이미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고난당하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주님이 죽으심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면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고난 당하신 고난 주간에 초상집에 온 사람처럼 옷도 입어야 하고 웃어도 안 되고 즐거운 낯빛을 해도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크게 웃으면서 춤을 추어야 할 날이 주님이 죽은 날입니다. 왜입니까? 주님 편에서는 주님이 승리하신 라이요,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살아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끔찍하고 슬프고 심각하기도 합니다. 우리 죄의 참혹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 주님을 이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죽게 하였는가? 내 죄란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참혹한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해결하시고 이기셨다’고 생각하면 춤을 추고 싶단 말입니다. 더욱이 그 죽음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요, 부활이 전제되어 있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루신 그 역사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나 자신의 역사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 기쁨과 감격의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진리를 말하면서 그렇게 힘차게 불러댄 부활의 찬송이 이제 나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분이었음에도 끝까지 고난을 당하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을 저는 사랑합니다. “나 죽어 너 살라”하여 죽으신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저는 산 자가 되어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을 함께 고백하고 이 찬양을 함께 드리기 위하여 오늘 이곳에 모였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계시는 주님의 은혜가 생생하게 실감되는 이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정창균, <그 말씀> 1998년 4월호, pp.64-71
②제목: 그리스도의 수난
성구: 요한복음 19:1-42
설교자: 김서택 목사(대구동부교회)
요한복음 19장은 총독 빌라도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로마 총독의 재판을 받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시킬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순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매국노도 아니고 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하여 로마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형을 결정하고 집행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온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당국도 결국 사탄의 한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있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왕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자기 아들을 죽인 나라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장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해야 옳은데 그것을 의의 제사로 받으셔서 인간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 그는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1-3).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1절). 예수의 죄는 십자가에 처형할 정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빌라도는 적당하게 채찍질한 다음 놓아줄 생각이었습니다. 로마법에는 채찍질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좀 가볍게 때리는 채찍질도 있었고 살이 완전히 찢어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초주검이 되게 하는 채찍질도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에 빌라도가 때린 채찍질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채찍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수욕과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2-3). 특히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왕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힘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을 예수님 한 사람에게 퍼부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을 지키면서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박봉에 시달리면서 받던 모든 불만을 예수님에게 왕의 옷을 입힘으로 다 퍼부었던 것 같습니다(벧전 2:24, 사 53:5).
즉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당하신 것은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을 대신 맞은 것이며 우리가 조롱당해야 할 것을 대신 당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채찍질 당하신 것은 우리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선적인 죄들, 죄를 짓고 또 짓는 연약함, 마음 속에 양심을 누르는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주님이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아무런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감추고 또 감추고 싶은 부분들을 믿는 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남에게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상처가 아물었고 치료받았기 때문입니다.
2. 빌라도의 법정(4-16)
(1) 빌라도의 무죄 주장(4-6)
빌라도의 재판에서 놀라운 것은 로마총독인 빌라도 자신은 예수님에 대하여 무죄를 주장한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하며 처형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4). 빌라도는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로마에 해를 끼칠 위인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정당하게 채찍질을 하고 무죄 방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당국은 예수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로마 당국보다 예수님을 더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들과 빌라도의 타협(7-9)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 정도로 끝내고 그냥 내어 놓으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7-8). 그의 죄명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들의 종교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빌라도와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번 유월절에 우리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하게 넘어가 줄테니까 당신도 우리의 요구를 하나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발라도에게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기가 신의 아들을 처형하는 것이 되며 또 다른 문제는 설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추종자들도 많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의 추종자들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빌라도는 원치 않게 자기 생애에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한 재판장의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3) 유대인들의 소동(10-12)
빌라도는 지금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고민입니까?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극단적인 선택의 자리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자기들이 고발을 했는데 이 사람을 풀어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종교적으로 협상을 시도하던 유대인들은 빌라도 계속 망설이자 다시 정치적인 문제로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12). 즉 이 예수와 자기 왕 가이사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가이사를 반역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 추종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 한 사람 처형하는 것은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이렇게 강한 소원을 하나 들어주면 그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다시 물어보았습니다(10-11).
빌라도는 자기에게 예수님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준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빌려 준 것입니다. 그 권세를 빌라도는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빌라도의 재판(13-16)
드디어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13). 빌라도는 굳이 그 자리에 앉지 않아도 총독이며 그가 내린 결정은 유효합니다. 그러나 굳이 그가 그 자리를 택한 이유는 자기의 권위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라는 자는 자기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전혀 굽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수만 믿고 마치 예수를 놓으면 그를 가이사의 반역자로 고소할 듯이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번 한다고 하면 하는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왜 자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무력으로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일만큼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냐, 현실이냐’라는 문제였습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진리를 새로 받아들이고 현실을 모두 부정하고 버리느냐’라는 문제였습니다. 거기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무엇보다도 총독으로써의 자기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박석이라는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무jt인가 달라질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히심(17-27)
본문은 우리 주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처형당하신 장면을 비교적 감정의 개입 없이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7-18). 우선 예수님이 처형된 장소는 ‘골고다’라는 언덕이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해골인데, 아마 산 자체가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 것 같습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처형된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가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어서 시골 구레네라는 곳에서 온 시몬이라는 자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전에 그에게 모진 채찍질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채찍질은 거의 초주검이 되도록 때리는데 뼈가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는데, 그 두 사람은 강도였습니다.
이 강도들은 남의 물건을 강탈하는 강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 편에서 부자들을 공격하는 테러범들입니다. 로마는 죄 없는 예수님을 두 테러범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그가 완벽한 반역자의 한 명으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연출은 대제사장이지만 빌라도는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사이에 죄패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19). 총독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죄명을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한 반역자들인데 그 대표가 예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끌려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자칭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죄명은 그만큼 애매했습니다. 총독이 정식으로 죄명을 쓴다면 ‘반역자 예수’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그런 반역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유대인들 안에 반역의 혐의가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처형하면서 대신 모든 유대인들을 처형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죄패를 썼다면 ‘자칭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은 그의 처형이 모두 하나도 남김없이 공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재판은 피고인의 인격을 생각해서 처형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고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공개된 처형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에서부터 십자가 나무에 못이 박히는 장면과 그를 처형한 집행인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나 그가 십자가 위에서 무슨 말을 하셨는가 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죄패는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 세 개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분이 누구이며 왜 죽었는지를 다 알 수 있도록 공개했습니다. 공개 처형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죄수의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죄목과 처형된 죄수를 공개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방지하자는 것이 하나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혐오스러운 죄를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그 대신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은 대표로 여러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패를 이렇게 읽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왕 예수’
4. 운명하심(28-37)
(1) 예언의 성취(28-29)
요한이 가장 장고해서 증거하고 있는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상황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 하나의 일들이 알고 보니까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시편 22편 18절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군인들은 멋도 모르고 예수님의 옷을 서로 차지하려고 제비를 뽑았지만 실제로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이 말씀하신대로 성취되는 한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2) 다 이루었다(30)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30).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참된 인간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끝까지 사실 것입니다. 마귀가 지금까지 주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기 때문이며,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끝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없는 몸으로 그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새로운 대표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이러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주의 죽음, 지옥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 장사되심(38-42)
이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장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장사를 보면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장사의 의미
어떤 사람이 죽어서 그 사람을 장사지냄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관계는 종결이 됩니다. 죽은 사람의 장사는 그 사람에 대한 마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에 대한 마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어서 장사지낸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너무나도 의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요셉이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하면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의 의로우심에 대한 고백으로 정성껏 장사를 치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바로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무려 사십일 동안 계시며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신 후 그것도 열흘이 지나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시간적인 간격을 주십니다. 하나의 일이 끝난 후 바로 그 다음 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중간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시고 무덤 속에서 그의 몸이 이는 사흘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아버지 되시고 하나님께 대한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가는 데는 조용한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고귀한 죽음(39-42)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그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집 한 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보통 때의 예수님 같으면 ‘나를 위하여 이렇게 비싼 향유를 쓸 필요가 없어.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이 예수님의 말에 그 비싼 향유를 붓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고, 또 제자들이 책망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나이가 든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무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 무덤은 바위를 옆에서 쪼아 들어간 것으로 시신을 누일 수 있고 돌로 입구를 막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덤이 자기가 아닌 주님이 누우실 자리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어떤 것을 준비하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사용될 때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엄청난 구원 사건으로 사용됩니다. 만약에 요셉이 그 무덤을 아까워했다면 그 무덤은 그저 한 부자의 무덤에 불과할 뿐이며 아마도 도굴꾼이나 그 무덤을 기억할지 모르지요.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대해 최대의 예우를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시하고 바로 축복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이 단지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김서택, <그 말씀> 2002년 3월호, pp.78-91
③ 제목: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시는 부활의 주님
성구: 마태복음 28:19-20
설교자: 유진 피터슨
1.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도 고기잡이를 떠났다(?)
우리에겐 부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한 형식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나눠주고 먹는 것을 실천하는 기독교 생활방식 전통이 남아 있다. 형태와 내용을 많이 부분 성경에서 따온 이 전통은 성찬예식에 명백히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전 세계의 부엌과 장작불 둘레에서 배고픔에 의해서 든 습관에 의해서든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식사 때 표현되고 재현된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제자들 가운데 일곱 명과 함께 잡수신다. 이 설정에는 강조점이 있으며 주목할 만하다. 이 일곱 제자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두 번씩이나 주일날 연이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인 갈릴리에 돌아와 있다.
마태에 의하면 그 이전에 그들은 사도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가서 제사를 삼아 ... 세례를 주고 ... 가르쳐”(마 28:19-20). 그리고 지금 원래의 11명 가운데 7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들로 인해 그들의 옛 어업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주 최근에 예수님께 들었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보내고 있다. 왜? 왜 그들은 그렇게도 빨리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왜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아덴으로 가는 최상의 방법을 연구하면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는가? 왜 그들은 기운이 절로 나서 당장 가려고 안달하거나 열심을 내지 않는가? 왜 갈릴리에서 꾸물대고 있는가?
본문에 분명한 해담이 없는 데 대해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위험을 무릎 쓰고자 한다. 나는 나와 함께 수년 동안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의 고기잡이를 떠나는 거소가 같은 유사한 상황에서 왜 손을 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안다고 어느 정도 자부하고 싶다.
2. 이생에서의 부활이 주는 현실 충격이 컸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하던 날 밤에 그의 친구들을 끌어 모았다. 그와 그의 동료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충격에서 - 내 생각엔 주로 부활이 준 충격에서 -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다른 이들에게 십자가 사건은 참으로 참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이요 친구가 조롱받으며 고통에 찬 고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제자들에게서 예수님의 죽음이 준 충격을 약화시키거나 감소시켜 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죽음은 사물의 자연 질서 속에서 일어났다. 그들 모두는 이전에 십자가 처형을 목격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팔레스틴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개적인 십자가 처형이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로마식 사형 방법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적을 제고하는 것뿐 아니라 소동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로마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 처형법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참혹했다.
그러나 부활은 이와는 다른 무엇이었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이 이전에는 무엇을 상상하거나 믿었든지 간에, 부활 사건은 당시 그들이 겪고 있었던 일에 대해 그들을 전혀 준비시켜 주지 못했다. 당신이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은 내세와 관계된 것이어야만 한다. 즉 그것은 당신이 죽고 장사지낸 후에 일어나는 일이며 당신을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들이자 참여자들은 분명 천국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랐던 동일한 옛 땅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그들 무리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잡수시는 것을 목격했던 것은 여기 이 익숙한 곳, 이 익숙한 친구들의 무리 가운데서였다. 부활에 대한 평생의 가정 - 부활에 대한 전 유대세계의 사상과 논의 - 에 갑자기 균열이 일어났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의 반응을 열거해 줄 말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기이히 여김, 놀람, 경악 등 수세기 동안 그들의 이스라엘 선조들이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이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켜주지 못했다.
그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현실감을 지금 이곳에서의 부활에 즉응시킬 수 없었다. 지금의 부활은 그들에게 결코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 이생에서의 부활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재적 부활은 너무나 거대한 개념이어서 세상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들의 사고력으로는 그 사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상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3. 물고기 잡는 현실에 뛰어든 ‘부활의 예수’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그들이 고기잡이로 돌아간 이유이다. 그들은 날마다의 현실을 자신들이 성장했던 지역, 그들이 익숙한 일, 바다와 고기잡이 배, 물고기와 그물들을 좀더 강하게 부여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또는 아마도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능한 다름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그들 삶의 작업환경에서 이 새로운 부활의 계시를 드러낼 필요를 느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형되셨고, 다시 정의되었다. 또한 부활은 그와 똑같이 그들 자신 역시 새롭게 변형시켰고 다시 정의를 내리게 했다.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부활에 대한 익숙한 개념은 지금 완전히 ‘생존세계’(시116:9)로서의 삶의 개념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특별한 사건을 그들의 평범한 삶 곳으로 흡수하기 위해,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옛 작업장에서 옛 일상으로 뛰어든다. 나는 이것이 매우 주의 깊게 계획된 일, 즉 우리가 때로 ‘영적훈련’이라 부르는 종류의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몸담게 된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는 본능적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나타나 있듯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 자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물고기를 잡던 밤은 ‘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평범한 노동의 삶의 세세한 모든 것에까지 미치며 그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방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해가 떠오를 무렵 아침, 예수님은 해변에 서 계신다. 해변에서 축구장 길이 정도로 100야드 쯤 떨어져 있던 일곱 제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나서 어땠는지 물어보시며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했음을 듣는다. 그는 그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이르신다. 그들이 그물을 던지자 그 물은 물고기로 가득 찬다.
일곱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왜 그들은 모두 즉시 알아보지 못했는가? 요한은 해변에서 100야드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열성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맞으러 헤엄쳐감으로써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을 요란하게 드러내면서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들은 왜 자신들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알아보는 데 그렇게도 시간이 걸렸는가? 사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첫 번째 부활 만남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각각 다른 때 두 번씩이나 예수님을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누가 역시 부활식사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말해준다(눅 24장). 따라서 여기 갈릴리 이야기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사실상 이는 매우 극적인 만남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그들 가운데에 살아계신 것이다. 왜 그들 모두는 이것을 즉시 알아채지 못했는가?
4. 일상에서 만난 부활의 예수에 대한 감동
우리가 이 질문에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다면 최소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에는 우리의 시력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강제로 되거나 교묘히 이루어질 수 없다. 자원함과 관련된 무엇이다. 갈릴리 해변에서의 부활 출현은 압도적이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과 고백이 강요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 현현을 통해 예배나 제자도를 강요하지 않았다. 에밀리 티킨슨은 그녀의 글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진리의 눈부심은 서서히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눈이 멀고 말 것이다.”
다행이도 나는 상상력을 존중하고 북돋워주는 설교 문화 속에서 자랐다. 우리 교회의 목사님들은 모두 많이 교육받은 분들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특별한 것이 없는 우리들 공동체 속에서 어떤 것이든지 택해서 성경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에, 우리는 갑자기 그 성경 이야기들이 몹시 그리고 영원토록 의미심장한 것으로 깨닫곤 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다윗과 바울의 이야기들 그리고 가장 멋진 예수님 이야기들과 그들의 삶들은 당시 내 삶의 구조 속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부활절은 제외다. 이해할 수 없게도 부활절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아무런 상상도 없었다. 그것들 대신 논증들, 증거들, 논리, 근거자료가 있었다. 우리는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논증법을 조목조목 정확하게 훈련받음으로써, 부활의 정체를 드러내줄 어떤 문제들도 다룰 수 있도록 삼단논법으로 무장되었다.
4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부활 이야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고 그냥 우리들로 하여금 직접 부활의 삶에 참여하고 실천하도록 초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의 마지막 부활 이야기는 그의 전임자들이 썼던 복음서의 일부이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요한과 그의 여섯 동료들은 예수님과 함께 해변의 아침식사에 참여하여 음식을 받고 예수님과 관계를 가질 때 믿었다.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나는 이 부활 아침식사가 우리들이 ‘워킹밀(working meal-업무 중 식사)’이라 부르는 것이었음이 흥미롭다. 그것은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해 특별히 준비되고 식탁에 올려진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신의 첫 부활식사를 기억에 남겨질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잘 연습된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해변에서의 배경음악도 살리고 그의 갈릴리 여 제자들을 한데 모르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고된 작업으로 긴 밤을 새고 난 자연스러운 아침 노동의 일부였다. 일곱 명의 어부가 작업복을 입은 채 해변에 모였을 때, 그들은 몹시 시장하던 터라 불가에 구워지고 있는 생선과 아직도 따뜻한 빵을 보며 감사히 여겼으리란 것을 확신할 수 있다.
5. 일상의 식사 가운데 담긴 임재의 메시지
기도와 반성과 휴식을 위해 날마다의 삶에서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장소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수님 역시 이것을 행하는 본을 보이신다(막 1:350. 하지만 이러한 물러남의 훈련들이 유익하고 심지어는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일곱 제자들과 가진 식사는 평범한 식사가 영성 형성을 위한 부활의 영성을 위한 어떤 것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 때마다 “소금 좀 건네주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손을 뻗어 양배추를 가져다 먹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영성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의 주일 예배는 중요하다. 우리가 참석하는 성경연구도 중요하다. 물러남의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일생에 걸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식사 가운데 임재하는 것은 - 비록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도 -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훨씬 더 견고히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공동 식사는 기본적인 것이며, 그 기본적 방법에 의해 우리는 음식에 대한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대화와 친밀함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필요와 전통을 계승하고 가지 - 철학자 앨버트 보르그만이 ‘식탁문화’라 부르는 것 - 를 전달하는 문화적 필요를 채운다. 식사 - 준비, 차림, 먹기, 치우기 -는 언제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단순한 삶의 구성요소로 구성된 일련의 복잡한 작은 현실들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포괄적이고(누구든지 식사자리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식사는 사실상 우리가 인간 존재로서 행하는 모든 것에 관련된 것들 -주고 받음,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지는 것, 후히 줌과 관대함 -을 끊임없이 공급해 준다.
우리 삶 사운데서 식사가 갖는 거듭되는 탁월성은 우리가 서있는 가족체계 및 전통과 연결되도록, 개인적으로 친구와 손님이 될 수 있도록 굶주린 사람들과 도덕적 관계를 맺도록 해준다. 아마도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가 우리들을 예수님이 일곱 제자들을 갈릴리 해변에서 그와 함께 부활의 아침식사를 하도록 초청하신 그 상황에 계속되는 변화에 참여자들이 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또는 거룩한 친교 또는 주의 식탁)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이 부활 현현과 우리의 고된 일과에 새겨진 부활, 이 모두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기독교 관례에는 매일의 식사를 일종의 작은 성례로 여기는 견고한 정통이 있다. 매일의 식사는 성만찬에서 유래되며 또한 성찬의 식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임재해 계시는 우리의 부엌 식탁에서 매일 먹고 마심으로 확대된다.
생각해보라. 부활로 갖춰진 형식의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식사를 위해 앉아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때마다 존재한다.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바로 그때처럼, 우리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축복하고 차리며 먹을 때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 유진 피터슨, 월간 <목회와 신학> 2003년 4월호, p.112-117
④ 제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성구: 고린도전서 15: 12-20
설교자: 서문강(중심교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3-14)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공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않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실천해 나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렘17:9). 그래서 하나님ㄴ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라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부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 바다와 산과 별들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게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낭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라는 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린도 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아야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전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 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위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지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능ㄹ 가르쳐 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 서문강, <그 말씀> 2002년 3월호, pp.70-77
⑤ 제목: 부활절의 기쁨
성구: 고린도전서 15:20
설교자: T. 드위트 탤미지
이 영광스런 부활절 아침, 음악과 꽃에 둘러싸여서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축하합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오늘은 꽃들이 모두 한 목소리, 같은 어조로 합창하고 있습니다. 몸을 구부려 백합에게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군요.
“들판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
오, 여러분들 중 몇 분은 그것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습니까? 부활, 부활을 말입니다!
6년 전 부활절 전날이었습니다. 저는 부활절 카드를 하나 받았는데, 카드에는 그 아름다운 능소화(여름에 넓은 깔대기 모양의 황적색 꽃이 피며, 관상용으로 가꾼다-역자 주)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나팔 소리 울려 퍼지고 죽은 자가 일어서리라” 그때에는 그 카드를 내가 받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고, 오늘은 똑같은 위로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드립니다. 누가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죽음에서 일어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성도들이여, 오늘 아침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봅니다. 오늘의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부활 추수의 첫 번째 다발입니다.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오늘 아침이 다 지나가기 전에 저는 죽은 자의 모든 공동묘지로 걸어가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묻혀 있는 전국 방방곡곡의 묘지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이 꽃들을 뽑아 모든 무덤 위에 희망의 장미요, 기쁨의 백합인 복음의 향기로운 약속을 뿌릴 것입니다. 아이들의 무덤, 남편의 무덤, 아내의 무덤, 아버지의 무덤, 어머니의 무덤 위에 뿌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있는 바로 이 시간에 우리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세상의 위대한 정복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알렉산더, 시저, 필립포스 2세, 나폴레옹 1세라고 말할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그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정복자들보다 더 위대한 정복자를 말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는 검은 말을 타고 워터루와 아틀랜타와 살롱을 가로질렀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짓밟은, 피묻은 발굽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정복자입니다.
그는 검은 깃발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는 포로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는 지구의 반구를 가로지르는 도랑을 파서는 인류의 시체로 메웁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새 세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지구상의 사람들이 전멸될 뻔한 적인 50차례나 있었습니다. 50차례나 이 세상은 생명체가 없이 공중에 있었을 뻔했습니다. 산에도 사람이 없고 바다에도 사람이 없고, 끝없는 공간 속으로 나아가는 폐기된 배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세대들에게 자기의 일을 몇 차례고 반복했습니다. 그는 정복자일 뿐 아니라 군주입니다. 그의 궁전은 무덤이며, 그의 샘은 세상의 눈물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사, 이 부활절 아침을 통하여 죽음의 무덤이 무너지고, 죽음의 왕궁이 파괴되는 모습을 봅니다. 죽음의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날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일어섰기에 우리도 일어설 것입니다. 예수는 “잠자는 자의 첫 열매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교리는 헤라일 수 없는 신비들로 싸여 있습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기적의 하나님에게는 문제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이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의 몸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면,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떤지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에게 수천 가지의 질문을 하고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고 있지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난 믿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힘을 찾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나리라”저는 설명할 수 있는 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바뀐다. 그러니까 70세 먹은 사람은 몸이 10가지 있었던 것이다. 부활할 때에는 어느 몸이 나타날까?” 여러분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한 줌 먼지가 되고, 그 먼지는 식물에 흡수되며, 동물은 식물을 먹고, 사람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 그렇게 많은 방향으로 흩어져 보린 몸이 부활할 때에는 어떻게 모일 것인가?” 여러분에게 이런 식의 질문이 더 있습니까? 자, 이리 와서 물어보십시오. 저는 대답하는 체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에 의지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나리라”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부활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설명마다 그날에는 커다란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매우 클지, 작을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매우 날카로운 소리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소리는 수천년간 침묵이 지배했을 그 장려한 무덤 속이라도 뚫고 지나갈 것입니다. 수백만의 영들이 영원의 문을 거쳐 땅 위에 있는 무덤에 와서는 울부짖을 것입니다.
“우리 몸을 돌려다오, 우린 그것을 부패한 상태로 너에게 주었으니 이제 부패한 상태로 넘겨다오” 수백의 영들이 게티스버그의 바위 주변을 떠다닐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몸이 뭍혔기 때문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그린우드로 올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몸이 묻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재결합되기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뉴욕에서 리버플까지 해로를 따라 증기선들이 침몰한 자리마다 떠났던 영들이 다시 돌아와 파도 위를 떠다니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스톤시호가 사라졌습니다. 거기에서 프레지던트호가 사라졌습니다. 떠도는 영들, 수백의 떠도는 영들이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립니다.
누가 그 장면을 묘사할 수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 일이 있기 바로 전에 완전한 정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는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 혹은 묘지를 지나가고 있는 덜그덕거리는 발굽소리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땅 위의 모든 동굴 속에도 적막이, 산비탈 위에도 적막이, 골짜기와 깊은 바다 속도 모두 적막합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대천사의 나팔소리가 산과 바다를 가로질러 종소리를 울리며, 바퀴를 굴리며 요란하게 달려옵니다. 대지는 공포에 떨 것이며, 죽은 자들의 무덤이 파도치듯 요동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는 위로 떠올라 젖은 머리털을 큰 파도 위로 들어 올릴 것입니다. 모든 땅과 모든 바다느 한 덩어리 생명체가 되어 움직이게 됩니다. 모든 얼굴, 모든 세대, 모든 상태가 한 방향을 응시하고 한 왕좌, 즉 부활의 옥좌를 쳐다봅니다.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나타나리라”
여러분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부활의 아침에 예상한 대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그의 사람들 모두가 부활한다는 약속이요 예언이라면, 당신은 우리에게 부활한 몸에 대해서 말해 주시겠습니까?”
네,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신비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활한 몸에 관해 말할 서너 가지 것들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며, 틀림없는 것입니다.
1. 부활한 몸, 영광의 몸
우선 첫째로, 저는 여러분의 부활한 몸에 관해서 얘기할까 합니다. 그 몸은 영광스런 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육체는, 죄가 손상시키고 망가뜨리지 않았더라면 유지되었을 그 몸의 뼈대에 불과합니다.
조각가가 만든 가장 멋있는 동상을 가져다가 정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쪼고, 여기저기를 두들기고 때린 다음에 수백년 동안 비바람 속에 세워놓는다면 그 본래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자, 인간의 육체는 수천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 쪼아지고, 두들겨지고, 때려졌으며, 손상되었습니다. 다른 세대들의 육체적 결함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에 육체는 원래의 형상대로 장식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육체와 부활된 몸의 형태에서 보이는 차이는 운동선수와 나환자 병원의 바싹 마른 비참한 사람의 차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사망의 물이 고통과 노력의 얼룩을 씻어낸 후에 완전한 눈을 볼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수고한 일들의 매듭이 손가락 관절로부터 풀어진 후에 완전한 손을 볼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어깨로부터 짐을 던 후에 똑바르고 부드러운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몸입니다.
2. 부활한 몸, 불멸의 몸
그러나 저는 또한 그 몸에 관해 얘기할까 합니다. 그 몸은 부활할 때에 얻을 몸이며, 불멸의 육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들은 야위고 쇠약해집니다. 우리가 삶을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죽기를 시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로에 땔감을 계속해서 공급해 주지 않는 한 화로는 꺼질 것입니다. 혈관은 빵가루를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 날라다 주는 수로입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병과 죽음은 언제나 육체라는 셋집 안에서 먹이를 얻으려고 애쓰거나 우리를 무덤의 제방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부활할 때에 불멸의 육체를 얻을 것입니다. 대기 중에는 말라리아도 없고, 감기도 없고, 신경통도 없고, 앰뷸런스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건강, 그것도 불멸의 건강이 있습니다.
3. 부활한 몸, 강한 몸
더 나아가서, 부활할 때에 여러분이 얻게 되는 몸에 관해서 말하겠습니다. 그 몸은 강한 몸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8마일이나 10마일을 걸었습니다. 지쳤습니다. 우리가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은 몇 백 파운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운이 빠집니다. 무장도 안한 채로 야수를 만나면, 우리는 뛰거나 줄행랑을 치거나 기어올라가거나 몸을 피하거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수와 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8시간이나 10시간은 정력적으로 일합니다. 그리고 나면 녹초가 됩니다. 그러나 부활한 우리는 결코 지치지 않는 육체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부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조난을 당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아 있는 배 조각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조각 위에서 버티었지만, 아들은 얼마 있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탈진된 상태로 파도에 떠밀려 해안에 이르게 되었고, 한 어부의 구조로 그 어부의 오두막집 침대에 눕혀졌습니다. 꽤 여러 시간이 지나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 옆에는 아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가 깨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날 아침, 같은 무덤 속에서 나타나 우리 옆에 누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 아버지와 아들은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삽니다. 이제 더 이상 우는 일도, 헤어지는 일도, 죽는 일도 없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영원한 약속의 보혈로 말미암아 선한 목자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는 모든 선한 일에 여러분을 완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커티스 허트슨 편저, 부활에 관한 명설교, 이선봉 옮김, 생명의 말씀사, 1994, pp.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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