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감동 어디서 오나? /고전12:31-13:7 2013-07-11 19:26:24 read : 5069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랑만이 감동적인 공공의 동력, 참 변혁의 힘을 지닌다
한완상 (edit)
오늘의 기독교의 위기, 특히 한국교회의 위기는 무엇보다 복음의 감동이 실종된 데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를 온전한 실체로 변화시켜 주는 예수의 복음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출세와 성공을 도우는 일종의 미신으로 전락한 듯합니다. 이런 복음이 한국에서는 박정희 시대 '잘 살아 보세'의 정치 흐름에 조응했었지요. 군사정부의 외피적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한국교회는 폭발적 양적 성장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저기서 메가처치(mega-church)들이 치솟아 나왔지요. 세계가 이런 기현상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외피적 성장은 복음의 진수를 실종시키고 만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이런 시류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도,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모습도 도무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사사화(私事化)되었고, 탈역사화되었고, 추상화되었습니다. 개인의 영혼의 안녕과 개인의 종교적 명상의 고즈넉함이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썩은 역사 현실을 올곧게 고쳐 내고 어두운 역사를 밝게 변화시키는 일에는 아예 외면하고 만 듯합니다. 신앙이 깊고 신학이 열렸다 해도 감동의 복음과 복음의 감동을 역사 현실 속에서 실천적으로 육화(肉化, embodiment)시키는 일에는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복음에서는 공공적 감동과 공공적 열정, 헌신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비극의 조국 분단 현실, 날로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 현실 속에서 공공적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역동적 동력이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갈망하셨던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워 보려는 복음적 움직임은 교회에서 더욱 희미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제가 겪었던 몇 가지 흐뭇했던 체험, 감동적으로 저를 깨닫게 한 소중한 체험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지난 달 중순에 저는 한 젊은 엄마로부터 흐뭇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2년 전쯤 제가 주례자로서 한 쌍의 젊은이의 결혼을 축하했는데, 지난 6월 15일 그들이 첫 아들의 돌잔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돌잔치 축의금 받은 것을 모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짐바브웨에서 에이즈에 걸린 엄마 때문에 고아가 된 어린이를 위해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한 살이 된 그들의 아들 태윤이에게 다음과 같은 값진 메시지를 남겼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가 태윤아! 엄마랑 아빠는 소중한 우리 태윤이의 첫 생일을 맞이해 돌잔치 대신 짐바브웨 '포스코 어린이 센터'에 있는 형, 누나의 손을 잡아 주기로 했단다. 앞으로 인류, 국가, 사회 그리고 이웃을 위해 큰일을 하는 어린이로 자라나거라."
엄마 염은애 씨는 첫 아들에게 이같이 감동적 공공의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주례할 때마다 축복의 메시지에서, 첫 신랑 아담이 첫 신부 이브를 보자마자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기쁨의 탄성이 갖는 깊고 심오한 뜻을 축복 선물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브를 보자, 감동한 나머지 그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뼈 중의 뼈'라는 표현은 뼈아픈 고통을 함께 나눌 동반자란 뜻이고,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은 육체의 쾌락을 함께 나눌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하나 된다는 뜻은 동고(同苦)와 동락(同樂)을 함께하는 동반자란 뜻인데,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동고와 동락의 순서에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동락이 앞장서겠지만, 결혼하는 순간부터는 동고가 동락을 이끌어야 합니다. 동고의 그릇에 동락이 담겨질 때에야 비로소 부부가 감동적인 기쁨을 영원히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지요. 중요한 것은 동고 없는 사랑에는 감동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젊은 엄마는 말도 못하는 한 살배기 아들에게 동고의 복음적 사랑을 벌써부터 실천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 축의금 전부를 기아대책 본부에 기부한 것이지요. 참 훌륭한 '예수따르미'지요.
이 동고의 사랑은 바로 아빠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것은 바로 갈릴리 예수의 삶에서 육화되어 구체적으로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나타났습니다. 온갖 치유 선교와 밥상 평등 공동체 운동이 바로 그 동고 사랑의 실천 운동이었습니다. 동고 사랑은 나누고, 비우고, 내려놓고, 우아하게 패배할 수 있는 참 여유 있는 사랑입니다.
동고 사랑을 함께 나누는 분들은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의 기쁨보다, 양보하고 사양하고 심지어 멋있게 짐을 짐으로써 서로가 갖게 되는 기쁨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나라의 싹이 돋아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동고의 사랑이야말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열쇠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공공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내가 젊은 엄마의 동고 사랑 실천에서 시원한 가을바람을 더운 한여름 가운데서 느끼듯 말입니다.
둘째 얘기는 1980년 어느 더운 여름 남산 지하 2층에서 제가 느꼈던 감동입니다. 저는 그때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남산 지하 2층에서 갇혀 지옥 심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지요. 그해 5월 12일 어머님께서 소천 하셨고, 상가에는 여러 성직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이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는 이들이 시끄러운 상가에 모여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해 내란을 음모했다고, 이분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지요. 공개된 상가에서 내란을 음모했다니…. 여하튼 저희들은 5월 17일 밤늦게 일망타진당했지요. 우리의 행방은 한 달가량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미 총살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알려진 계기가 바로 6월 중순에 생겼습니다. 그때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저를 심문했던 정보부 요원들이 모친상의 상주였던 저의 형을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계신 형의 집을 찾아간다기에 나는 그들에게 내가 친필로 쓴 편지를 아버님께 보내고 싶었습니다. 한 달 전 아내를 잃은 아픔과 둘째 아들의 행방을 몰라 슬퍼했던 아버님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저는 쪽지 편지를 아버님께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거절했지요. 참으로 서운했습니다.
그들이 형님을 조사하고 돌아오면서 저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버님의 친필로 쓰신 편지이겠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그 쪽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삼 2~4절)
아버님께서도 자식이 살아 있음을 아시고 친필로 간단한 편지를 쓰고 싶어하셨는데 조사 요원들이 허락하지 않자 성서의 이 말씀을 아버님의 메시지로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쪽지의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쪽지를 2000년 전 사도요한이 쓴 편지로 읽기보다는, 1980년 6월, 자식의 일로 노심초사하셨던 아버님의 친필 사랑 편지로 읽었습니다. 그 어려운 한국의 '사자 굴' 속에서 죽지 않고 믿음과 소망을 깊이 간직하면서 그 시련을 감당해 내고 있음에 아버님은 감사하셨습니다.
바로 아버님의 그 감사와 기쁨을 성서 말씀을 통해 저에게 전달해 주셨습니다. 혹시 내가 시련을 이겨 내지 못할까 노심초사하시면서 설령 내가 좌절하더라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아버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예수 안에서 그 진리를 행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아버님의 간곡한 뜻도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부친의 사랑과 격려가 바로 아빠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따뜻한 사랑의 격려로 다가왔습니다. "아, 부활의 주님께서 사자 굴에 갇힌 우리들과 동고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저를 그렇게 눈물 흘리도록 감동을 준 이 요한3서의 말씀은 한국교회, 특히 초거대 교회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소중히 여기는 성서 메시지입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이 말씀을 '3박자 축복'의 말씀으로 확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라고 역설합니다. '개인의 영적 축복', '개인의 만사형통', 그리고 '개인의 육체 건강'을 보장해 주는 복음의 축복, 곧 순복음의 핵심 축복으로 더 높입니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여기에는 공공적 감동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진리가 주는 자유의 기쁨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사랑, 공의, 평화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종말론적 확신과 환희가 없습니다. 만물이 새롭게 되는 기쁨이 없습니다. 나사렛 선언(Nazareth Manifesto)의 해방 메시지, 곧 희년 메시지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공적 감동, 새 인간, 새 역사, 새로워지는 만물에 대한 감동과 기쁨이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 주며, 자기를 낮추어 남을 높여 주며, 자기는 죽어도 남을 살려 내는 예수의 아름다운 실체가 없습니다. 자기는 십자가 지며 처참하게 패배하면서도 무지한 폭력의 권력을 용서하셨던 그 사랑이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 관계를 근원적으로 없애버리는 사랑의 감동이 없습니다. 그리하면 모두가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진리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이 여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세 번째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951년 여름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62년 전 일입니다. 아버님과 저는 시외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철길의 침목을 밟으며 함께 걸었습니다. 퍽 낭만적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철길을 신나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인지 철도 역직원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아버님의 멱살을 잡고 얼굴에 폭행을 가했습니다.
중학생 아들 데리고 철길의 침목을 밟고 걷는 것이 심각한 범죄는 아닐 터인데 그들은 아버님에게 거침없이 폭행을 가했지요. 저는 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흐트러짐 없이 조용히 맞기만 했습니다. 그때 아버님은 학교 교감 선생님이셨지요. 한마디 저항이나 변명도 하시지 않고 조용히 철길에서 내려오셨지요. 너무 분해하는 저의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조용히 걸어가셨습니다.
내 손을 꼭 잡아 주실 때 저보고 '분하게 여기지 말아라'고 타이르는 듯 했습니다. 이때 나는 아버님의 그 무력함과 그 점잖음에 화가 나 있었지요. '내가 뭘 잘못했소. 아들 앞에서 이렇게 폭행해도 되는 거요. 당신 어디서 무엇 하는 사람이기에 교육자에게 함부로 폭행하는 것이오'라고 강하게 대응하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의 철이 조금 들기 시작하고, 신학도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의 실천과 고난의 삶을 조금 더 가슴으로 만나게 되면서 아버님의 그 무력함이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맥없이 제사장들의 졸개들에 의해 체포되어 조용히 끌려가시고, 로마 군인들의 비웃음과 채찍질을 말없이 당하시는 예수님을 멀찌감치 훔쳐봤던 제자들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시는 예수님 모습 보고 제자들은 더더욱 절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라 이해했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모든 처참한 광경을 목도했던 사형 집행관 로마 백부장은 놀라운 고백을 쏟아 냅니다. 그는 로마 황제만이 진짜 유일신이요,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로마제국의 핵심 군 장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십자가 처형의 집행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선언했지요.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막 15:39)
이 같은 고백과 선언은 엄청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감히 국가 반역죄에 해당하는 발언을 한 것이지요. 로마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참칭(僭稱)했다고 하는 제사장들의 거짓 고소를 받아들여 예수를 사형시켰는데, 그 처형당한 피고인을 진정한 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으니, 그는 대단한 실수를 했지요. 아마 그도 이 고백으로 십자가 처형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반역적 발언에 더하여 항복의 선언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제국의 장교로서 로마의 막강한 군사적 패권과 법률적 지배권이 처참하게 처형당한 예수님 앞에서 항복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예수의 승리는 사흘 후 부활 사건으로 확인됩니다. 로마의 거대 권력을 무릎 꿇게 한 예수 사랑의 힘은 결단코 로마의 힘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로마의 폭력과 전혀 다른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초대교회와 기독교의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 예수따르미의 올바른 정체성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폭력, 독선 그리고 탐욕의 세력과 맞설 때 승리에만 눈이 멀게 되면 심각한 모순이 나타납니다. 악의 세력을 이기려고 악이 즐겨 사용하는 수단을 채택하는 순간, 힘으로는 이길지 몰라도 바로 이기는 순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의 수단, 곧 폭력과 독선의 수단을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악의 졸개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힘으로 보호하겠다고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를 주님은 준엄하게 나무라신 것입니다. 칼로만 원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원수의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칼로 원수의 피를 흘리게 하는 순간 악의 똘마니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 순하디순한 어린양처럼 골고다의 길로 조용히 십자가 지시고 '바보'같이 무력하게 가셨는지를 우리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51년 여름 저는 아버님의 그 무력함의 뜻을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6월 아버님이 보내 주신 쪽지의 성서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무한히 무력한 듯해도 근원적으로 막강한 감동의 선한 힘입니다. 이런 감동의 힘이 공공적 힘이기에 새 역사, 새 구조,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을 세워 가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당부대로 우리는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교회가 우뚝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공공의 마당, 감동의 마당 중심에 서서 변화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교회는 감동의 복음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 안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 권면의 말씀을 깊이 새겨보고 싶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되씹어 보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빌 4:4~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열쇠 말(Key word)은 '관용'입니다. 이 말의 그리스어는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입니다. 이 단어는 쉽게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인내, 친절, 부드러움, 겸손, 화합, 절제, 관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을 사랑의 본질적 성격으로 지적했던 바울로서는 에피에이케이아를 바로 그 사랑의 다른 표현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에피에이케이아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kindness'나 'gentleness' 또는 'forbearance'를 사용하는데, 이 중에서 'forbearance'가 본문에 더 가까운 뜻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피에이케이아를 우리말로 '관용'이라고만 번역한다면 그 깊은 뜻이 사뭇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듯합니다.
우리말 본문의 '관용(epieikeia)'이라는 단어를 'forbearance'로 보아 뜻을 음미해 본다면, 이것은 법과 규칙 이상의 따뜻한 마음, 곧 인내로 배려하는 마음, 자기의 법적 관리 행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을'의 딱한 입장을 배려해서 그 권리를 '갑'의 입장으로 행사하지 않는 마음을 뜻합니다.
약자의 어려운 입장을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易地食之)하는 따뜻한 마음이지요. 채권자가 채무자의 딱한 사정을 배려하여 그의 법적 권리를 유예하는 넉넉한 마음이지요.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채무 자체를 탕감해 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우리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듯,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기도의 뜻이 바로 이 관용의 마음입니다.
교회가 에피에이케이아 곧 오래 참고 온유하며 약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예수 복음의 본질이 꽃피게 되는 것이지요. 에피에이케이아는 규칙과 법보다 더 따뜻하고 더 감동적인 변혁의 동력이 됩니다. 컵에 물을 정말 꽉 차게 부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물이 철철 넘쳐도 된다고 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동고의 사랑은 교회라는 컵에 사랑의 물을 철철 넘쳐흐르도록 부으면서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들어 내는 감동적인 변화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랑보다 더 진보적인 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의 힘만이 오늘과 내일을 더 밝게, 더 맑게 향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평화와 공의의 새 질서를 만들어 내면서 독선과 폭력이 들어설 자리를 처음부터 사라지게 하는 힘입니다. 마치 원수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힘이 원수를 사랑하는 결단과 실천에서 나오듯 말입니다.
애자무적(愛者無敵)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이런 사랑만이 감동적인 공공의 동력, 참 변혁의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새길 공동체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깜빡 잊는 순간 새길은 헌 길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가슴 아프게 보면서 바울이 가슴으로 온몸으로 토해 낸 그의 권면에 새삼 다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깊이를 새삼 가슴으로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 교회에 이 같은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지 말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2:31~13:7)
한완상 / 새길교회 신학위원,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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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자살'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한 신학적 문제 제기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뜻은 무엇일까? 카인은 아벨을 죽였고(창 4:8),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일 뻔했다(창 22:10).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한다(삼상 18:7). 성서 속의 이 무수한 살인들은 정당한 살인인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은 어떤 살인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경우인 누군가를 고의로 죽게 하는 행위가 그 첫째일 것이다(민 35:21). 더 나아가서, 오래전 부족 동맹 시절의 이스라엘 때부터 유래했던 '피의 복수'를 통한 살해(vendetta, 민 35:25)도 부당한 살인에 해당한다. 또한 '명예 살인' 전통(창 38:24)도 금지되어야 할 살인이었다.
요시아 왕(재위 641~609 BCE)이 법을 반포할 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중에게 알아듣기 쉽도록 만들어 포고한 십계명1)에서 '살인 금지령'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은 필경 이런 함의-고의 살인, 피의 복수 살인, 명예 살인 등의 금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살인죄를 엄단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과실치사 범죄자는 죽임을 면해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의 복수로부터 구출해 주는 것이다(신 4:41). 또한 가해자가 명료하지 않은 살해의 경우, 그 사건을 둘러싸고 가문 간에 벌어질 수 있는 피의 복수를 막는 것도 필요했다. 하여 공식적으로 그 사건은 누구도 책임이 없음을 공시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했다(신 21:1~9). 반면 존속살해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했다(신 21:18~21).
여기서 보았듯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령은, 간단한 듯하지만, 실은 그 내막에는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있었다. 요시아 정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위에서 본 것처럼, 십계명의 간단한 문구와는 달리, 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엔 여러 변수들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훨씬 더 복잡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계명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계명과 더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것들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누군가를 죽게 하는 일은 불행한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 이의가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결코 관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존엄사'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낙태'의 문제도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나아가 사람들과 인격적, 감성적 친밀성을 교류하는 반려(伴侶) 존재의 생명권의 문제도 제기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반려 동물과 반려 식물, 그리고 최근에는 인조인간을 의미하는 안드로이드(Andriod)의 생명권2) 등이 고려의 대상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자살'도 오늘의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자살을 '공격성이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일종의 전도된 살해'라고 말했다.(<무의식에 대하여> 중 '슬픔과 우울증') 또한 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자살'을 '자기 살해'의 관점에서 보면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령을 어긴 행동으로 간주했다. 이런 자살 반대 교리 탓에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이 자살자들의 장례 미사 혹은 장례 예배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자살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성서의 '살인 금령'에는 자살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에 묘사된 대표적인 자살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죽임당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삼상 31:4). 삼손은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려 무수한 블레셋인들과 함께 그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다(삿 16:29~30). 또한 예수 운동은 처음부터 무수한 순교자들과 더불어 발전했는데, 순교자 신앙은 권력에 의한 타살을 자발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자살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살들이 살인 금령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스카리옷(가룟) 유다의 자살(마 27:5) 같이 성서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자살도 있지만, 그때에도 자살은 그이가 지은 죄의 당연한 귀결이지 자살 자체를 살인으로 간주하여 비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성서에서 자살은 살인 금령과는 무관했다.
자살을 살인으로 해석하여 자살 자체를 '잘못된 행위'로 비판했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5세기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그는 자살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음을 강변했던 것이다.
한데 그가 자살을 비난한 맥락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로마 황제와 로마 교회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반로마 기조와 결합되어 열렬한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요컨대 이른바 도나투스 논쟁의 내막에는 로마에 의해 혹독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대중의 반로마 감정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열광적 도나투스파 사제들은 순교를 불사한 반로마 항쟁을 부추겼고, 무수한 대중이 이에 호응하고 있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 사제들이 주장한 순교를 자살이라고 격하했고, 자살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가 아니므로 신의 구원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제국과 교회는 도나투스 운동과 그 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을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살 반대론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공격의 의미를 넘어서 신학적 일반론으로 격상되었다. 하여 이제 자살 문제는 자기 살인으로 해석되었고, 자살자는 교회의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리는 잘못 자리 잡은 교리다. 이 교리는 정치적 야바위에 다름 아니고, 그 대가로 자살의 사회적 현실은 망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여 교회는 자살을 단행한 사람들의 고통, 자살할 만큼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3)
이제 신학은 자살에 대해 다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각해 버린 그 현실을 탐구하고, 그 속에 담긴 대중의 고통을 대면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유다국의 요시아 정부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을 이야기할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자살의 문제를, 그리고 교회가 망각하고 폄훼했던 자살의 문제를 보다 현실감 있고,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신학으로 발전시켜 내야 한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단연 1위다. 요컨대 자살은 한국 사회의 살인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니 자살을 신학화하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먼저 15~64세 경제활동인구의 경우 자살자 비율이 우리나라는 OECD 평균의 2배, 65세 이상은 4배나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이를 좀 과장하면 자살은 개개인의 자기 살해 현상을 넘어서, 사회적인 집합적 충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큰 맥락에서 사회의 추이를 살펴보자. 1980년대는 민주화의 열망이 전 사회를 휘몰아쳤다. '1987년'은 민주화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실현되어 가는 가능성,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질서가 중요하게 작동하였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시간이다. 하지만 그 10년 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난폭하게 휘말려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집단적 가치가 유효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때 우리 사회를 뒤흔든 것이 이른바 '부자 되기 열풍'이었다.
이제 전 국민은 '부자 되기 경제학', '부자 되기 심리학'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노동과 휴식 시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재테크에 열을 올렸고, 모든 여력을 있는 대로 다 가동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했다. 남들이야 어찌 되든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이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서바이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MB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부자 되기 열풍의 절정을 보여 준다. 이제 도덕도 가치도 필요 없고, 단지 부자가 될 수 있는 길만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 5년 사이 이러한 열풍은 절망으로 전도되었다. 그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거친 뒤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현재를 살아갈 힘도, 노후를 기대할 희망도 몰락했다. 비정규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일터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한 공포, 가족해체의 공포, 질병의 공포, 빈곤의 공포 등등, 온갖 공포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생존'에 대한 공포다. 사회는 공포에 민감해졌다. 그러자 사회적 공포감에 기생하는 시스템이 발전한다. 매스미디어는 각종 안보 파산의 공포를 유포시켰고, 보험사는 건강과 재산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고, 심리상담가들은 정신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으며, 종교는 세계 파멸의 공포감을 유포시켰다.
공포는 존재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자살 증후군은 바로 이런 '서바이벌의 종언'과 함께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여 자살은 곧 '사회적 타살'의 결과이며,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저주의 사회는 '생명 파괴의 세계'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미주
1) 요시아 왕이 법을 반포할 때, 열 개 계율의 묶음인 ‘십계명’을 처음 반포하였다. 법은 문서 형식의 통치 체계를 수반하는 것인데, 대중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법의 통치를 실효성 있게 실현하기 위해 간명한 형태의 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2) SF 영화의 고전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는 안드로이드의 생명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3) 교회의 자살 금지 교리는 자살한 자에 대한 야만적인 시신 훼손의 관행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하여는 게르트 미슐러(Gerd Mischler)가 쓴 <자살의 문화사>를 보라.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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