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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가수다 2’ 가수왕 소향 / 힐링(healing)의 시대
    2013-02-14 20:24:25   read : 574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소향 “지경이 넓어진 것이지, 노선 바뀐 건 아니에요”

    [인터뷰] ‘나는가수다 2’ 가수왕 소향

    ▲소향은 ‘나가수’에 출연한 가장 큰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했다.ⓒ신태진 기자

    2012년은 소향에게 가장 뜨거웠던 한 해였다. 사람들은 소향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호소력 짙은 음색에 매료됐다. MBC ‘나는가수다’(나가수)에서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단숨에 ‘가수왕’을 차지했고, 한 해 최고의 가수를 가려내는 ‘나가수2-2012 가왕전’에서도 3위를 기록했다.

    소향은 CCM 가수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힌다는 특별한 사명을 갖고 ‘나가수’에 도전했다. 대중가요도 그녀의 내면에서는 ‘CCM화’됐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꿈과 희망을 전하자’는 마음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향은 크로스오버(crossover)의 성공이 부각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었던 것 뿐이지, 성공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던 때도 있었지만, 그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지난해 누구보다도 행복했고 큰 깨달음을 얻었던 소향을, 송도 쉐라톤호텔에서 만나 ‘나가수’ 출연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신앙생활에 대해 물었다.

    -‘나가수’ 출연으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무엇입니까.

    “제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CCM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가운데 전해야 하는 것임을 알았어요. 가장 큰 결실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콘서트 사연을 올리는 게시판에서, 절망 가운데 있다가 제 공연을 보고 다시 희망을 찾았다는 분의 글을 봤어요.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분도 계셨어요.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에요.”

    -‘나가수’에서 아쉬운 점도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경합이라서 제 음악 스타일을 다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죠. 음악도 극적으로 편곡할 수밖에는 없었어요. 저는 잔잔한 음악과 빠른 음악도 해보고 싶었는데,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만족합니다.”

    -신앙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변했는지 안 변했는지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판단하시겠죠. 변함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으며, 이 길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임이 확실하다는 것이에요. 지경이 넓어진 것 뿐이지, 노선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제 신앙의 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에요.”

    -CCM과 대중가요의 크로스오버를 생각하는 찬양사역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은.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요. 세상의 악한 것들도 가만히 놔두지도 않죠. 세상에 가서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과감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크로스오버의 성공이 목적이어선 안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해요.”

    -평소 묵상하는 성구가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4절(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말씀을 늘 생각해요. 저희 팀이 포스잖아요. ‘나가수’에 출연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팀원들이 큰 힘이 됐고, 한 마음으로 도와웠어요. 진짜 서로 용납하고 하나되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세요. 이를 토대로 앞으로의 사역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세상이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살래요.”

    -새해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해외 진출을 위한 기반 확보와 앨범활동에 힘쓰려고 해요. 그리고 틈틈이 소설도 써왔는데 곧 출간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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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건축 논란 빌미로 ‘48시간 내 사임’ 압박받아”

    주일예배서 논문 문제에 대해 심경 밝히던 중 언급



    ▲주일예배에서 이번 논란과 관련해 심경을 전한 오정현 목사가, 성도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생방송 화면 캡쳐

    최근 논문 표절 논란에 휘말린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10일 주일예배에서 심경을 밝혔다.

    오 목사는 미리 적은 글을 읽으며 “지난 주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간 저에 관한 글을 읽고 많은 성도가 큰 충격을 받았다”며 “사건의 진위와 상관 없이 제 일로 우리 교회 성도들과 한국교회에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 논문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 시절 안식년을 얻어 온 식구와 함께 남아공에서 남가주사랑의교회에서의 제자훈련 목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며 “작성 과정 중 참고 문헌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일부 미흡했던 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오 목사는 “저는 하나님 은혜 밖에 의지할 게 없는 미물 같은 맛�”라며 “십자가 보혈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다. 최선을 다해 사역해도 모자람이 있다. 그 동안 저로 인해 마음에 아픔이 있는 분들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고 전했다.

    한편 오 목사는 “제게 직접 찾아와 이 문제를 제기한 분이 ‘건축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것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면 논문 문제는 덮겠다’고 하면서 ‘48시간 내에 사임하지 않으면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며 “매우 놀랐고 사임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당회가 대책위를 구성해 진지하게 논의할 예정”이라고 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사랑의교회는 여러 난관과 의혹을 극복하며 올 9월 새 예배당 완공을 앞두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새 예배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앞으로 가능한 한 대외 사역을 내려놓고 말씀사역과 목양, 그리고 건축 마무리에 전념하겠다. 다시 한 번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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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현 목사 사임 건 엄정하게 논의하라"

    기윤실 성명, 오정현 목사 논문 표절 연루에 "통탄"…정관에 따라 이사직 처리하기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박은조·백종국·전재중·임성빈 공동대표)이 2월 7일 성명을 내고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논문 표절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기윤실은 기윤실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오정현 목사가 표절 사건에 연루된 점을 사과하고, 오 목사의 이사직을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윤실은 오정현 목사가 논문을 표절한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백종국 교수(경상대)는 "기윤실이 그동안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했는데, 기윤실 임원이 여기 연루되어 안타깝다. (오정현 목사 본인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리 운동을 펼친 단체로서 소속 임원이 비도덕적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성명은 여느 성명과 달리 홍정길 이사장 이름까지 표시되어 있다. 임원의 거취 문제를 다룬 만큼 이사회 전체가 성명 내용을 검토하고 동의해서 발표했다. 인사 처리는 이사회와 오는 3월 4일 열리는 총회를 거쳐야 확정되지만 사실상 절차만 남았다고 볼 수 있다.

    기윤실은 사랑의교회도 오정현 목사의 사임 문제를 엄정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사건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사랑의교회의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기윤실은 사랑의교회가 당장은 고난과 아픔을 겪더라도 온전한 회복을 할 수 있는 결정을 하길 기원했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이다.

    오정현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표절 문제에 대한 기윤실 입장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은 오정현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표절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힙니다.

    1. 사랑의교회 당회에서 구성한 '오정현 담임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의혹 관련 당회 조사 위원회'의 조사 보고서와 관련된 보도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논문의 표절 혐의는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오정현 목사가 이사로 활동해 온 기윤실은 본 단체의 임원이 논문 표절에 연루된 사건을 접하면서 깊은 통탄과 함께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온 단체로서 송구하고,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2. 이에 기윤실은 정관에 따라 오정현 목사의 이사직에 대한 처리를 이사회와 총회를 통해 공명정대하게 밟을 것이며, 향후 임원을 선출하는 데 있어 이번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3. 이번 사건은 이미 교계는 물론 일반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교계와 사회에서는 한국교회를 대표해 온 사랑의교회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오정현 목사의 행위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게 때문에 더욱 오정현 목사와 사랑의교회를 위하여 고언을 드립니다.

    사랑의교회 당회는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에 기초하여 오정현 담임목사의 사임 건을 엄정하게 논의하실 것을 요청 드립니다. 지금은 고난과 아픔을 겪겠지만 온전한 회복을 통하여 사랑의교회가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지도록 거룩한 결단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아울러, 한국교회에도 호소합니다. 비단 이 문제는 사랑의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사건은 목회자 청빙 시에 박사 학위를 요구하는 등 한국 교회 내에 만연한 학력 인플레이션 풍조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됨을 포기하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저희 기윤실은 이 부분에서도 하나님과 사회에 용서를 구하는 죄인의 마음으로 먼저 회개하고, 개선하여 나가는 운동을 펼쳐 나가겠습니다.

    2013년 2월 7일(목)(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홍정길 공동대표 박은조 백종국 전재중 임성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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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사 논란 겪었던 이성은 자매 소천



    ▲(왼쪽부터 순서대로) 이만호 목사, 故 이성은 자매, 이진아 사모.

    존엄사 논란 끝에 지난해 11월 21일(이하 현지시각) 퇴원했던 이성은 자매가, 10일 저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성은 자매는 퇴원 이후 부친 이만호 목사(뉴욕 순복음안디옥교회)의 집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아오다, 10일 오후께 호흡이 크게 나빠져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

    이만호 목사와 이진아 사모는 존엄사 논란으로부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성은 자매를 자택에서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해왔었다. 이성은 자매는 가족들과 교계의 도움으로 존엄사 논란에서 벗어난 지 3달 가량, 많은 이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보여줬다.

    장례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오는 14일(목요일) 순복음안디옥교회에서 천국환송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또한 뉴욕 교계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에 뉴욕교협장으로 치르는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이 자매의 아버지 이만호 목사는 “(딸이) 몇 개월을 더 살면서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며 “성은이가 가족들 모르게 많은 선교지를 지원하고 많은 이들을 섬겼다는 것을 간병 중에 알게 됐다.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많이 했기에 슬픈 마음보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고 말했다.

    또 이만호 목사는 “성은 자매가 에디오피아 선교, 남아프리카공화국 선교, 중국 선교에 힘쓰고 자신의 구좌에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많이 지원한 것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뿌듯했었다”며 “비록 짧은 인생을 살고 갔기에 안타까운 마음은 있지만 오히려 목회자인 저보다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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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healing)의 시대

    믿음으로 오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큰 가치와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 힐링의 중요한 근본 대책
    김홍섭 (ihomer)

    힐링(healing)의 시대

    요즘은 '힐링(healing)'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상의 하나이며 대세라 할 수 있다. 각박한 세상이 던지는 치열하고 살벌한 공격을 이 악물고 견디기만 하다 보니 사람들 마음마다 크고 작은 병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실컷 울어 버리면 그나마 응어리가 풀리고 숨통이 트이겠건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도처에서 힐링을 이야기하며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TV 프로그램에서도 힐링, 숲에서도 힐링, 걷기에도 힐링, 캠핑과 음식에서도 힐링이 주요 테마이자 목적이 되고 있다.

    힐링의 역사는 실은 매우 오래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도피처나 중세의 수도원 등은 물론이고, 불교의 하안거(夏安居)나 동안거(冬安居) 등도 수련과 자기 연마를 겸한 치유와 힐링의 공간이며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세나 정쟁의 공간을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우리 선비들의 정신과 여유도 다른 형태의 힐링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힐링이 필요한 것은 그만큼 우리가 상처 받고, 스트레스 받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하며 동시에 병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니면 우리의 체력이나 정신력 더 나아가서 변화와 경쟁에 대응하는 우리의 대응력이 약화된 것을 반증하기도 할 것이다. 실은 우리 사회가 더 복잡하고 다원화되고 속도와 경쟁을 강조하는 급변하는 사회로 구조적인 변화를 한 점에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일 것이다.

    문명의 이기로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더 많은 것에 신경을 쓰고,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고 우위를 차지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야말로 경쟁과 변화에 적응해야하는 것이 쉴 틈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로 우리 주변에 힐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래의 뉴스를 보더라도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과 더불어 소위 우유 주사로 불리는 프로포폴 투약 사건 등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힐링의 방법으로 '프로포폴'이라는 약물을 선택한 것이라 한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0% 이상이 겨울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스트레스와 상실감 소외감 고독감 그리고 삶의 무의미성과 허무감 등은 인간의 마음을 아프고 우울하게 하며 병들게 한다. 이들에게 진정한 쉼과 힐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다양한 힐링의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걷는 일은 힐링의 중요한 방법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국내의 여러 올레길, 둘레길이 이미 중요한 힐링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행과 새로운 아름다운 공간에 여유를 가짐으로써 힐링을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래 '올레 길 걷기' '에코 힐링캠프'나 '해오름달의 초대' 또는 숲과 정원의 체험, 대화와 춤과 와인 등을 통한 힐링 등 다양한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다.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을 걷거나 편백나무 숲을 걷고, 산길을 걷고 숲에서 명상을 하며 도시에서 생채기 난 마음을 달래고, 서로를 돕고 이해하는 만남을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서로 힐링하는 방법들이 제안되고 있다. 자연을 주제로 한 다양한 치유와 힐링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음식과 식사를 통한 힐링과 치유도 중요한 방법이다. '힐링 레시피'도 한 방법이다. '싱싱하고 좋은 제철 재료를 사러 나가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고, 어울리는 접시를 골라 음식을 담아내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식탁 앞에서의 시간'은 좋은 힐링의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울할 때 단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듯 감미로운 맛과 향으로 아침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줄 특히, 우울한 날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시나몬 토스트, 메이플 고구마 수프 등 다양한 힐링 레시피들이 제안되기도 한다.

    음악을 통한 힐링과 향수와 미술 등을 활용한 심리 치료와 힐링이 발달하고 있다. 첼로 연주 듣거나 편안할 느낌을 주는 실내약이나 가곡 등 음악 치유는 오랜 경험과 이론 틀을 갖고 있다. 가장 간단하고 저렴한 힐링으로 목욕이나 영화, 연극 등 예술 작품의 관람 등도 중요한 힐링의 방법으로 권고된다.

    더욱 근원적인 힐링은 우리의 본연의 자아를 발견하고, 인생의 목표를 바르게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는 것일 것이다. 과도한 욕심이나 망상을 버리고 지나치게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삶의 방식을 견지하고 동시에 이웃과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나 조직은 바른 규정과 경쟁의 룰(rule)을 정하고 잘 운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신앙을 갖고 더 근원적인 믿음으로 오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큰 가치와 미래를 지향하는 것도 힐링의 중요한 근본 대책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오히려 남을 돕고 나누는 것이 더 빠른 치유임을 가르치고 있다.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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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 되기를 망설이는 이유

    필립 얀시, <수상한 소문>



    ▲ <수상한 소문>/ 필립 얀시 지음 /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398쪽 / 1만 3800원

    유명한 교회 지도자들의 비위, 몰상식하고 몰염치한 행태로 세상이 소란하다. 워낙 고질적인 일이지만, 이쯤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 돌에 사람들이 숱하게 걸려 넘어진다. '예수 믿어도 이 정도밖에 못 된다면, 기독교를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는가?' '교회를 진리의 담지자라고 할 수 있나?'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는가?' 실천적 영역에서의 의구심이 믿음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적당히 봉합하고 가기에는 그 내상이 깊고 오래되었다. 확신에 찬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진 상황인 고로, '들레는' 큰 소리, 확신에 찬 목소리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런 때는 필립 얀시를 펴 읽는다. 그래도 복음주의권에서는 가장 솔직한 작가 아니던가. 한동안 '교회의 해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겪어야 했을 정도로, 인종차별에 동조하던 미국 남부 근본주의 교회에서 자란 그다. 청소년기에 참석한 부흥회에서,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강사의 거듭되는 요청(또는 협박)에도 회개하지 않은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끝내 자리에서 버틴 이력의, 강단 있는 얀시다.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여전히 신앙의 순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동질감도 은근히 느껴지게 하는 이 사람이라면 뭔가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해 줄 것 같다.

    <수상한 소문>은 이런 얀시가 '믿음의 이유'에 대해 쓴 책이다. 허블 망원경과 인터넷이 주름잡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인지, 현대 문명이 삶의 근본 원리를 다 파악했는지, 아니면 뭔가 중요한 요소를 빠뜨렸는지 제대로 확인해 보자는 것인데, 체계를 세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전수하려 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과학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수상쩍은 소문들

    그는 먼저 우리 주위의 보이는 세계, 우리 모두가 사는 세상에서 출발한다. 사실, 강경한 진화 생물학자들을 비롯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적 환원주의자들이 득세한 세상이지만, 얀시는 이러한 환원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수상쩍은 징후들을 본다.

    초월적 세계의 '흔적', 또는 '소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혹시 지상의 모든 진리와 아름다움, 선함과 쾌락은 그 너머 영원한 무엇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닐까? 초자연계를 부인하는 사람들조차 자연계를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신성의 대용물' '가짜 무한', 다시 말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역설적으로 초월적 세계에 관해 증언하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오늘의 세계에서 한없이 부풀려진 '성'과 같은 것들 말이다.

    성(性)은 오늘날의 가짜 무한들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다.…스포츠 전문지인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목욕하는 미인들의 사진 아래 '여신들'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여성 속옷업체 빅토리아 시크릿은 슈퍼 모델들에게 천사 의상을 입힌다. 이전 세대는 순결과 금욕을 칭송했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섹스를 지고의 선(善)으로 제시하고, 광고업체들은 성을 미끼로 컨버터블, 콜라, 치약 같은 것들을 팔려고 애쓴다. 에이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오랜 친구'에는 한 남자가 임종을 앞둔 동성 연인을 돌보는 장면이 나온다. 내레이터가 "죽은 후에는 어떤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들은 "다시 섹스를 하게 되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그들의 영원한 이상이었다. 그러나 중세인들 대부분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됩니다(43~45쪽)."

    얀시는 예의 그 솔직한 자세로 세상의 좋은 것(아름다움, 사랑과 성)과 좋지 않은 것(고통, 죄와 죄책감)을 망라한,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초월 세계의 흔적을 찾아 나간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소문이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물론 죄로 망가져 뒤죽박죽이고, 그다지 하나님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더욱이 그 소문은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들린다. 하지만 이 두 세계는 서로 연대해 어떠한 일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 일에 함께하라고 부르고 있다.

    얀시 스타일 기독교 변증

    얀시는 열성적인 복음 전도자도, 진리를 수호하려는 의지에 불타는 신학자도 아니다.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때때로 의심에 허덕이고, 어릴 때 교회에서 겪었던 나쁜 경험에서 '회복 중인'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다. 그 때문에 자칫 크리스천이 간과하기 쉬운 교회의 맹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저널리스트로서 일하며 잡학(雜學)과 다식(多識)을 쌓았고, 수많은 사람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현장에서 청취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는 감각을 지녔다.

    무엇보다도 특유의 솔직하면서도 삐딱한 태도를 모판 삼아 구애됨 없이 자유로운 사고를 펼칠 수 있었다. 보통은 교리적 지식으로 투철하게 무장한 사람들조차 교회에서 통용되는 말이 아닌 일반인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을 어려워하는데, 선한 창조와 타락, 구원의 이야기를 기독교 용어를 쓰지 않고 풀어내는 얀시의 글쓰기는 기독교 변증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선물과 우상 사이에서

    "어느 날,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아마 내 친구들도 같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다가올 더 나은 삶의 단서라도 맛보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연적인 욕구가 초자연계에 유해한 원수가 아니며,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기쁨의 길을 찾기 위해 나의 욕구를 별세계의 그 원천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었다(49~50쪽)."

    이 책을 변증서로 볼 때는 우수리 성격의 것이지만, 이 책 곳곳에서는 세계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곳곳에서 번득이는데, 특히 모든 사람이 관심을 쏟는 돈과 권력, 섹스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는 병적인 탐닉과 과도한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현실적이면서도 지혜로운 통찰을 제공해 준다(5장).

    양서류 그리스도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은 '페리그리니', 즉 지상에 거주하는 이방인이며, 얀시 식으로 말하면 양서류이다.

    "나는 내 자신을 물질계와 영적 세계, 서로 다른 이 두 환경에서 살아가는 양서류로 생각하는 것이 열쇠임을 알게 되었다. 물질계에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숨을 쉰다. 반면, 영적 세계의 호흡인 기도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잘생긴 사람이나 이웃의 새 스포츠카는 그냥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음식을 구걸하는 문구가 적힌 푯말을 든 노숙자나, 길 건너 남편 없이 장애 아이와 홀로 사는 여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297쪽)."

    이러한 시각은 사후 세계의 천국만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이 담고 있는 신비와 가치를 볼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막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이들이라면 불완전한 이 세계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통합하여 사고하고 꽉 차게 살아 내기 위한 균형 잡힌 세계관을 수혈 받을 수 있겠다. 물론 그 같은 시각을 내면화해 살아 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강영특 / 포이에마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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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석천 씨, 하나님은 아직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동성애자 출신 이요나 목사의 SBS <힐링캠프> 방청기



    ▲홍석천 씨(위)와 이요나 목사.

    5일 아침 인터넷 뉴스를 여니 SBS ‘힐링캠프’가 홀로 시청률 상승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떴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4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는 전국기준 8.4%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무엇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시원한 일이라고는 코딱지 만큼도 없는 요즘 세태에서 동성애자 홍석천의 개그가 사람들의 무료한 마음을 달래는 위로제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방송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커밍아웃’으로 인한 가장 큰 아픔을 보모님들의 정신적 충격과 고통이라고 술회했다. 이는 나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동성애자의 슬픔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어떤 부모라도 자녀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설득하거나 회복시킬 만한 방법조차 없다.

    나는 홍석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면서, 작고하신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고백을 들으신 어머毆꼈?�,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시고 끝내 목숨을 끊으셨기 때문이다. 아마 동성애자 자녀를 둔 어머니들도 다 같은 심정일 것이라 생각된다.

    홍석천의 눈물 보면서, 나 때문에 작고하신 어머니 떠올라
    당시엔 동성애자 알려지면 치명적… 차라리 그때가 나은 듯
    석연치 않은 ‘동성애 예찬론’ 섞이고 지나친 변명 내포돼

    내가 젊었을 때는 동성애자가 발붙일 곳이라곤 바늘 구멍만큼도 없었다. 노출되면 그 인생은 생매장되는 시대였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부모형제나 친지, 그리고 학교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치명적인 수치요 분노였다. 차라리 살인자나 역적이 더 나은 시대였다. 그래서 우리 때 동성애자들은 커밍아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완전한 이중생활로 살아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숨막히지만, 요즘 동성애가 마치 자랑할 만한 또다른 삶의 덕목이나 되는 것처럼 얼굴을 내는 것을 보면 차라리 옛날처럼 숨막혔던 시대가 오히려 더 도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오늘날은 동성애 문제가 성소수자들의 인권문제로 여론화되어 이제는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동성애를 용인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통해 금기시되던 동성애에 대한 이슈가 이처럼 관대해진 데는 동성애자들의 활발한 활동과 홍보에 있겠지만, 정치적 요소도 한몫 하고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재선에서 동성애 카드로 한몫 챙겼으니 말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동성애는 날이 갈수록 정치계·예술계·경제계를 파고들고 보아야 한다.

    방송 마지막에 사회자는 홍석천에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하는 아이들이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뉴스에서 ‘성적 비관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글귀를 보면 떨린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는 그의 말에 석연치 않은 동성애 예찬론이 포함된 듯하게 들렸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홍석천 씨의 말 속에 동성애자들의 자살이 마음 놓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풍토 때문이라는 지나친 변명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동성애 수치심 때문에 생명을 내동댕이칠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싶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들은 자기 생명과 인생을 소중히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 요즘 청년들이 이런 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제 동성애자들은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애정을 표출할 수 있고, 동성애를 즐길 수 있는 이태원 같은 도시가 조성돼 있으며, 스마트폰과 같은 미디어 매개체를 통해 동성애를 즐길 수 있는 ‘동성애 자유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의 자살 원인은 죄의식… 사회 풍토 때문 아냐
    군대 내에서나 트랜스젠더 자살 많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
    부모 마음 헤아린다면 관련 고민 털어놓고 함께 기도해야

    나는 동성애자들이 자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에게 품고 있는 동성애적 행위가 상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노출되었을 때, 그 수치감과 죄악감으로 오는 자괴감은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상태가 돼 자살 충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한 예로 동성애자들 중 자살율이 높은 경우는 군대 안이나 트랜스젠더들이다.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수술로 인한 자괴감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좋든 싫든 ‘육적 욕구’를 상실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군대에서는 남성들의 세계 속에 자신의 성적 욕구를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주변 동료들에게 사고를 치게 된다. 그로 인해 동성애자임이 드러나고 왕따를 당하게 되며, 수치심과 분노를 참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해야 한다. 성적으로 민감하기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정상적인 청년이 잠자리에서 동성애자에게 희롱을 당했다면 이 또한 견딜 수 없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20대에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었다. 그것은 세상이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학창시절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친구의 애정적 배신(?),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애정을 마음놓고 표출할 수 없는 인생의 상실감 때문이었다. 인생 경험이 많지 않은 청년의 이성으론 감당할 수 없었다.

    동성애자들의 자살은 마음에 연모하던 대상에게 자신의 동성애적 행위가 시도되거나, 상대로부터 치욕적 반응을 받게 될 때 그로 인한 수치감과 상실감은 감당할 수 없다. 또 자신의 성적 성향과 은밀히 시도한 동성애 행위가 노출되면 친한 친구와의 단절은 물론 학교, 직장생활까지 파장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때 겪어야 하는 양심적 수치심과 죄의식은 결국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통해 도망하려는 것이다.

    ‘힐링캠프’에서 홍석천 씨가 말하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메시지는 동성애자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말들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또 그는 동성애 성향의 청년들이 부모에게 섣불리 말하여 고통을 주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말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들의 동성애 성향을 일찍 알지 못한 것을 괴로워한다. 어떤 부모든지, 나이가 많든 적든 자녀의 동성애적 성향을 정당화할 부모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애절한 심정으로 자녀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절실히 기도할 것이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이는 마찬가지다. 성경에는 부모의 믿음과 절실한 기도로 자녀의 문제를 해결한 내용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런 기적들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동성애자들을 아직 버리지 않으셨다
    더 긍휼히 여기시고 탕자처럼 돌아오시길 기다리시는 마음
    한국교회, 성도덕과 윤리교육 금기시 말고 앞장서 소통해야

    홍석천 씨는 또 공중파 방송에서 “신(神)도 자기를 버렸다”는, 참으로 위험한 발언을 했다. 홍씨도 한때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라니 더욱 안타깝다. 그의 방송을 듣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싶다. 물론 위로가 아니라 수치감이 앞섰을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 37)”고 기록한다. 그가 주를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를 향한 주의 은혜가 있다면 회개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홍석천 씨를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홍석천 씨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동성애자를 버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히려 더 긍휼히 생각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돌아온다면, 탕자의 비유처럼 인생을 변화되고 더 큰 인생의 복을 누릴 것이다.

    방송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홍씨가 “내 아이의 성 정체성을 알고 나서부터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요즘처럼 성(性) 문화에 노출된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적 음행 문제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가져야 하고, 윤리·도덕적인 올바른 성교육이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를 비롯한 종교기관들이 성적 문제, 즉 성도덕과 윤리교육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성문제의 금기시가 경건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들에게도 성생활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닌가. 다만 인간 생활에서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올 때부터 옷을 입고 살게 됐다. 성적 문제는 오직 부부간에만 열린 문이다).

    ‘힐링캠프’를 보면서 느낀 것은 SBS TV가 다른 방송보다 동성애자들에 대해 관용적이고 편향된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SBS TV의 이러한 편향성은 프로그램 편성국과 PD, 제작자들이 동성애적 마인드를 갖고 있거나 그들 중 누군가 동성애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또 요즘 각 방송국에서 펼쳐지는 토크쇼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성전환자나 동성애자들이 거리낌없이 나오고 있고, 불교계 혜민 스님도 출연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재담을 들으면서, ‘왜 기독교에는 TV에 출연하는 목사나 교수, 과감한 기독교인들이 없을까’ 생각하게 됐다. 자신들이 성직자라서 너무 거룩한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도 삶 속에서 거침없이 만나셨고, 간음 현장에서 붙들려 나온 여인을 정죄하는 유대인들과 논쟁하셨으며, 군중들 앞에서 그녀를 용서하였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하셨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거룩한가? 내 생각에는 종교적 속성에 매여 현실감이나 예능감이 떨어져서가 아닐까 한다.

    이제 우리 교회가 좀더 과감히 사회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군대귀신 들린 자도 찾아가시지 않았나. 이처럼 우리도 그늘진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목회자들도 ‘힐링캠프’나 ‘1박 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참석해도 된다. 문제는 기독인들의 사고가 ‘독 안의 쥐’처럼 거룩함이라는 단어에 매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어야 한다. 세상 밖에 있는 것들을 교회 안으로 다 들여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이버 광야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기독교 TV나 방송도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기독방송 매체들은 ‘6070’에게만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좀더 완전한 소통을 위하여 하늘의 지혜와 재능을 갖고 과감히 세상 속으로 돌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글은 결코 크리스천들을 비하하고 동성애를 찬성하는 글이 아닙니다. 읽는 분들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홀리라이프(동성애 성중독 상담실) 이요나 목사
    http://cafe.daum.net/consult
    상담문의: 070-7565-3535, calvarychape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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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기 목사 설교] 네 짐을 야훼께 맡겨라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서론>
    오늘 저는 “네 짐을 야훼께 맡겨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자동차가 없었어요. 간혹 한 대의 자동차가 지나가면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말고 선생님과 함께 뛰어 나가서 자동차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매연이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어요. 전부 자동차 한 대가 가면 지나가면서 가스냄새 풍긴 것을 킁킁 아주 향기로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때 우리가 버스 정류소나 기차 정거장에 가면 지게꾼들이 많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여행하는 분들이 짐을 가지고 나오면 서로 짐을 짊어지고 가려고 쟁탈을 했습니다. 짐을 맡기면 집까지 걸머지고 와서 짐을 내려놓습니다.

    저는 요사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때의 일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네 짐을 내게 맡기라고 하셨는데 그 짐꾼들이 생각이 나요. 주인은 걸어가고 짐은 짐꾼이 걸머지고 가는데 천지를 지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짐을 맡기면 짊어지고 가시겠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매일같이 우리 짐을 지시는 야훼를 찬양할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의 짐을 하나님이 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을 야훼께 맡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지 마시고 크고 적은 짐을 대신 짊어지고 집에까지 갖다 주고 하시는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께 짐을 못 맡기게 방해하는 마귀

    그런데 하나님께 짐을 못 맡기게 하려는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성경에는 악한 자, 유혹하는 자, 이 세상 임금, 세상 신, 공중 권세 잡은 자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어찌하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짐을 맡기지 못하게 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짐을 맡기면 우리는 인생을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샘이 나서 짐을 못 맡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짐을 바라보고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 심신의 고통, 저주와 죽음의 짐을 바라보고 벌벌 떨고 하나님께 감히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빠져 들어간 것처럼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 빠져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가 되었는데 항상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서 협박과 공갈을 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절망의 바다에 빠져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 10:10)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해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슨 너의 짐을 져주노? 네 짐 네가 짊어져라. 하나님은 안 도와주신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짐을 짊어지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번민하고 고통하고 발버둥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수작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위 사람을 통해서 부정적인 조언을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너 큰일 났다. 이번에는 너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 요번에는 네가 낭패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훼방하고 있다. 고소하고 있다.” 불안과 공포를 주어서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한마디 말이 굉장히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것을 들으면 천길만길 떨어지며 마음에 낙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다가 일이 그르치고 안 되면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하시냐.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잘 믿고 주일날 예배도 잘 드리고 십일조도 드리고 전도도 하고 기도도 잘 했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이 다가오느냐. 원망과 탄식합니다.

    우리는 짧게 보지만 하나님은 멀리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멀리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일일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조건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몰라도 좋게 만들어 줄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앞에서 못하게 마귀가 훼방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마귀는 대적 안하면 안 물러갑니다. 쫓아내야 돼요. 단호하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쫓아내야 돼요.

    여러분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분 한번 손들어봐 주십시오. 별로 많지 않아요. 꼭 쫓아내야 돼요. 뭘 마귀가 붙을라고... 반드시 붙습니다. 마귀는 뭐와 같으냐. 세상의 먼지와 티끌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가 깨끗하게 몸을 털고 다녀도 먼지와 티끌은 묻는 것처럼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억압하고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길을 빼앗아가버리고 믿음과 용기를 빼앗아가고 희망을 빼앗아가고 혹은 단잠을 빼앗고 건강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저도 매일 저녁 마귀를 쫓아냅니다. 희한하게 내가 잠자리에 들어갈 때 마음이 무겁고 몸이 으스스하고 괴롭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왜 이러느냐. 마귀에게 눌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고 한 몇 번 대적하면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저는 마귀가 들어올 때는 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나갈 때는 몸에 느껴요. 어떤 때는 전율이 나오고 마귀가 나가는 증거가 뚜렷이 보입니다.

    마귀가 다 나가면 그 전율이 다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눌림이 떠나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도 편안해지고 단잠도 자고 좋아지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나쁜 일이 생기면 마귀가 왔다고 신호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으로 대결하면 그 마귀는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너희가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했으므로 귀신을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뭐 그런 일하면 무식한 소리한다고 하는데 무식한 소리 아닙니다. 실제는 실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서 마귀를 대적하므로 말미암아 이기는데 그것은 늘 우리가 주님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마귀의 훼방을 내어 쫓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처음 왔을 때는 선교부에서 자동차를 주니까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녔어요. 그러면 동네 온 사람들이 다 와서 따라다니며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선교사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길을 걸어가는데 할머니 한분이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머리에 이고서 가기에 차를 대고서 “할머니, 타십시오.” “아이구 미안해서 어떻게 하노.” “타십시오.” 그래서 선교사 차에 탔어요. 그런데 선교사가 운전하다가 보니까 뒤에 화닥딱 화닥딱 하거든. 그것 왜 그런가 보니까 짐을 머리에 이고 차에 앉아있는데 그때는 차길이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차가 많이 요동하니까 막 흔들고 넘어지고 “할머니, 그 짐을 내려 놓으십시오.” 그러니까 “아이구 벼룩도 낯짝이 있지. 몸 실어주는 것도 그런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느냐.” 끝까지 짐을 안내려 놓습니다. 몸 태어주는 것도 고마운데 짐을 어떻게 내려놓느냐. 우스운 일이지요. 저는 이 선교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한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 십자가에 맡겨라.” “주님,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러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다 안고 있습니다. “그 짐도 맡겨라.” “아이구 내 몸을 맡아 주는 주님 감사한데 짐까지 어떻게 맡깁니까? 미안해서 못하겠습니다.” 미안하기는 뭘 미안해. 이미 내가 주님을 믿었을 때는 주님이 다 내 짐 맡은 것인데...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구인데... 예수님이 우리 짐을 맡을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인생의 짐도 맡은 것입니다. 아무리 안 맡아도 주님이 맡겨 놓은 것이니까 오늘부터 마음 푹 놓으시라구요. 죄와 허물, 질병과 저주, 절망과 죽음, 공포, 괴로움, 주님이 다 맡아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만 놓으면 되는 것인데 자꾸 내가 이고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짐을 맡길 수 있는 방법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짐을 맡길 수 있는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이 땅에 왜 와 계십니까?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서 와 계십니까?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악한 세상에 와 있습니까? 악을 선으로 바꾸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원한이 있는 곳에 은혜로 바꾸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병이 있는데 와 계셔야 되고 어둠이 있는데 와 계셔야 되고 고통이 있는데 와 계셔야 되고 절망이 있는데 와 계셔야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 나는 고통에 처해 있으니까 하나님은 나와 같이 아니 하신다. 웃기는 소리하네요.

    평안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와서 뭘 해줄꼬? 해줄 것 없어요. 평안해요. 그럴 것 아닙니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뭐 해 줄꼬? 아이구 고통에서 건져 주십시오 하나님! 그럴 것 아닌 것입니까? 반색을 하고 환영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바로 어두운데 빛을 주기 위해서 오시고 굶주린 곳에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오시고 아픈 곳에 고침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는 것입니다. 의사는 병든 자가 있어야 의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다 영육 간에 병들었는데 하나님은 의사로 오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도 우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원하는 것이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어둡고 캄캄한데 처할 때 하나님이 꼭 같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말씀하신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주님이 함께 계시므로 우리가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모르니까 불안하고 공포에 떨고 뒤로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 채찍으로 때리는 하나님, 나에게 책잡는 하나님, 날 벗기는 하나님, 지옥 보낸다고 협박하는 하나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그리는 그림을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반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인생은 무엇을 기대하고 바라보면서 삽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고 건강해지는 것을 기대하고 살고 사업이 잘될 것을 기대하면서 살고 시험에 합격할 것을 기대하고 살기 때문에 이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늘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별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아들을 기대한 것처럼 바라보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동쪽을 바라보고 서쪽을 바라보고 남쪽을 바라보고 북쪽을 바라보라. 네 눈에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늘 바라보아야 돼요. 불행을 바라보지 말아야 돼요.

    우리는 종종 불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안 될 것, 내가 망할 것, 내가 고통당할 것, 배신을 당할 것, 슬픔을 당할 것, 고통이 다가올 것을 늘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바라보는 것입니다. 롯이 잘못 바라봐서 신세 망쳤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있다가 아브라함이 너가 동이라고 하면 나는 서고 남이라고 하면 북이라 하리니 아브라함이 요단뜰을 바라보고 소돔, 고모라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제일 그 당시에 타락한 도시인 소돔, 고모라성을 자꾸 바라보니까 그곳에 매혹되어서 소돔, 고모라로 갔다가 패가망신하고 만 것입니다.

    올바른 곳을 바라봐야 돼요. 누구든지 안 바라보고는 살수가 없어요. 바라봐야 돼요. 우리가 당장 교회밖에 나가면 세상 간판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라보아야 돼요. 그런데 나쁜 것을 바라보게 되면 끌려가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끌어당기는 법칙인 것입니다. 좋은 것을 바라보면 좋은 것으로 끌려가고 나쁜 것으로 바라보면 나쁜 것으로 끌려가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늘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모든 수욕을 다 당하고 머리에 가시관 쓰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고통 속에 울면서 가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그 증거가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사랑을 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지금도 여러분 앞에서 손을 내밀고 너 짐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면 주님을 바라보고 감격하고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고 주님께 짐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짐꾼들이 주인의 짐을 맡고 집까지 갖다 준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맡아서 걸머지시고 천국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나니 내가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마음에 기쁨과 평화밖에 없고 주님을 믿고 따라만 가면 주님이 짊어져가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을 바라보아야 돼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바라보면 우리가 짐을 맡길 수가 있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주님은 이같이 우리에게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맡기라고요.

    연구조사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걱정, 근심 가운데 80%는 일어나지도 않을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당한 많은 염려, 근심, 걱정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거의 80%는 안 다가와요. 걱정을 하고 했는데 효과가 없어요. 그리고 12%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고, 내게 아무 상관없는 일, 남의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것이고 진짜 다가오는 것은 8%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염려,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나머지 8%의 걱정, 근심도 맡기면 하나님이 맡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100% 평안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부정적인 말로 우리를 낙심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낙심하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온갖 근심 걱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수고를 외면하고 자기 스스로 짐을 지고 몸부림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네 짐 네가 맡아라. 하나님 안 맡아 주신다. 네가 해결해라. 네가 이 인생의 주인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거짓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다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팔에 의지하여 쉬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 좋은 것은 여러분 우리가 성경말씀을 많이 마음 속에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걸어다닐 수 없어도 걸어다니면서라도 입으로 술술 하나님 말씀을 외우면 얼마나 좋습니까? 야훼를 송축하라. 내 모든 것들아 야훼를 송축하라.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여 주시며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운다. 얼머나 좋습니까? 걸어가면서 그 말을 하면 마음 속에 평안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내 짐을 야훼께 맡겨라. 그리하면 저를 너를 돌보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리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면 얼마나 좋습니까? 천인이 내 우편에서 만인이 내 우편에서 엎드려지나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외워서 자꾸 그것을 반복하면 굉장한 은혜가 되는데 제가 늘 여러분께 말씀드리듯이 시편 23편 여러분 생활에 밥 먹듯이 외워야 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한번 다시 외워 볼까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그것 외우면서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주님께서 같이 계시므로 해를 받지 않는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한다. 할렐루야~ 그리고 원수가 나를 공격하면 원수가 오면 밥상도 차려 주신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 앞에 내게 밥상을 차려 주시며 내 머리에 성령으로 기름 발라 잔이 넘치게 해주신다. 그 말씀이 마음속에 위로가 되고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데 말씀을 내가 입술로 말하고 내가 들어서 믿음이 생겨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105절이 말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을 보면 어두움이 밝혀지고 마음이 환해지는 것입니다. 시편 1편 2절로 3절에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을 마음속에 묵상하고 말씀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 우리 생활에 형통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가요 웅변가였던 윌리엄 J. 브라이언이 남긴 글이 있습니다. “나는 수박씨의 힘을 관찰해 본 적이 있다. 수박씨에는 흙을 밀어젖히고 나오는 힘이 있다. 그것은 자기보다 20만 배나 더 무거운 것을 뚫고 나온다.” 수박씨를 땅에 심어 놓으면 그 씨가 싹이 나서 흙을 뚫고 올라오는데 흙이 자기 씨앗보다 20만배나 더 큰 힘으로 누르고 있어도 그것을 뚫고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씨가 싹이 돋는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씨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말씀은 생명의 씨앗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수박씨와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말씀의 씨앗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매일 마음 밭에 심으면 이 말씀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때에, 모든 문제의 흙을 뚫고 나와서 생명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의 흙이 우리를 짓눌러도 말씀이 뚫고 일어납니다. 무거운 짐도 수박씨가 뚫고 나오는데 말씀이 어떠한 짐이라도 뚫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외우십시오. 말씀을 외우려면 많이 괴롭습니다. 귀찮아요. 저도 요사이 매주일 마다 새로운 성경구절을 외우는데 외우려면 귀찮고 괴로워도 나중에 외워 놓으면 굉장히 달고 오묘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 감사와 찬송을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편 68편 19절에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오늘 여러분 짐을 주님이 지고 계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는데 그것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될 것 아닌 것입니까? 하나님은 안보이시지만 내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과 23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하면 하나님이 영화로움을 느낀다. 우리도 남에게 좋은 일 하고 난 다음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하면 마음이 즐겁지 않습니까? 아무리 도와줘도 인사말씀 안하고 고맙다 말 안하면 괴씸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아무리 짐을 짊어져주어도 입 딱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하면 괴씸하다 다음에는 안줘야 되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많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가장 좋은 길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울고불고해도 그것 몇시간 못갑니다. 감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어려움을 당할 때 감사를 하십시오. 감사를 많이 하면 어려움이 없어지고 좋은 일에 감사를 많이 하면 좋은 일이 더욱 우리에게 생겨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맡기는 자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맡기는 자의 짐을 져주시지 안 맡기고 지고 있는 자의 짐은 주님께서 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할머니같이 차를 타고 머리에 짐을 지고 안내려 놓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아무리 내려놓으라고 해도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짐을 내려놓느냐. 그렇게 말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고 있는 신발은 소유와 주권의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주권이 신발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났을 때도 먼저 신발을 벗으라. 너 행동과 너의 짐의 모든 것을 내게 맡겨라.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맡기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어놓고 일하러 나갈 수 있습니까? 집에 들어와서 신발 벗고 방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믿고 쉬어라. 짐을 내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4절로 5절에 “야훼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신발을 벗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자기 주권행사를 벗어놓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짐을 맡기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어깨에 힘주고 나가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습니다. 모세가 신발을 벗으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일을 다 책임져 주시고 모세는 하나님에게 업혀 다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한 일을 다해서 이스라엘 3백만 백성을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 13절로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야훼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야훼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의 대장은 우리 편도 아니고 적 편도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들러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편들지 않습니다. 당신 원하는 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뭘 할까요? 신발 벗어라. 네 마음대로 행하는 주권을 벗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어 놓으니까 그때는 하나님이 작전 계획을 말합니다. 여리고성을 여섯 바퀴 돌고 일곱 바퀴째 고함을 치면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맡기는 일을 주님이 맡아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짐을 맡아 주겠는데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 그 말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예수님의 멍에는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멍에는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서 소나 나귀의 머리에 씌운 막대기인데 예수님은 우리 짐을 지기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멍에, 여러분의 죄, 허물, 질병, 저주, 절망, 고통, 죽음을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멍에를 짊어지라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짊어지셨는데 어디 갑니까?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소가 멍에를 메고 있는데 그 멍에 무거운 짐이 끌려 있습니다. 새끼를 보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 어미 멍에 밑으로 들어가니까 새끼는 목에 멍에가 안 걸므로 그냥 따라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어미소를 보고 뭘 땀을 흘리고 힘을 잔뜩 주고 고생을 하느냐. 아이구 험담도 떤다. 엄마 왜그리 수고를 하냐. 야 이놈아, 너 목에는 이 멍에가 얹혀 있지 않지만 내게는 얹혀있지 않느냐. 짐은 내가 끌고 너는 공짜로 따라오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십자가 밑에 들어가면 공짜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도 공짜로, 허물의 사함도 공짜로, 치료도 공짜로, 축복도 공짜로, 평안도 공짜로, 천당도 공짜로, 그렇게 가기를 원하는 것이 주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멍에 밑에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끌고 가겠다고 내 목에 멍에를 걸고 당기면 내가 피땀을 흘리고 목의 가죽이 벗겨지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멍에 밑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끌어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인이 책임을 지지 종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시면 우리 인생의 일과 짐과 문제를 다 같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이면 내 짐 내가 져야지요. 책임져야지요. 제가 결혼한 사람들에게 늘 말하기를 제일 처음에 사랑의 감정만 가지고 결혼하지 말라. 사랑이란 포도주와 같아서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취한다. 그러나 항상 취해서 사는 사람은 버린 사람이 되는 것처럼 사랑해도 결혼해서 항상 취해서 살면 일도 안하고 나중에는 바짝 말라 죽는다.

    사랑은 하면 사랑에 달콤한 향기가 나고 달고 취하는 것은 석달이면 충분하다. 그 다음에는 밥 먹고 살아야 되고 이 세상일에 부딪히기 때문에 서로 논쟁도 하게 되고 싸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만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하면 큰일 난다. 사랑을 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걸머질 각오를 하고 사랑을 해야 된다. 예수님도 우리 십자가를 걸머지고 난 다음에 우리를 사랑했다. 십자가라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 책임지고 사랑해야 되고 아내도 남편 책임지고 사랑해야 되지 책임을 안지고 사랑하면 사랑이 식어지면 굿바이. 너는 너대로 가라. 나는 모르겠다. 이러면 안되잖아요. 주인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모든 것을 소유할 뿐 아니라 소유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나의 협조자로 생각하고 사느냐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내 짐은 내가 짊어지고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께 도와만 달라고 하면 하나님 여러분 협조하러 따라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면 여러분 일생을 책임질 뿐 아니라 여러분의 짐도 여러분의 염려, 근심도 문제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 그 일을 만들어 성취하는 이는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가 할 일은 부르짖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부르짖어 맡기고 믿으면 하나님이 신기한 일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야훼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주님은 밝은 일도 짓고 어두운 일도 짓는다. 밝은 일은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짓지요. 하나님을 반역하는 나라에서 주님께서 심판의 어두움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도 화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우리가 모셔야지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따라오면서 도와달라고 하면 여러분 하나님은 보조인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자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을 때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을 모시고 살겠습니다. 주님, 다 맡기니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어떻게 건지는지 알아요?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물에 빠진 사람 건지려면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뛰어 들어가서 물에서 허덕이는 사람 건지려다가 같이 빠져 죽는 사람 여러 명 들어보았습니다. 왜냐, 물에 빠져서 허우적이는 사람은 젖 먹던 힘을 다해서 무엇이든지 오면 붙잡습니다.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와도 붙잡고 다리에 휘어 감기면 수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꽉 잡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물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 살릴려면 완전히 녹초가 되도록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허덕이다가 물을 먹고 숨이 차고 하니까 가라앉으려고 할 때 그때 가서 건져야 되는 것이고 시간이 없으면 헤엄치고 들어가서 머리를 눌러서 녹초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물을 잔뜩 먹고 온 사지가 늘어져서 뻗을 때 건져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데 말려 들어갔다는 하나님조차도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다려요. 뻗어져서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심을 믿습니다 하고 기다리고 안 그러면 눌러가지고서 아주 뻗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자신을 가지고 자기를 의지하면 하나님은 도울 수가 없어요. 내가 할 수 없게 되고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주님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판 저판 사판입니다. 믿습니다. 오냐. 그러면 맡겨라. 그러면 맡겨지지요. 하나님 맡긴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어야 맡기지 조금이라도 살만하면 안 맡기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죽지 않고 맡기게 도와주는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죽은 척해라. 죽은 척해라. 그래서 완전히 맡겨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주 결사적으로 맡기면 주님이 책임지는 것인데 다니엘서에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방신을 섬기지 않다가 느부갓네살왕이 화를 내어서 그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럴 때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주었을 때 내가 세운 두라평지에 있는 신상에 대해서 절을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할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왕이여, 왕이 우리를 풀무불에 던져 넣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요 하나님이 안 건져 주셔도 우리는 절대로 우상에는 절하지 않습니다.

    왕이 분노막심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불에 던졌는데 제 네 번째 사람 천사가 내려와서 같이 두리둥실 춤을 추면서 있었습니다. 묶은 줄이 다 타지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안 탔습니다. 왜냐,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해주신 것입니다. 일사각오하고 믿으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세요. 이것은 믿지도 아니고 안 믿지도 아니하고 하면 하나님이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니엘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왕에게 말해서 30일 동안에 왕 이외에 어떠한 신에게도 기도하면 사자굴에 집어넣자고 할 때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할 때 다니엘이 그것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해서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 잡혀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사자가 다니엘에게 달려들지 않았어요. 왜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사자가 감히 다니엘에게 달려들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니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참수하던 장관들을 잡아서 사자굴에 넣으니까 땅에 떨어지기 전에 사자들이 뼈를 다 부서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타협 없이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께서 알아야 될 것은 2천 년 전 예수님은 나의 짐을 이미 다 짊어지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발버둥 치는 그 짐은 주님이 이미 2천 년 전에 다 짊어지셨습니다. 죄의 짐도 허물의 더러운 짐도 심신의 병의 짐도 저주의 짐도 사망과 음부의 짐도 다 짊어졌으니 진리를 깨닫고 내 짐을 짊어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믿음으로 의지하고 믿고 감사하면서 걸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우리가 싸우는 것은 마귀의 말에서 귀를 기울이지 말고 우리 스스로에게 타일러서 주님께 짐을 맡기는 훈련을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짐을 맡았습니다. 책임져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일생을 맡기고 주님을 주인으로 삼으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책임지고 여러분의 일도 짐도 문제도 책임지고 주님께서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짐도 주님은 걸머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 십자가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믿고 십자가 밑에 들어오면 주님께서 우리 짐을 이미 걸머지셨으므로 우리는 쉽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서 손을 내밀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 오늘이라도 좋다. 내게 짐을 맡기고 내 멍에 밑에 들어와서 의지하고 따라오너라. 그러면 너는 평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결심하고 주님께 짐을 맡겨 보십시다. 기왕 예수 믿을 바에는 믿었으면 우리 짐도 다 맡겨 버리고 한번 평안을 가져 보십시다. 나도 그렇게 하고 이웃도 그렇게 하라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십시다.

    여러분께서 이 진리를 깨달아 알았으면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고 믿고 맡기고 따라가십시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리며 그 고통을 감내하고 가신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결단코 버리지 않고 결단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감동하십시오. 감격하고 사랑하고 따라가십시오. 믿으십시오. 그러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전달한 이 설교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보게 되실 것입니다.

    / 2013. 2. 3. 성찬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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