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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을 쌓아놓기만 하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위험이 /'신앙 좋은' 사람은 왜 거품 물고 독기 뿜을까
    2012-02-10 09:25:12   read : 607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충렬 박사의 ‘우울증’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앞에서 우리는 임상유형의 우울증 7가지 중에서 3가지, 일차적, 내인성, 이차적 우울증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그 나머지인 4가지를 다루어야 한다. 임상유형은 우울증의 치료에서 매우 실제적으로 다루어지는 특성이 있어서 유용한 편이다. 이는 우울증의 전체적인 윤곽을 알기 위해서는 편리하기 때문이지만, 더 정확한 우울증의 진단을 위해서는 특별한 연구가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1. 신경증적 우울증

    신경증적 우울증(neurotic depression)은 문자 그대로 신경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우울증을 유발한 것이다. 신경증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신경을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우울증상이 유발되었다는 점에서 과민한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신경증적 우울증 환자는 자기 주위의 상황에 대하여 부적당하게 반응하거나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 이는 신경증적 우울증 환자가 심각할 정도로 무능해진 사람이나 습관적으로 책임감을 회피하기 위해 신경을 기울인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자기개방을 하지 않은 편으로 걱정을 회피하고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며, 남에게 동정이나 애정을 갈구하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신경증적 우울증에 관하여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증상과 원인, 그리고 치료 등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신경증적 우울증상

    신경증적 우울증은 신경 변화에 의해 유발된 우울증이다. 신경증적 우울증은 해결되지 않은 갈등에 의한 정서장애로 정신병적 우울증보다는 비교적 경미한 편이다. 이 우울증은 수년에 걸쳐 매우 서서히 나타나며 다양한 증상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신경증적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다른 증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소한 것들을 자주 생각하여 정신에너지를 고갈시켜 스스로 힘을 잃고 우울해진 현상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적 우울증은 증상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높은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신경증적 우울증은 어떤 일에 대하여 과도하게 신경을 기울임으로 정신에너지를 소모한 현상이므로 현실 판단력에 현저한 손상이 없는 상태에서 우울한 기분과 의욕상실을 나타낸다. 다만 이 우울증상은 불안이 그 주된 특징이므로 정신병과는 대조적으로 외적 현실의 큰 왜곡이나 인격의 해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증이 스트레스와 불안 수준이 높은 것이 특징인 만성적 장애라는 점이 우울증과 관련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생각에 몰두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망상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으며, 무기력하고 침울하지만 현실 판단 능력의 장애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신경의 과도한 상상과 관련되는 강박증이나 편집증 등에서 우울증상을 보이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경증적 우울증 환자는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대화 내용이 조리에 맞고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편이다.

    2) 신경증적 우울증의 원인

    신경증적 우울증은 여러 가지 염려와 걱정이 중심이 되어 일어나는 우울증상이라고 했다. 염려와 걱정은 신경증적인 특성을 가지므로 그 원인은 정당한 현실적 이유라기보다는 괜히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신경증적 우울증은 심리적인 것이 원인이 되는 심인성(心因性) 우울증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다음의 몇 가지로 그 원인을 구분하여 기술할 수 있다.

    첫째로 스트레스에 의해 유발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신경을 과도하게 사용한 결과로 일어난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신경을 많이 기울이면 신경성으로 변한다. 이처럼 과도하게 신경을 기울이면, 그것이 정신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므로 맥이 빠지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이 유발된다. 이런 신경증적 우울증에는 현실적 스트레스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심인성 우울증도 해당한다. 스트레스성이란 대개 내분비 변화로 보는 내인성이지만 스트레스성 우울증은 일시적으로 우울감, 불안, 불면 등의 증상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적 스트레스 우울증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환자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이 신경증적임을 입증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사회에서는 전환신경증이 더 많이 나타나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둘째로 심리적 갈등에 의해 유발된다. 심리적 갈등은 여러 모로 신경을 기울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이런 심리적 갈등으로 인해 신경증적 우울증이 유발된다는 점에서다. 게다가 심리적 갈등은 대체로 신체화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것을 전환신경증(conversion neuroses)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환신경증은 감각기관이나 수의운동의 극적인 기능상실을 주된 증상으로 하는 장애로서 실제 신체적 질병 없이 단순히 심리적 갈등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의 정신과 입원환자 중 전형적 전환신경증이 1-3%로 집계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입원 환자 중 전형적인 전환신경증이 10-20%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 여기에는 성적 억압, 의학 지식의 미보급 외에도 며느리의 경우 불쾌한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전통적 가족제도와 관련이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는 신경증적 우울증이 여성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이유다.

    물론 전환장애성을 가진 신경증적 우울증은 사회문화적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 측면이 있다. 성적 억압이 강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시대에는 신경증적 우울증이 가장 많았으나 성(性)이 개방된 오늘에 와서는 점차 적어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의학 지식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런 극적 증상이 발생했으나, 의학상식이 널리 보급된 현대 사회에서는 2차성 이득을 얻기 어려워 그런 증상이 적어지면서 진단하기 어려운 동통이나 신체화장애로 옮겨지고 있다.

    셋째로 심리적 분노에 의해 유발된다. 심리적 분노는 과도하게 신경을 기울이게 만든다. 한 가지에 분노하게 되면, 그 생각을 쉽게 끊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집착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런 분노는 알고 보면 부정성의 결과로 촉발된다. 부정성이 축적되면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매우 심리적인 측면이라고 보아야 한다. 심리적으로 못마땅한 것이 내면에 부정성으로 쌓여서 분노로 변화여 일상의 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분출된다는 점에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우울증을 홧병이라고 부르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홧병이라는 것은 마음에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여 일어난 것으로 심리적인 것이 원인이 된 이른바 심인성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면 홧병은 분노에 대한 반응으로 충격을 받은 후에 생기는 심인성 반응인 문화 관련 증후군이기도 하다. 이런 홧병은 40세 이상에게 많고, 여성이 77%로 남성(23%)보다 3배 많으며, 주로 사회, 경제, 학력 수준이 낮은 계층에 많다고 알려져 있다.

    3) 신경증적 우울증의 치료

    신경증적 우울증의 치료는 다른 우울증에 비해 그다지 어렵지 않은 특징을 갖는다.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중단하게 하면 치료되기 때문이다. 신경증적 우울증의 환자는 걱정스러운 것을 염려하면서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의 불안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다르게 바꾸려는 전환(轉換)이나 전위(傳位) 등으로 표시되는 편이다. 이는 신경증적 우울증을 매우 심리적인 것으로 보고 심리적 상처에 집중하여 치료를 시도할 이유다. 다음은 신경증적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시도할 수 있다.

    첫째로 감정을 표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들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 내면에 축적된다. 이렇게 내면에 축적된 감정은 대개 부정적으로 변화되는 편이다. 감정은 표현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날아가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감정이 대단한 감정이나 심각하게 변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좋지 않은 감정일수록 표현하는 것이 심리적 건강에 도움이 된다. 감정의 표현은 물론 언어로 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그렇기에 신경증적 우울증은 언어로 자기의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신체의 괴로움을 자기감정으로 표현하는 사회에서 증가하게 된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며느리의 입장에서 전환성 신경증의 빈도는 높을 수밖에 없고, 성격적으로 “걱정도 팔자다”라는 속담에 해당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이유다.

    둘째로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불안의 표출은 신경증 우울증 치료의 방법이 된다. 이들은 세상에 대하여 자기의 일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신뢰와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 그 결과로 자신의 내면에 스스로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 불안이 세상과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되면서 더욱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런 점에서 신경증적 우울증의 치료에서는 세상과 일,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갖기 위해 우선 먼저 자신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이들은 타인과 세상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의 신뢰 문제는 자신감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열등감이 그 뿌리가 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해진다면, 치료자는 이들에게서 신뢰와 믿음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객관성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별 것 아닌 일에 신경을 기울이면 부정성이 축적된다. 이 부정성이 열등감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열등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고, 감정의 색깔이 어두운 것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다. 그러면 이들의 열등감은 매우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므로 객관적인 근거를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대개는 자기의 주관성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있다. 이들의 주관성이 부정성과 직결되어 이들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므로 객관성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주관성의 부정성을 줄여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들이 객관성을 확대해 나가는 일은 그대로 긍정성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된다. 이들의 객관성은 긍정성을 확대해 나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2. 정신병적 우울증

    정신병적 우울증(psychotic depression)은 치료가 간단하지 않다. 이들은 증상의 정도에서 일단 더 심각한 상태를 보인다는 점에서다. 이로 인해 이들의 증상은 심하여 자신의 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을 정도이며, 죄의식, 후회, 자책감, 자기 비난 등이 지나쳐 망상으로까지 발전한다. 이들의 심리 기저에는 죄책감이 기반이므로 대개 과거에 저질렀던 ‘죄의 대가’라는 등식이 깊게 자리한다. 이들은 자신이 비난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자신을 고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증상은 특히 자기 자신에만 집착하여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 결과다. 이런 정신병적 우울증은 1-4주 이내에 나타나는 수도 있지만, 그 범위는 점차 확대되므로 순식간에 일어나지는 않는 편이다.

    1) 정신병적 우울증의 증상

    정신병적 우울증은 심각한 정신증상을 수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 이들의 우울증은 매우 심각한 우울 증상을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 판단력이 손상되어 망상 수준의 부정적 생각이나 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 정신병적 우울증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단극성(unipola)은 우울증이나 조증의 한 가지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양극성(bipola)은 두 가지의 증상이 주기적으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극성은 심한 의기소침과 왕성한 의욕이 교대로 나타나는 반면에, 단극성은 의기소침한 현상만을 증세로 한다.

    정신병적 우울증에서는 자신과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인증(離人症, depersonalization)도 일어난다. 이인증은 인격이 상실되는 현상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감각이나 신체 일부도 자기의 것이라는 감각을 갖지 못한다. 이때 비현실감, 자기 자신, 자기의 신체,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거리감으로 인하여 환각과 망상이 나타나며 현실 세계로부터 극단적으로 철수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평소의 신선한 정서적 표현이 없어지고 기분이 좋지 않으며 일상적인 일에 관심이 없어지고, 생기도 없으므로 주변사람들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목석과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앞에서의 현상은 정신분열증 초기의 신경증적 장애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이 시기에 우울증의 진단은 상기 두 상태와 구별해야 한다. 우울증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는 슬픈 정동이 점차 특징적으로 드러나 이들의 표정과 태도에 나타날 것이다. 이는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고 희망이 없으며, 침체된 기분이고 평소에 통상적으로 하던 일도 어렵게만 느껴지고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이들에게 기분의 저조는 아침에 더욱 심하고, 저녁이면 가벼워지는 편이다.

    2) 정신병적 우울증의 원인

    정신병적 우울증상은 심한 상태에서는 망상을 수반한다. 우울증이 망상을 수반한다는 것은 우울증이 어느 정도인가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병적 우울증은 정서장애(affective disorders)이므로 일종의 기분 혼란의 증상을 갖는다. 이들의 정서의 문제는 정상적이지 못하므로 지각, 사고에 영향을 주는 지속적인 정서 상태를 드러낸다. 이들의 증상이 정신병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가 심하기 때문인데, 그러기에 이들은 쉽게 울고, 천천히 말하면서 움직이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는 반드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신병적 우울증 환자들은 자존감이 현저히 낮으며, 과거에 대한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고 있거나 자신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심하여 망상으로 발전하면 신(神)이나 악마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망상은 성격상 현실에 맞지 않는 생각들이므로 그 사고는 매우 환상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그러다가 조증 상태로 되면 말이 많고, 기분이 고양되어 무척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이때 행동의 양이 증가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돈을 마구 쓰는 등의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말의 내용이 자주 바뀌어서 나타나는 사고의 비약(flight of idieas)이 일어나며, 망상적 수준의 사고에서는 과대망상(grandius delusions)도 나타날 수 있다. 이들의 사고는 현실과 상관없다는 것은 객관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성을 근거로 하는 심각한 생각이 극도에 달한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의 주변에서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갖는다거나 정당한 근거 없이 대단한 사고에 집착하거나 매달리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은 사회적 지위, 가정의 앞날, 사업의 장래성 등에서 절망적이라고 확신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강염려증에 시달린다. 이것이 심하면 신체망상, 빈곤망상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 허무망상(nihilistic delusion) 등이 나타나면서 후회와 자책을 많이 할 것이다. 특히 이들의 후회와 자책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죄업망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더 심해지면 자기 무능력감, 열등의식, 절망감, 허무감이 강화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여 자살의욕과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이런 정도의 정서변화는 과거 자기 인생에서의 후회스러웠던 일을 문제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객관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동(情動)의 병리적 현상인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망상을 지니기도 하고, 자기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염된다고 믿어 환경과의 접촉을 단절하여 집 안에 틀어박혀있기도 한다.

    3) 정신병적 우울증의 치료

    정신병적 우울증은 비교적 심각한 정도의 우울증이라고 했다. 이는 그만큼 치료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증상이 심하면 일단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증상이 어느 정도 호전되면, 상담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는 심리적인 것과 신체적인 증상이 병합되어 있다는 점에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다음은 정신병적 우울증의 치료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첫째로 체계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신병적 우울증의 환자는 우울증상의 정도가 심각하여 사회적 적응이 불가능하다. 사회적 적응이 불가능하다는 상태는 반드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들의 문제는 우울증상이 정신기능의 심각성을 보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 상태이므로 경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는 더욱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치료를 요구하는 상태임을 시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정신분열증이나 강박증, 그리고 편집증 등의 증상과 확연한 구분이 요구된다. 이런 질병의 증상에는 대개 정신병적 우울증상이 함께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에너지를 상실한 경우 정신기능의 이상이 일어나 정상적이지 못한 기능이상이 이른바 맥이 빠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다. 더욱이 정신병적 우울증은 자기의 자신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이인증을 수반하므로 자기 자신, 자기의 신체 또는 자기 주위에서의 소외감 및 비현실감을 특징으로 하는 증후군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현상은 존재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상태이므로 이때의 치료는 상담치료보다는 약물치료를 우선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로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신병적 우울증의 치료를 위해 약물을 사용할 때 주의력이 요구된다. 약물치료는 대개 다른 증상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를 구분하여 시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치료자는 현재 나타나는 우울증상이 일시적인 실망반응은 아닌지, 잔류기 음성증상은 아닌지, 무동증이나 좌불안석증은 아닌지, 정신병적 증상의 악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등을 가려보아야 한다. 이런 경우 삼환계 항우울제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항정신병약물로 증상을 충분히 안정화시키고 지지적 정신치료를 하며, 항파킨슨제를 충분히 사용면서 수 주간 동안 지켜보는 것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항우울제에 의한 정신병적 증상의 악화도 흔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경미한 정신병적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항우울제를 즉시 중단할 필요는 없고, 항정신병약물의 용량을 약간 증량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삼환계 항울제와의 병용에서 바람직한 항정신병약물로는 항콜린성 효과를 적게 하기 위해 고역가의 약물이 바람직한데, 이때 항정신병약물과 삼환계 항우울제는 상호 혈중농도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단가아민 산화효소 억제제(MAOI)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리티움(lithium), 벤조디아제핀(benzodiazepine) 등을 항정신병약물과 병용한 연구들이 있으나, 전반적인 정신병적 증상을 평가한 연구들이 대부분이고, 급성기 이후의 우울증상을 표적으로 한 연구들은 거의 없는 편으로 알려져 있다.

    셋째로 운동치료를 시도해야 한다. 약물치료는 증상의 약화에는 도움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마도 가장 빠른 시간이나 시일에 효과를 보는 것이 약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약물은 증상의 완화에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지만 약물복용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에는 내성이 생기기에 더 많은 약물을 복용해야만 그만큼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약물의 복용이 길어지면 면역력도 약화되기 쉽다. 이는 치료의 과정에서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이유다.

    이와 관련하여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으로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복용하는 약물을 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운동은 여러 면에서 신체의 대사기능이나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어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최고의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런 것은 다음의 원리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치료의 원리에서는 신체의 문제는 심리적으로 치료하고, 심리의 문제는 신체적, 즉 운동을 적절히 하면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는 정신병적 우울증이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특징이 있어 어렵기는 하지만 운동치료를 더욱 권장해야만 할 이유다.

    3. 외인성 우울증

    외인성 우울증(exogenous depression)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우울증상이다. 이 증상은 주위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정신적, 심리적 증상들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환경이란 갑작스런 사건이나 사고 등에 의한 상실(喪失)에 의한 것으로서 반응성 우울증(reactive depression)이라 부른다. 이 반응성은 대개는 상실에 집착해서 자신의 존재 능력을 비하시키는 점, 심한 죄의식에 빠진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대개는 6개월 정도의 기간이라는 점이 특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때 이들에게는 사고력과 집중력이 떨어짐으로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내리는 일을 힘겨워 한다. 이들은 흥미나 즐거움을 가질 수 없기에 자연히 취미나 여가생활에 흥미를 잃고 야망도 사라진다. 이 외인성, 즉 반응성은 내적 원인에 의한 우울증과는 정반대로 아침에는 상태가 좋다가도 오후가 되면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1) 외인성 우울증 증상

    외인성 우울증(exogenous depression) 또는 반응성 우울증(reactive depression)은 외부 요인에 의해 유발된 우울 증상이라고 했다. 외부적 요인이란 환경적인 스트레스에 의한 것으로 대개 큰 사건이나 상실감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이처럼 이인성 우울증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반응에 따라 일어나는 심리적 반응이므로 반응성 우울증(reactive depress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갑자기 어떤 사건이나 사고, 그리고 상실감에 의해 힘을 잃어버리기에 어제까지 힘 있게 생활하던 사람이 외부의 강력한 자극으로 인해 갑자기 오래 앓아왔던 환자처럼 된다.

    외인성 우울증은 흔히 우울증의 75%를 차지하므로 모든 우울증을 외인성, 즉 반응성 우울증이라고 말할 정도다. 갑작스런 큰 사고에 의해서나 이제껏 소유하던 것에서 상실감을 경험할 때 맥이 빠지는 심리적 반응은 심리적 변화만 아니라 신체적 변화도 포함하게 된다. 특히 이들의 신체적인 증상에서는 행동의 지연(retardation)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노곤하거나 무력감을 느끼므로 어떤 행동도 하기를 싫어한다.

    특히 이들은 대개 수면과 식욕에 문제를 보이는데, 우울증 상태를 잊기 위해 늘 잠을 자거나 과식을 하며, 그와는 정반대로 잠을 잘 수 없거나 식욕이 떨어지는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성적 욕구와 성(性)행위가 감퇴하거나 더 심각한 증세로 자신의 외모를 돌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는 편이다. 이는 외부의 부정적인 자극이 심리적으로 힘을 잃게 하는 변화를 촉발하는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들에게 밀려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막강한 자극이 그들을 압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일어나는 반응성 우울증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기에 그것이 다시 심리적 원인이 작용하여 우울증을 촉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신경과민 상태는 죄의 잠재성을 자극하여 부정적인 생각들을 계속적으로 지니게 함으로써 우울증의 기간을 연장되는 경우도 있다.

    2) 외인성 우울증의 원인

    외인성 우울증은 외부에서 오는 강력한 자극으로부터 유발된다고 했다. 스스로 견디어내기 힘들 정도로 외부의 자극이 개인의 대응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외부의 강력한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우울증이 유발된다는 점에서 이를 ‘반응성 우울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로 인해 개인은 힘을 잃게 되어 일정 기간 동안 또는 장기간 우울에 시달린다. 여기에는 가족과의 사별, 실연, 실직, 중요한 시험에서의 실패, 가족의 불화나 질병 등이 해당된다. 외인성 우울증의 원인을 그 성격에 따라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상실감에 의한 것이다. 가진 것을 갑자기 잃어버리는 상실감은 인간에게 급격하게 맥이 빠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의지하던 것들이 내게서 떠나가거나 멀어졌다고 생각될 때는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감이 너무나 큰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나지 않아 더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위험성도 따른다. 이런 상실감에는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삶의 기반이거나 소중한 사람이거나 물건, 지위를 잃어버린 경우가 해당한다. 이때 급격하게 힘이 없어지고 맥이 빠지는 현상은 깊은 슬픔의 우울을 경험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실감에는 더 구체적으로 소중한 물건이나 사람을 잃어버림, 사회적인 측면의 지위와 역할의 상실, 실직이나 은퇴 등이 해당한다. 특히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직장을 잃는 실직은 가족의 생계와 관련되어 커다란 우울을 유발시킨다. 실직한 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을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도 가족을 책임질 수 없다는 자신의 무능력에 괴로워하고 자책한다. 이런 자책감은 흔히 존재의 자기비하를 넘어서 극심한 절망감으로 떨어지기 쉬우며 자살을 유발할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상실감은 어떤 경우에도 층격적인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 중에서도 사별은 그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의 정도가 너무 큰 것이므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둘째로 실패에 의한 것이다. 실패는 아마도 각종 시험에서의 실패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고등학생이 대학시험에서의 실패, 그리고 취직이나 임용시험에서의 실패로 우울해 하다가 급기야는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반응성 우울증의 결과다. 이런 실패에는 실연(失戀)도 해당한다. 실연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라는 점에서 연애의 실패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연은 사별에 비교할 바는 아니라 해도 의지하고 심리적으로 기댈 수 있던 사람을 잃어서 현실적 의욕을 상실하고 심하면 죽음을 선택하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문제다.

    그리고 실패에는 각종 질병치료의 실패도 해당한다. 질병치료의 실패, 또는 그 일환으로 인하여 신체적 일부를 손상당하거나 잃어버린 경우에는 심각한 우울증이 유발된다. 특히 어떤 사고로 손이나 발을 절제하였다면 커다란 우울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신체의 일부를 손상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처음에 자살을 시도하려는 경험을 갖는 이유다. 실제로 가슴절제 수술을 받은 여성이라면 여성의 상징인 유방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로 우울해진다. 신체의 일부를 손상당하거나 전제당하는 것은 치료의 실패와 아울러 상실감에 의한 우울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사별에 의한 것이다. 사별은 상실감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전술했다. 사별은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가장 큰 상실감에 해당하지만 상실감 중에서도 사별은 가장 현저하다는 점에서 따로 구분하여 다루어야 한다. 이런 사별은 극도의 슬픔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배우자 사망이 스트레스 수치 100%를 기록한다는 것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사별로 인한 우울증은 대개 죽은 사람에 대한 죄책감, 자신의 잘못 대응함에 대한 가책 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들의 우울증은 슬픔의 정도를 강하게 나타내므로 신체적 반응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들의 신체적 반응들은 목과 가슴이 조이는 느낌, 위(胃)가 텅빈 느낌, 소음에 대한 과민 반응, 신체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무감각이나 마비감, 입이 마름, 호흡곤란, 근육허약, 에너지 결핍 등의 호소로 나타나는 편이다. 이런 사별을 잘 견디어내지 못하여 죽은 사람을 따라가려는 자살을 시도하는 등의 위험이 뒤따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보면 반응성 우울증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외인성 우울증의 치료

    외인성 우울증은 정상적인 우울증으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매우 효과적이다. 사람이 약해질 때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그때 잠깐 붙들어주는 것이 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결과를 산출한다. 이런 외인성 우울증은 정상적인 우울증이므로 특별한 치료보다는 6개월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심각한 정도가 아니기에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다시 원상회복이 된다는 점에서다. 다만 증상이 심하여 견디기 어려운 경우에는 더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한 치료로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심리적 충격을 완화해야 한다. 심리적 충격은 놀람의 극치를 드러내는 현상이다. 심리적 충격은 신체적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영향이 신체적인 충격보다는 더 오래간다는 점이다. 더욱이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 강도에 따라서는 일정 기간 동안 멍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오래가는 경우도 있다. 큰일을 당하고 나더니 사람이 이상해졌다는 말하는 소리를 주변에서 듣는다면, 충격으로 인한 반응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치료는 대개 환자에 따라 그 대처하는 방법은 달라지게 마련인데, 이들에게는 처음에 갑작스런 충격을 완화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충격이 심하면 신체화 증상이 두드러져서 한숨, 탄식, 위통, 안절부절 못함 등을 나타낸다. 충격이란 정신이 흔들리는 현상이므로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이 저하되거나 감정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사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강력한 우울증에 빠지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들은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해도 그 순간이나 기간에 잘못된 판단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의 주의력이 요구된다.

    둘째로 감정을 분출해야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문제는 단순히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치료의 차원이 된다. 슬픔이나 분노 그리고 후회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내면에서 정서의 순환에 정체적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다. 이 정서들은 대개 부정적이고 마치 덩어리로 뭉치는 효과를 나타내므로 즐겁고도 긍정적인 정서들을 부정적으로 채색하게 된다. 감정의 분출 또는 감정의 표현은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울음이나 행동으로도 가능하다. 이 경우에 마음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 필요한데, 이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기 쉬울 것이다. 상실에 대한 원망과 분노 등에 관하여 마음을 토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원해지는 측면이 있고,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혼자만이 겪는 일은 아니라는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

    셋째로 정서적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정서적 갈등이란 마음이 집중되지 않고 일종의 해리현상처럼 갈라지는 증상이 경험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일정한 궤도를 달리던 자동차들이 궤도를 이탈한 것처럼 중심이 잡히지 않는 현상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정서적 갈등은 대개 심리적인 증상으로 죄책감이나 풀리지 않는 데서도 일어난다. 사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인한 깊은 상실감이 심하여 죽은 사람의 모습이 엄습한다든지, 목소리가 들린다든지, 멀리서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든지 하는 것이다. 또 죽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생생하여, 특히 밤에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보거나, 그 사람에 의해서 만져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상태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 슬픔 과정이 끝날 때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서적 갈등은 현실에 집중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이런 상실감은 현실적인 변화를 이루는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 그래서 사별의 경우는 일정한 세월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사별은 대개 처음 1년이 중요하고, 2년이면 회복할 수 있어야 하고, 3년이면 완전해 져야 한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회복하지 못한 경우에는 심각한 경우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4. 갱년기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evolutional depression)은 인생의 중년기에 일어나는 우울증이다. 인생의 중년기는 생활의 안정과 삶의 위기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이는 중년기에 심리적인 측면과 신체적인 측면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중년기는 대개 35-50세에 해당하는 이 시기로서 생활에서는 대개 안정적인 기반을 이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더 이상 발전이나 성공할 수 없다는 허탈감이 지배하기도 한다.

    1) 갱년기 우울증의 증상

    갱년기 우울증은 갱년기에 발생하는 우울 증상이라고 했다. 갱년기 우울증은 나이에 따른 것으로 대개 35-50세의 중년기 그 이후의 장년기나 노년기에의 초조성, 심한 절망, 사소한 일에도 극도의 후회 등을 주된 증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이다. 갱년기의 연령은 개인에 따라 다소 차이도 있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도 있다. 대개 여성은 40대 후반, 남성은 50대 후반 정도에 흔히 일어나며, 여성은 폐경이 된지 3년에서 7년 뒤에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여성의 경우 50세를 전후하여 생식기능이 중단 되는 폐경기(menopausal period)를 맞는 갱년기를 경험하게 된다. 폐경기는 반드시 성적 관심이나 활동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호르몬의 중단으로 신체, 그리고 부부관계에도 상당한 변화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인생의 중년기 또는 갱년기는 이런 외부적인 변화만 아니라 심리적인 변화의 문제들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20-30대 초반처럼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자기 변호적 또는 방어적(defensive) 사고는 점차 꺾이기 시작하면서 인생에 대한 허무와 허탈감이 자리하기 쉽다. 이런 이유로 칼 융(C. G. Jung)은 갱년기에 삶의 의미를 찾았느냐의 문제를 중요시하는 시기로 우울증을 주목하였다.

    갱년기 우울증은 남자보다 여자에게서 3배나 많이 발생하고, 사회계층이 낮은 집단, 홀로된 사람이나 이혼한 사람에게서 발병률이 높다. 갱년기 우울증상은 대부분 서서히 시작되며 초조하고 건강, 사업, 경제문제 등을 걱정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초긴장성이 2-3년 지속된다. 이 시기에 건강염려증(hypochondriasis) 때문에 내과를 자주 찾아 건강을 진단하는 수도 많고, 고독하고 슬퍼서 울기도 하며, 지난날의 사소한 일도 몹시 후회하고 죄책감, 앞날에 대한 절망감을 갖게 되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앞날은 비참과 참혹함만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죽을까봐 몹시 겁을 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심한 불면증, 질병에 걸렸다는 신체망상, 그리고 암담한 미래에 대하여 걱정이 되어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2) 갱년기 우울증의 원인

    갱년기는 모든 신체기능과 심리적 기능이 저하된 상태다. 젊음이 있는 동안에 활력과 의욕이 있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인생을 마무리 해야만 한다는 쓸쓸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런 것은 신체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심리적으로도 바라던 것에 허탈감을 갖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변화는 인생의 후반기에 일어난다는 특이성이 있다. 이를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신체기능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갱년기는 급격한 신체상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갱년기 우울증은 여성과 남성에게 관련되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심각하게 나타난다. 여성의 갱년기는 폐경(menopause)과 관련되고 있는데, 폐경은 난소로부터의 에스트로겐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상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역할이 마감됨을 의미한다. 이때 여성은 어머니역할의 해방, 출산능력 상실, 노년기 시작의 신체적 증세와 심리적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갱년기 우울증은 폐경기에 생기는 생체적 변화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최근에는 심한 절망이나 극도의 후회 등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단순히 심리적 문제로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갱년기는 내분비와 생식선의 감퇴를 보이기 시작되는 시기이고, 이 시기에 신체의 대사장애, 생화학적 변화를 크게 일으킨다는 점이 우울증을 유발시킨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심리적 허탈감에 의한 것이다. 인생의 중년기에는 몸도 마음도 약해지는 시기다. 신체적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고 마음도 일상의 일에서도 잘 견디어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진 결과일 것이다. 실로 갱년기는 젊음과 건강의 상실, 죽음에의 공포, 사회적 성취의 한계를 느끼는 일등 심리적인 자극이 중요시되는 시기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런 갱년기의 심리적 갈등은 갱년기에 심리적 허탈감은 어느 정도 신체와 관련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갱년기 우울증은 내적 호르몬의 변화로 일어나는 측면에서는 내인성 우울증의 범주에 해당하면서도, 그 증상은 내인성 우울증의 주된 증상인 지체성 우울증(retarded depression)의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심한 절망이나 사소한 일들에 대한 극도의 후회 등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초조성 우울증(agitated depression)의 형태를 나타낸다. 이런 것은 겉으로는 신체적인 겉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 심리적인 특성이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셋째로 삶의 의미상실에 의한 것이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갱년기 우울증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일상의 생활에 열중한 여성에게 더 유발된다. 이 경우의 여성은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여 살아온 경우에 자기 자신을 상실한 허무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 맥이 빠져 허탈해지는 우울증에 걸린다.

    그런 이유로 융(C. G. Jung)은 이 갱년기 우울증을 다른 우울증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우울증이 융에 의해서 매우 부각된 점이 있다. 융은 중년기에 특이하게 일어나는 이 갱년기 우울증은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허무와 절망이라는 감정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융은 갱년기 우울증을 일반 우울증과 구분하여 매우 주목하게 되었다. 인생의 전반기에는 외부의 사회적인 일에 적응하느라 정신에너지를 쏟은데 비해서, 이제 중년기 이후에는 정신에너지를 자기 내부에 쏟아야할 시기인 것으로 외부의 인격인 자아와 내부의 인격인 자기의 조화에서 문제를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3) 갱년기 우울증의 치료

    갱년기 우울증은 중년기의 남성과 여성에게 일어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남성은 이 시기에 인생의 전반적인 것을 정리하여 자신의 자아실현과 인생의 마감을 하는 시기이므로 그에 따른 확신이 서지 못하면 허무해지거나 우울해진다. 그 반면에 여성에게는 우울증상이 더욱 심한데, 이는 여성의 폐경기를 전후로 일어나는 우울증이기 때문이다. 이런 갱년기 우울증은 신체적인 변화와 심리적 변화 등이 맞물려 있는 증상이므로 신체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측면의 치료적 중점이 중요시된다. 이런 점에서 치료는 일단 약물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상담치료로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호르몬제의 복용이 도움이 된다. 여성의 갱년기는 여성 호르몬이 중단되는 현상이므로 심리적 변화는 에스트로겐의 생성과 관련된다. 여성호르몬은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다워지게 만드는 것으로 여성의 신체적인 부분과 심리적인 부분에 모두 관여하고 있다. 이 갱년기는 여성호르몬이 중단되므로 여성의 신체적인 기능이 확연하게 달라지게 되므로 당황하게 된다. 여성호르몬의 중단으로 인하여 피부의 변화와 더불어 골다공증의 위험, 성교의 원활치 않은 문제점들이 발생되기 때문에 여성호르몬제를 복용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여성호르몬제에 대해서는 유방암을 유발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기피하는 현상이 있으나 과도하게 복용하지 않고 적절하게 복용한다면, 오히려 여성다움을 유지하거나 골다공증을 예방하고 성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는 치료적인 차원에서 적절한 처방을 통하여 호르몬제의 복용을 시도할 만한 이유다.

    둘째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갱년기의 여성은 외모보다는 정체성의 확립에 주력해야 한다. 여성에게 갱년기는 외모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지만 심리적인 것이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갱년기의 우울증이 자신의 가치와 자아 존중감을 여성다운 외모에 두는 여성일수록 더 큰 상실감을 경험한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에 가치를 두는 것은 신체적으로 늙고 여성다움을 상실한다는 절망감은 심해진다.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에 해당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다가 어느 새 중년기를 맞기 쉽다. 실제로 여성은 가사일과 자녀양육, 남편의 내조와 시부모 모시는 일을 하다가 자신의 성취능력과 자아실현 욕구 등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이로 인해 자기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더 나아가 중년기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이 자녀출산 및 양육에 이은 자녀의 결혼과 분가로 이어져 빈둥지 증후군(empty-nest syndrome)을 경험한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른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셋째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해야 한다. 갱년기 여성의 무력감은 융에 의하면 삶의 의미 발견과 관련된다고 했다. 갱년기의 자신의 정체감을 찾은 것이나 삶의 무력감,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모두 자신의 삶의 의미 발견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 현상은 이제까지 정신에너지가 외부로만 향하던 것이 내부로 향하는 전환의 변화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갱년기의 남성이나 여성은 외부의 삶에 적응하느라 온갖 정력을 쏟아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서 살아온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과의 내부적 조화를 이룩할 때인 것이다. 이 시기에 환자는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허무해지고 삶의 무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이 시기에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삶의 다시 발견하는 일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느냐보다는 스스로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 가치를 평가절하를 하지 않는 자세도 중요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해도 그 조력이 있었기에 가족은 모든 일이 가능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새삼스럽게 발견해야 할 때이다.

    5. 결론: 위장된 우울증에도 주목해야

    지금까지 우리는 우울증의 임상적 유형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그것은 모두 신경증적 우울증, 정신병적 우울증, 외인성 또는 반응성 우울증, 그리고 갱년기 우울증이었다. 여기에서 신경적 우울증은 말 그대로 신경을 많이 기울인 결과로 일어나는 우울증이었다. 별 것 아닌 일에 신경을 기울이다 보면, 정신의 에너지가 급격하게 소진되어 신경증적 우울증이 유발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신경증이라는 것이 말해주듯이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우울증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됨과 동시에 걱정이 많은 성격이 우울증에 노출될 위험성도 고찰하였다.

    정신병적 우울증은 여러 우울증 중에서도 상당히 심각한 우울증으로 그야말로 진정한 병적인 우울증이었다. 이때 우울증이나 조증이 하나만 나타나는 경우에는 단극성 우울증, 그것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나는 경우에는 양극성, 이른바 조울증이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쉽게 치료되기 어려운 점이 있어서 증상이 심한 정도에서는 약물을 사용하여 증상을 완화시키고, 어느 정도 증상이 호전된 다음에는 상담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했다.

    외인성 또는 반응성 우울증은 외부적인 요인, 특히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사고에 의해서 유발되는 우울증이었다. 외인성 또는 반응성 우울증은 우울증에서 거의 75%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이나 사물을 잃어버리는 상실감에 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이유로 특별한 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대개 6개월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원상회복이 되는 것이지만 그 동안에 대응을 잘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큰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갱년기 우울증은 인생의 중년기에 유발되는 우울증이었다. 중년기라는 갱년기는 신체적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남에 따라 마음도 약해져서 우울증이 유발된다는 점에서였다. 이런 것이 남성과 여성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하기는 하지만, 특히 여성에게 더욱 큰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했다. 다만 남성에게는 자아실현과 관련되어 부정적으로 판단한 결과로 맥이 빠지는 것이라면, 여성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중단되어 일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둘이 모두 신체와 함께 마음의 허약함이 문제이지만, 더욱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정신의 힘을 잃게 만들어 우울증이 유발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이상의 유형들 외에도 위에서 주로 행동과 사고도 느려지고 침체되는 지체성 우울증(retarded depression), 걱정과 불안을 동반하며 흥분된 모습을 나타내는 초조성 우울증(agitated depression)이 있지만, 임상에서 유형을 중심으로 따르다보니 다루지 못했다. 이런 지체성과 초조성은 주된 증상이기보다는 다른 우울증상에 부가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에서다.

    그런가 하면 여성의 경우에 출산으로 인한 특별한 우울증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산후 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이다. 산후 우울증은 출산 후 4주 이내에 우울증상이 나타나 곧바로 없어진다. 때로 산후 우울증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경우도 있어 검사가 필요하기도 하다. 또 계절의 변화에 따라 주기적으로 특정한 계절에 우울증이 나타나는 경우를 계절성 우울증(seasonal depression)이라고 한다. 일조량이 적은 가을이나 겨울에 우울증이 더 발병하는 경우다.

    이와는 다르게 우울증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때로는 겉으로는 우울한 기분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않지만 내면적으로 우울한 상태에서 비행이나 신체적 문제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경우다. 그것이 위장된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장된 우울증은 위장되어 나타기 때문에 진정한 우울증으로 알기 어렵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우울증의 원리를 가지고 발달적 측면에서 아동기나 청소년기, 노년기의 우울증을 특별하게 취급하여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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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좋은' 사람은 왜 거품 물고 독기 뿜을까

    종교는 집단적인 현상으로 필연적으로 배타성 띠어

    길희성 ( 메일보내기 )


    평생 종교 공부를 해 온 사람인데 요즈음 나는 내가 왜 하필 그 많은 학문 가운데서 종교라는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살아왔는지 자문해 볼 때가 많다. 또 개인적으로도 평생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해 온 사람인데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거기에 소비해 왔는지 묻게 된다.

    종교라는 것이 매우 복잡다단한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 할지 늘 고심하게 된다. 한편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과연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순수'한 종교 현상은 없지만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는 게 영성

    종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사회, 문화, 도덕, 정치, 경제, 철학 사상, 예술, 건축, 공예 등 삶의 다양한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기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종교가 부차적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순수한' 종교 현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삶의 다양한 활동들과 연계되고 섞이면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의 가장 순수한 면,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며 종교만의 고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영성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는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가 인간과 세계를 초월한다고 믿든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나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든, 종교는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에 관여하는 감성과 사고 활동을 하는 이성과는 다른 영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품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영성을 자각하고 실현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이에 비하면 종교와 관련된 여타 현상과 관심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영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보면 회의를 넘어 절망감마저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체로 종교생활은 무척 열심인데 정작 영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오히려 신앙이 아주 '좋고' 신앙생활에 열성인 사람일수록 영성과는 거리가 멀고 아집, 독선, 편견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나 종교 생활에 열심인 사람 하면 왠지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특이한 경우일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에는 독기마저 품은 듯 열심히 자기 이야기만 하려는 신자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무엇이 두려워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살까

    여하튼 영성은 고사하고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못 미치는 신자들로 넘쳐 나는 것이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이다. 뉴스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 종교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온갖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며 이권 다툼, 교권 다툼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세속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과연 정상적인 생각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종교 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 종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중세 시대도 아니고 웬만한 사람은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사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보기 싫다고 떠나 버리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여하튼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와 영성이 유리되어 따로 논다는 것이다. 가장 영적이어야 할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영성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해 벽두부터 우리 종교계를 이렇게 싸잡아 매도할 생각은 없고 또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한 영성을 지닌 다수의 성직자들과 양식 있는 신도들이 묵묵히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우리 종교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어디든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적어도 평균 이상의 도덕적 수준과 영적 수준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더군다나 종교에 투입되는 엄청난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고려해 볼 때 한국 종교계는 아무래도 후한 점수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창시자는 유연한데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억압…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

    요즈음 우리 사회와 종교계에 '영성'이란 말이 제법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지금 나 자신도 그렇게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영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쓰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어의 'spirituality'에 해당하는 말이라 여겨지며, 초월적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초월적 시각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하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게 들리던 이 단어가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저 감으로 느끼기에는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종교'라는 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 자신의 경우는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종교라는 말보다 영성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특히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서 '종교'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그러할까?

    종교는 우선 집단적인 현상인 반면 영성은 개인적이다. '나 홀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종교는 집단적이기 때문에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며,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도자와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종교도 집단이고 체제인 한, 타 집단들로부터 자기를 차별화하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신자들을 관리해야 하며 사상과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필연적으로 테두리를 긋고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교 운동을 시작한 카리스마적 창시자들은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에서 자유롭고 유연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추종자들이 늘면 각종 규율이 생기고 제도와 체제를 강화하게 된다.

    어쩌면 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운동이 지녔던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신도들을 관리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게 되면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대체로 종교들이 걷는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코스이다. 종교들마다 초창기의 정신과 비전을 선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 고독 허무 불안 소외와의 대면이 되레 본래적인 삶 이끌어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이라는 것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일(personal)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집단화되고 제도화되면 될수록 종교를 떠받히고 있던 개인의 영성은 진정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관습적이 되며 세태와 타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면 될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상대하는 것이다"라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종교의 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그 반대로 종교란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한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해 주는 기재라고 종교 사회학자 뒤르켕은 주장한다 - 깊이 새겨볼 만하다.

    사실, 뼛속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절망의 터널을 홀로 통과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느껴 본 일이 없거나 초월자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만사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영적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죽음, 고독, 허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성, 소외감 등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사에 몰두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면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래적인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 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혹은 신의 부름과도 같이 우리를 찾아온다.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섞이다 보면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홀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든다. 영성은 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일상적 자아, 사회적 자아에 매몰되었던 영적 자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다.

    영성의 각성과 함양에는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있을 줄 아는 자만이 남과도 함께 있을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때때로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자기 성찰을 위한, 생각마저 멈추는 자발적 침묵이 영성 함양의 필수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짝을 이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는 사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대화를 거부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래서도 안 된다. 공연한 오해를 사기가 쉽다. 이와는 달리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사실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말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홀로 있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과 홀로의 대화는 타인과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대화는 좋든 나쁘든 남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며 자기 체면에 신경을 쓰게 되므로 정직한 대화가 되기 어렵다. 때로는 원치 않는 말이나 불필요한 말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오해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 잘 모르는 것까지도 아는 체하기도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일단 내뱉은 말이 문제가 있음에도 열심히 옹호하려 든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 정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속이기 어렵고, 내면의 소리를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기 어렵다.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며 자발적 침묵은 자발적 자기 성찰을 위함이다.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 없는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다.

    묵언의 수행이 영성의 함양에 필수적인 이유는 단지 자기 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 궁극적 실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불가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삶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특히 사회/문화적 세계는 언어로 구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여럿'으로 가르고 쪼갠다. 영성이 추구하는 무한한 실재는 유한한 사물이 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름과 형상, 속성과 특징들을 여이고 텅 빈 고적한 세계이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이 실재는 대립과 차별의 세계를 넘어 모든 유한한 것들을 품을 수 있고 사물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며 만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 예수원에서 묵상 중인 기독교인. (사진 제공 <한겨레 휴심정>)

    자기를 놓아 버리고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이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어

    그래서 영성은 일차적으로 다수성보다는 단일성, 차별성보다는 무차별성을 선호하며, 일체의 상(像, 相)과 관념들을 초월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선호한다.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는 듯한 이 부정은 그러나 모든 것을 다시 품기 위한 부정이지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의 세계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하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부정이며 초월적 시각에서 세계와 인생을 다시 발견하고 품게 하는 부정이다. 영성이 선호하는 고독, 침묵, 부정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성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세계 도피가 아니다. 영성이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곧 자기 자신뿐이다. 영성이 혐오하는 것은 세계 자체나 인생 자체가 아니라 이기적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추한 모습뿐이다.

    영성의 대가들은 우리가 좁다란 이기적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을 모르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매사에 걸려 넘어진다고 말한다. 삭발 입산을 해도 소용없고 교회나 수도원을 찾아도 소용없다. 그러나 자기를 놓아 버린 자, 진정으로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은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는다고 증언한다. 임제선사가 말하는 대로 "처하는 곳마다 주인 노릇 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隨處作主 立處皆眞)" 경지가 열린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지만 영성은 나만이 알고 하느님만이 아는 세계이다. 물론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보이려는 가식과 위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영성의 세계에서 자기기만이 차지할 공간은 크지 않다. 종교는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사상의 통일이 필요하기에 교리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지만, 영성에는 강요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과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집단적 동질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때때로 철저한 영성가들의 정직한 말과 행동을 위험시하지만, 영성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순수성을 상실한 타협 아니면 타락으로 보인다. 개인적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종교는 집단화되는 순간부터 순수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영성을 키우기는커녕 장애가 되기 쉽다.

    종교는 일정한 경계와 울타리를 치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차이와 자유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고 자발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 성찰을 본질로 하는 영성에는 항시 정직성과 진정성이 살아 있으며, 이러한 영성이 살아 있는 한 종교도 생명력을 지니며 자체를 정화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영성이 억압받고 고갈된 종교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거대한 시체 덩어리나 다름없다.

    종교는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 하며 그 사명은 영성을 일깨우는 것

    개인의 끝없는 정직성과 진정성을 요구하는 영성은 쉽게 교리나 도그마에 가둘 수가 없다. 영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내적 경험이다. 교단이나 교권은 개인의 영성을 규제하고 획일화하기 원하지만 어떤 종교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완전히 성공하는 순간 그 종교는 망한다. 종교와 영성의 완전한 일치는 본질상 불가능하며, 양자 사이의 창조적 긴장은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기도 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하며 때로는 전쟁을 부추기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은 권력이나 부와는 거리가 멀다. 종교는 교리를 정립하고 정통을 수호하려고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지만, 영성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성찰하며 물리적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비움을 우선시하며, 우리와 저들을 가르기 전에 모두를 하나로 감싸 안는다.

    종교 지도자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뜻을 들먹이면서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성전(聖戰)을 독려하지만, 영성가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집단적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다. 종교는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지만 진정한 성전(jihad)은 오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라고 이슬람의 수피 영성가들은 말한다. 종교는 빠지면 빠질수록 위험하지만 영성은 깊으면 깊을수록 자유롭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종교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영성을 무비판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도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종교를 옹호하려는 데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종교와 영성을 지나치게 차별화한 것은 사실은 종교와 영성이 동일시됨으로써 행여 영성이라는 진주가 종교라는 진흙에 묻혀서 함께 외면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 하며, 종교의 목적과 사명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의 영성을 일깨우고 함양하는 데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실제로 특정한 종교 전통들 속에서 함양되어 왔다. 하지만 강력하고 순수한 영적 운동으로 시작한 종교들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전통의 무게가 더해지고 제도가 공고해지면 '정통'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짓누르고 영적 진정성을 훼손하는 기재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성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한 종교를 절대화하지 않고 비종교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제3의 영성

    순수한 영성 운동도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제도화되고 권력화된다. 동서양 수도원의 역사가 이를 보여 주며 오늘날도 많은 수도 단체들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도 개혁 운동이 필요하며, 스님들 가운데는 절을 떠나 토굴에서 수행하는 제2의 출가를 감행하기도 한다.

    종교도 처음에는 순수한 영성 운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 종교 안과 밖에서 출발한 각종 영성 운동도 '성공'에 비례하여 종교의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결코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종교는 본성상 집단적이고 영성은 본성상 개인적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개인의 발견과 더불어 주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근현대 세계로 들어오면서 종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의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현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외면당할지언정 인간의 영성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다. 영성이 감성이나 이성과 더불어 인간 본성의 일면인 한, 현대인이라고 해서 영성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의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종교적 영성, 초종교적 영성, 또는 비종교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종교 간의 벽을 넘고 종교와 비종교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제도 종교들이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적 공허 속에 방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영적 실험을 하면서 이전 시대의 인간들이 누려 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한 종교에 갇혔던 시야를 벗어나 인류 전체의 영적 자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제삼의 영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종교의 언어와 전통에 사로잡혀 절대화하지 않는 영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세속주의도 아닌 영성, 나아가서 종교와 비종교 - 성과 속, 진과 속 - 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종교적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들의 경우 이러한 초종교 영성은 동양 종교들에 대한 관심 혹은 환경/생태적 영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서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코너를 한 번 방문해 보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동양 종교들에 대한 책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그만큼 수요가 있기에 출간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의식 수준은 이제 더 이상 한 종교에 묶일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 뜨여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지독한 종교적 배타주의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린다 해도, 침묵하는 다수의 의식 속에는 종교란 결국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들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직관적 종교 다원주의론을 펴기도 한다.

    영적 인간관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대면해야 하고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 그 자체에 속한다. 표피적 자아 아래 숨겨진 심층적 자아, 영적 자아, 참자아(진아)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겹겹으로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이 뜨인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개안의 경험을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선에만 돈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영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종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한다. 소유보다 존재에, 성취보다 살아 있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되어야 할 자기와 현실적 자기, 본래적 자기와 비본래적 자기, 본질과 실존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한다. 부처와 예수,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은 이러한 괴리와 소외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터운 표피적 자아를 뚫고 들어가 영혼의 심층에 깔려 있는 깊은 자아를 만나 거기로부터 사는 진정한 사람들이다. 이 심층적 자아는 이런저런 우연적 특성을 지닌 표피적 자아,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차별적 자아가 아니라 무차별적 자아, 순수한 자아, 보편적 자아, 초월적 자아로서 만인을 품을 수 있고 만물과 하나 되는 우주적 자아이며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적 자아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적 모습을 거부하도록 추동하는 자아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 혹은 씨앗,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천성, 부처의 성품, 아트만, 내면의 빛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성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과의 대면은 곧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며 자기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영성의 완전한 실현은 하늘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신화 혹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이렇게 우주와 하나 되고 신과 하나 되며 부처와 하나 되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지고선이며 존엄성의 진정한 근거이다. 그리고 영성이 인간의 본성인 한, 영성의 자각과 실현은 곧 참다운 인간이 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일치의 경지는 죄악으로 덮여 있는 범부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비적 일치의 영성보다는 초월적 타자로부터 오는 은총에서 인간의 희망을 보는 신앙적 영성도 있다. 이른바 '타력' 신앙적 영성으로서, 자신의 노력과 수행으로 자기의 참자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에서 자력과 타력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영성의 세계에 '자력'의 오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데 있다. 자기 포기 없이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기 초월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총을 은총으로 깨닫는 것은 영성이며, 영성이 일깨워지는 계기는 은총으로 주어지고 영성의 완성 또한 자신의 힘보다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참인간'(ein wahrer Mensch)이라고 부르는 사람, 임제선사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욕심이 없으니 다툴 일이 없고, 소유하지 않으니 잃을 것이 없으며,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성과 속, 진과 속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롭다.

    성직자들처럼 유별난 복장을 하지 않으며 특별히 근엄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도 않는다.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권위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목에 힘주는 일이 없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럽고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되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부지런히 일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을 누리지만 하나도 소유하지는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성을 사랑하는 자들이 흠모하는 참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길희성 /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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