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한 곳에 모입시다 2002-01-06 18:40:43 read : 131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 6. 3. 사도행전2:1-12
I. 성령의 능력
미국과 카나다 경계에는 거대한 폭포 하나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높이가 48m 폭이 900m 로서 60m의 물줄기가 급한 벼랑을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장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더욱이 주변의 아름다운 전망은 이 폭포를 더욱 돋보이게 하지요. 야간에는 온갖 찬란한 조명구들로 폭포를 채색하여 황홀한 장면을 연출해 줍니다. 이 장관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어느날 그곳을 찾은 한 에너지 연구원이 그 물줄기에 수력 발전소를 세운다면 엄청난 전력을 생산해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현실화되어 미국과 캐나다 양국은 이 폭포의 거대한 힘을 이용하여 웅대한 수력 발전소를 세웠고 거기서 나온 전력을 통해 큰 이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 보다, 수력 발전소 보다도 더 위대한 힘으로 세계를 강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오늘 본문의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나이아가라 수력 발전소가 에너지 위기의 도움을 주었다면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권능은 폭포수처럼 인류 역사에 쏟아져 죄악의 위기, 영혼의 위기를 막아 주었습니다.
이날 있었던 영혼의 전력은 역사의 물결을 전격적으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비린내나 풍기던 어부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저들은 중국의 진시왕도, 로마의 시져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도 하지 못했던 역사의 대변혁을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찮은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는 더 이상 겁에 질리고 초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생명을 염려하며 두려워 떨던 갈릴리 촌부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로마의 한길로 달려나왔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예수 앞에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300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무엇이 갈릴리 촌부들을 이토록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역사의 흐름을 뒤흔들어 놓았습니까?
II. 능력의 공동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직접 함께 생활하며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훈련을 누구보다 잘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보다 더 잘 제자훈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십자가 앞에 서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결국은 팔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던 저들도 그러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제자훈련만을 잘 받았다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지만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절실히 알게됩니다. 자신은 제자로서의 십자가를 능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임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꿈은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것인데, 나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훈련만으로는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제한합니다. 성령님을 부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을 제한하는 것이 오늘 신앙인들의 문제입니다. 자기 얄팍한 이성과 경험 안에서만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과 용서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한 신앙인은 피맺힌 절규를 합니다. "Your God is too small" -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이런 신앙인들 -
* 사역을 하고 싶으나 사역할 힘이 없습니다.
* 사랑을 하고 싶으나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 용서를 하고 싶으나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 병이 들었을 때 낫고 싶으나 나을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인의 파우워(Power)가 있습니다. 소위 성령의 능력입니다. 구약의 한 할머니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사자에게 물었습니다. 신약의 한 처녀가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Nothing is impossible with holy spirit " - 성령안에서 불가능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모든 불가능을 잠재워버리시는 성령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성령강림주일 즉 2000년 전 오늘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으로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두번 째 공동체입니다. 첫번 째 공동체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보기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날에도 보기 좋았더라. 둘째 날에도 보기 좋았더라. 셋째 날에도, 넷째 날에도, 다섯 째 날에도 여섯째 날에도 하나님은 모든 것이 보기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보기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삼위가 이루는 놀라운 연합의 신비와 행복을 아담이 경험하도록 여자를 만들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죄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길 소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도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더 이상 실패하지 않는 공동체를 세우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일은 먼저 죄를 없애는 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공동체를 파괴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죄를 대속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제자들과 120문도들을 모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길 원하시는 공동체는 창세때 가정의 연합의 신비와 행복을 가지는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삼위가 연합하는 그 신비말입니다. 그것은 삼위가 그렇게 하듯이 성령으로만 가능하기에 하나님은 오순절날 제자들과 120문도들에게 성령을 놀랍도록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교회라는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 속에 탄생한 무너지지 않는, 아니 무너져서는 안되는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결코 무너질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탄생했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참다운 교회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우리 교회도, 셀 목장도 성령이 없이 참다운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없이 참다운 공동체로 부흥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다운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던 순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III.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하므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날을 "오순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민들에게 매년 3차례에 걸쳐 야훼 신앙의 표현으로 절기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첫째, 유월절입니다. 이는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 받은 민족 해방절입니다. 이때 7일 동안 고난의 떡 (무교병)을 먹으며 쓰디쓴 고난을 잊지 않고 해방을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둘째가 오순절입니다. 유월절이 지난 7주 후에 지킨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첫 열매를 드린다고 하여 초실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셋째는 수장절입니다. 이는 일년동안 거둔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고 하나님께 추수를 감사하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이때 들판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을 살며 광야 초막생활에도 먹여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구약절기는 신령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유월절은 구원받은 절기입니다. 그 날은 바로 신약 성도들의 부활절이 된 것입니다.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첫 열매를 거둔 절기요 신약교회엔 첫 교회가 탄생된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그 날도 또한 주님의 날 - 주일이었습니다.
수장절은 말세에 주님 재림시 믿는 자를 모두 천국창고에 거두어 들일 심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재림 또한 주일에 있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이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32km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절기행사에 참여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기적인 관계로 오순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날엔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까지 모두 참석을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에 나타납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모이는 곳에는 역사가 일어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성냥불 하나는 콧바람에도 꺼지지만 불길이 모이고 커지면 태풍도 그것을 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길은 마을을 삼키고 산야를 태웁니다. 잘 모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우리가 힘써 모일 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모임을 등한히 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미스바에 모임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시대 부흥운동도 귀한 백성들의 모임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도 뜨거운 군중이 쇄도하는 그곳에서 폭발되었습니다.
일찍이 부츠대장은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소홀히 생각하지 마라. 주의 성령도 주의 제자들이 모일 때 임했고 주의 재림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임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모임은 생명과도 맞바꾸어야 할 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오순절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기독교의 역사는, 성령의 권능은 바로 여기 -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인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 같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 주경가 바클레이는 이 말을 "그들은 모두 한 몸, 한 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몸도 마음도 죽고 사는 문제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소위 생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10일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10일 동안 그들은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죽어도 말씀에 순종해보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기 순종의 자리에 임했습니다.
둘째,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합하여 전심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 사모하고 매달리는 곳에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셋째, 기도 중에 갑자기 베드로가 일어나 예언을 합니다. 제자공동체 속에 찝찝하게 남아던 가롯 유다 문제를 정리하라는 겁니다. 곪은 상처를 도려내고 맛디아를 사도로 선택하고 조직을 완료했습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를 포함하여 자신을 따르던 120명의 무리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기다리면 '몇 날이 못되어' 그 일이 발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행1:4-5). 그들은 왜 기다려야 했을까요? 성령이 그들에게 당장 임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러했습니다. 무엇인가 우선되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공동체안에서 결속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어느 부자의 집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지도 않았으며 성경공부반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다락방에는 형식적인 일정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함께한 시간동안 그들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나눈 열흘이란 기간은 그들이 서로 얼굴만 아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 되도록 도우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이 열흘동안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형식적 조직없는 상태에서 한 방에 모이게 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람들은 그룹을 중심으로 움직였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열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서로가 모두 깊은 친밀감 가운데 들어가 자신들의 생활과 가족생활, 그리고 예수님과 만난 이야기들을 나눴고 또한 자신들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 문제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 오순절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닙니다. 정확한 때에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모임은 모임 하나만으론 능력입니다. 거기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할지라도 모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그 모임이 은혜로운 자리 일 때에 그 값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 어떤 시간보다 우선할 값어치가 있습니다.
다락방! 그곳에 15개국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언어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 중엔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온유한 사람과 괴팍한 사람, 믿음이 큰 사람과 적은 사람, 심지어 가족 따라 끌려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곳은 이미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타는 장작불 속엔 생나무를 넣어도 잘 타듯이 은혜의 자리엔 믿음이 약한 사람이 함께 있어도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 많은 목장들이 은혜의 자리를 이미 이루고 있어 모일 때마다 은혜를 받고 어린 신앙인이 쉽게 성숙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말에 쑥 하나도 길가에서 자라면 제멋대로 구부러지지만 삼밭에서 자란 쑥은 삼처럼 덩달아 곧게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 봉생마중이면 불구이자직 (縫生麻中而 不嘔而自直) -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가 성령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나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 하나가 가롯 유다가 될 수도 있고 나 하나 때문에 우리의 교회와 목장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IV.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다
성령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와 능력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성령의 역사는 바람소리를 듣게 해 주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바람은 고대인들에게 신비한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성령의 임재 또한 홀연히 임하는 신비입니다. 바람은 바다에서 물결을 요동케 하고 파도는 거대한 배들을 단숨에 삼켜 버릴 수 있습니다. 바람은 거목을 꺾고 집과 마을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로 쓰여집니다. 바람이 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우리가 다 느낄 수는 있습니다.
또한 바람은 숨결이나 생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의 골짜기를 보게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에스겔은 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의 무리를 살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생기라는 말은 바람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람 같은 소리가 급하고 강하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산골짜기에서 급류가 흘러 내리듯이 급하게 임했습니다. 이 성령의 바람은 10년 20년이 멀다하고 지중해 연안을 돌아 유럽과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급기야 이 한국 땅에서도 단 100년 만에 도시와 농촌, 산과 바닷가에 십자가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복된 소리를 듣는 귀가 복된 귀입니다. 진리를 들을 줄 아는 진리의 귀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하늘에 귀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었습니다. 본문 3절에 의하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분명히 보였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불을 보았습니다. 불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나타난 불은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태웁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 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운 밤에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죄악이 소멸되고 죄인들이 주님 앞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말씀의 강단에 불같이 역사하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 가운데서 부르고 계십니다.
어디에 내 생애를 불사를 것인가? 불을 받아야 소명을 압니다. 이처럼 성령은 눈을 열어 보게 하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의 눈을 열어 꿈을 갖게 합니다. 늙은이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합니다. 눈이 열려야 교회의 비젼이 보이고 사업의 비젼이 보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인류 역사상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사람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여행 중에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 많은 글 가운데 단 한번도 로마의 건축 양식이나 고린도의 유행이나 에베소의 풍습을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도무지 그의 눈에 보이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죽어 가는 영혼이 보였고 해야 할 일거리가 보였습니다. 섬겨야 할 교회가 보였고 부지런히 역사 하는 성령의 역사가 보였습니다.
성령을 받아 눈이 열려지고 나면 지금까지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V. 말이 통하는 공동체
성령의 역사는 입이 열려지는 역사로 임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불의 혀같이 갈라졌다"고 했는데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굳어졌던 혀가 풀려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입이 열려집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기 전에는 복음전파의 혀가 굳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저들의 혀는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는가 하면 예수가 잡힐 때에는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저들의 입이 달라졌습니다. 능력 있는 혀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릎쓰고 저들이 죽인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말에 3천명이, 5천명이,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혀는 풀려있습니까? 여러분의 입은 열려 있습니까? 진리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말입니다. 전도에 벙어리, 기도에 벙어리는 아닙니까?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말, 필요 없는 말에 지칠 줄 모르고 움직여 대지는 않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고 나면 기형적으로 굳어진 혀가 풀어집니다. 닫혀진 입술이 열려집니다. 그 혀로 기도하게 되고 그 혀로 기뻐 찬양하게 됩니다. 이웃을 축복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 생각지도 못했던 말과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곧 입술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을 잘 살펴보면 성령 충만의 결과를 대단히 흥미 있는 결과를 보고 해 주고 있습니다.
4절 -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6절 -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들었다
7, 8절 - 다 놀라 기이히 여겨 가로되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11, 12절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가로되 이 어쩐 일이냐?
여기 공통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방언으로 「들었다」는 말입니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
한 마디로 「말이 통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입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니라 귀가 방언을 한 것입니다. 입이 기적을 행하고 재주를 부린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귀가 자기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이 입 방언으로 못알아 듣는 방언이라면 사도행전의 방언은 귀방언입니다. 성령의 기록으로만 보더라도 무려 15개 나라 사람들이 거기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이 무너졌고 대화가 시작되고 교제가 이루어지고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일생을 살아가지만 말이 안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유식하고 한 사람은 무식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안통하고 사랑이 안통하는 겁니다.
지난주간 「미국 사랑의 빛 선교 교회」전교인 수련회 말씀 인도차 다녀왔습니다.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교포들의 고민이 자녀들과 말이 안통한다는 것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요 사랑의 문제입니다. 부모자녀간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집은 부모가 한국말을 하고 자녀들은 영어를 쓰는데도 문제가 없습니다. 간혹 언어가 따라 주지 않는데 외국인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도 안통하는데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그렇게들 대답한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게 아닐세" 마음의 문제입니다.
성령충만! 사도들의 말씀이 내 말로 들렸습니다. 북한 말로 100% 접수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사건이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령이 오신 그 사건이 내게 오신 사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사도들의 설교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졌습니다.
VI. 셀 목장의 능력
해외토픽 가운데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대만의 한 청년이 자기가 사모하는 한 처녀에게 2년 동안 화려한 문장으로 무려 700통의 연애편지를 보냈습니다. 매일 한 통씩을 보낸거지요.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입니다. 이 처녀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상대는 700통의 연애편지를 보낸 그 젊은이가 아니라 그 편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배달해 준 편지 배달부 청년이었습니다.
* 화려한 문장보다 친절한 태도가 중요했습니다.
* 잘 쓴 글씨보다 배달부청년의 온화한 웃음 한번이 처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 종이 쪽지보다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 중요했습니다.
*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편지가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배달부 청년이 기다려지더랍니다.
교회생활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교회의 목장생활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모임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사랑을 경험합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픔을 내어 놓고도 다시 아픔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도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고 서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성령강림과 성령충만 사건의 최종 결론을 알고 계십니까?
2장 마지막 소절입니다. (44-47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 교회가 그토록 보기를 원하는 셀 목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의 원형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최초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모여 예배하고 각 가정으로 흩어져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셀 목장 모임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현대 교회가 그 힘을 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 대 교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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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 교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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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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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물건을 뺏으려고 애쓰고
* 1주일에 한번 각자 제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성전에 모이고
* 살기 위해 각자 제집에서 밥을 먹고
* 이방인들에게 비난을 받으니
* 일주일에 몇 사람씩 새신자가 교회 나오더라
초대교회와 현대교회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오늘 21세기 - 다시 초대교회의 그 아름다웠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 주님이 보고 싶어하시는 그 신부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종이 몇 년전 미국의 긍휼사역부를 발견했을 때에 긍휼사역부를 안내하는 팜플렛이있었습니다. 거기에 코리아라는 말이 언 듯 눈에 들어오길래 이 긍휼사역부가 어떻게 시작되어졌나 서투룬 영어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극동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여름날 피난에 접어들었지만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여름 옷을 입고 겨울을 나야했습니다. 담요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얼어죽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여름 옷을 입고 겨울을 나야하는 노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요 2장있던 사람들이 1장씩 거두기 시작했고 내가 입어야 할 털 쉐타를 모아 한국 땅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담요를 덮을 때마다 그들은 털옷을 입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옷깃을 느낄 수가 있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민족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긍휼사역부는 시작이 되어졌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신음하는 사람들,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의 이부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바로 양식과 옷을 나워주는 긍휼사역부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에 긍휼사역부를 다 돌아보는 가운데 한 안내인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국때문에 세워진 이 긍휼사역부인데 세계도처에서 구제헌금이 몰려듭니다만 한국교회에서 모이는 구제헌금이 가장 적게 오는 구제헌금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전 교회 앞에서 한분이 제게 충언을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창립 10주년을 맞이해서 연극제를 하고 바자회를 하고 교향악단 공연을 하는 것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참 기쁩니다. 그런데 좀 부담스럽습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연극을 구경하려고 하니까 식구가 넷인데 4만원입니다. 조금 깎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3천원정도면 시내에 나가서도 연극을 볼 수 있는데 한 3천원 내지 5천원쯤 하면 어떻겠습니까?" 빙그레 웃으면서 얘기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구제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교에 빚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연극관람료가 아닙니다. 교향악단 관람료가 아닙니다. 나는 두 눈을 뜨고 보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조금만 힘을 합치면 눈 뜨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라고 하는데, 평생 내 눈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 감사해서 1명이 될는지 20명이 될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 사람들 눈 뜨게 하는데 내 피를 흔적을 땀을 조금 투자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들은 밥을 많이 쌓아놓고 기름진 고기를 쌓아놓고도 안먹는다고 투정을 부리는데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도시락을 싸갈 수 없어서 굶는 결식아이들이 있습니다. 티켓을 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집사님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5만원 주고 사십시오. 눈뜨고 살아가고 두발로 걸어 다니는 것 감사하고 내 코로 숨쉬면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 10만원 주고 사십시오. 미국에서 이런 잔치를 벌였다면 모르긴 합니다만 수억의 구제헌금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집사님 이것은 평생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야 될 구제의 선교의 마당을 펼쳐놓은 것입니다. 교인들이 춤출 수 있는 마당,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마당,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마당, 이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축제의 마당을 펼쳐놓은 것입니다." 집사님께서 "목사님 용서하십시오. 짧은 시간이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이때에 교회에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로 만들어 졌습니다. 21세기 오늘 한국교회에 세계교회에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만큼 이 교회가 10사람 20사람 모이는 작은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모일 때마다 진정으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참된 신앙 공동체, 천국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 공동체를 통하여 지역사회를 섬기고 민족을 섬기는 민족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하여 간곡히 부탁합니다. 강력히 선언합니다.
한소망 가족 여러분!
① 여러분 모두 셀 목장에 참여하십시요.
② 할 수만 있으면 셀리더 - 목자가 되십시요.
③ 목장을 천국 공동체로 만들어 가십시요. 형식적인 모임으로 끝나지 마십시요.
④ 그곳에 새가족들이 찾아 오도록 하십시요.
⑤ 서로 위해 기도하고 서로 전화하고 찾아보고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십시요.
⑥ 부지런히 분가하고 번식하여 천국 공동체를 키워 가십시요.
미국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실이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일련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테레사 수녀가 연약한 사람들을 친절히 돌보는 테잎을 보여주고 비슷한 경험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곧 IG-A 검사 즉,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 검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장면을 테잎으로 보여주고 그룹 안에서도 갈등을 경험하도록 한다음 똑같은 저항력 검사를 했습니다. 이때 사랑의 경험이 갈등의 경험보다 무려 수배나 더 높게 저항력 수치가 나왔습니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사랑이 통하는 신앙 공동체의 경험!
어찌 병마와 싸우는 저항력만 커지겠습니까?
세상의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옵니다.
험한 세상을 승리하는 능력이 거기 있습니다.
영혼이 건강해지고 신앙생활이 건강해 집니다.
마음이 건강해지고 몸이 건강해 집니다.
고독과 우울함, 미움과 원망, 실패와 좌절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자신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해 줍니다.
1세기 다락방 성도들! 그들은 성령충만을 체험한 다음 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각자 혼자씩 뿔뿔히 흩어져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 모여 예배하는 예배의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 자신을 집을 흔쾌히 가정 교회, 셀 목장으로 내려놓고 천국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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