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의 병 2001-12-28 21:11:11 read : 108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6:25-31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동네에 죽음의 사자가 왔습니다. 한달 후면 동네 사람 이 백명이 죽을 것이고 예언했습니다. 동네 사람들 상의한 끝에 이장이 담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깎았습니다. 백 명만 데려가기로 한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칠 백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장이 화가 나서 저승의 사자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백 명만 데리고 갔소, 나머지는 내가 데리고 간다는 소리를 듣고 염려해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기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기나라에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하며 식음전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얼마나 염려가 해로운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염려는 죽음까지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염려를 줄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타임지 기사에 미국 시민들이 하루 동안에 먹어 치우는 수면제의 양이 7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7000Kg입니다. 그러면 염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염려는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문명의 발달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리함은 우리에게 더 많은 근심거리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염려하는 그 문제보다도 문제에 대한 염려가 오늘의 현대인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하고,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염려를 전문적으로 해결해 줄 전문적인 해결사를 요청해야 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가장 인기있는 직종으로 등장하는 것이 카운셀러입니다. 이런 직업이 여러 형태로 우리 사회 속에 요청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예수님의 이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역시 오늘의 우리들만큼이나 많은 염려에 쌓여 살았던 것 같아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었어요. 게다가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자기 수입의 40%를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먹을 것을 걱정스러워 하던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내일 먹을 양식이 없는데, 주님은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그래서 가정을 버리고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먹여 주신다고 하는 분들이 믿음 좋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삶을 걱정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염려하지 말라와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계획을 해야합니다. 계획하고 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을 글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내일을 설계해야 합니다. 내일을 위해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금하신 것은, 내일에 대한 염려스러운 생각을 오늘 중지하라는 겁니다. 내일의 염려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여기에 "메림나테"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세 번 쓰입니다. 그 중에 눅 10장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찾아오신 후, 마리아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무릎 앞에 같이 안방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니 마르다는 어떻게 합니까? 장정 열세 명이 들이닥쳤으니 얼마나 바쁘겠어요.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된장 찌개를 끓이고, 부침개를 하고, 마늘을 다듬느라 정신없이 바쁜데, 옆에서 도와줘야 될 한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어디 갔나?" 하고 안방을 들여다보니까 앉아있더란 말이에요. "음~ 곧 나오겠지" 마늘을 다듬는 사이에 부침개가 탔습니다. 잽싸게 뒤집었는데 늦었어요. 아! 또 가보니까 마리아는 거기에 앉아 있는 거예요. 얼마나 신경질이 뻗칩니까? 탄 부침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서 몇 번이나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릅니다. 파를 다듬고, 양파를 다듬느라 눈물이 나고, 밥은 끓습니다. 그 당시에 압력밥솥이 있습니까? 전기가 있습니까? 마이크로 오븐이 있습니까? 그런데 열세 명이 먹어야 할 음식을 준비해야 돼요.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다가 마르다는 어떻게 합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드디어 마르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어 갑니다. 마르다는 뭐라고 소리칩니까? "예수님! 내 동생이 나를 도와주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당장 명령해서 내 동생을 부엌에서 일하라고 보내십시오!" 마르다가 그냥 뛰어 갔겠어요?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한쪽에는 주걱을 한쪽에는 국자를 들고 가서 예수님께, 열두 장정 앞에서 쇼를 한 것입니다. 한참 퍼붓고 나서 부엌에 돌아온 후,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귀한 손님이 와서 만찬을 차려 드리려고 준비하다가, 동기야 어찌 되었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예수님 앞에 가서 밥주걱을 들고 난리 소리를 치고, 하이 소프라노로 "예수님!" 하며, 악을 써 놨으니... 마르다는 다시 예수님 보기가 미안했을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음식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분주하다'는 단어가 바로 염려예요.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는 옳은 일을 했고, 마르다는 잘못된 일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마르다의 실수는 기쁜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분주한 마음으로, 염려에 가득 차서 했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혼란하게 합니다. 육신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부탁이 아닙니다. 강한 명령입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일을 설계해야 합니다.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지 말아야 할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염려하지 말아야 된다고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만 주실 뿐만 아니라, 염려하지 않는 방법을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 창조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두 가지를 대조해 주셨습니다. 목숨과 음식, 몸과 의복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동물과 다르게 만드신 것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특별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논리가 무엇인줄 압니까? 우리 몸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옷을 걱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만드셨는데 양복이 없다고 염려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늘 머릿속에 그것을 두어야 합니다.
망하게 하시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교회 안에 이신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신론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어요.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것은 믿지만,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그 만드신 창조물을 유지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게 이신론이에요.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참새가 떨어져 죽으면 우연히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다 이신론자들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서 골로새서 2장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본문은 26절이하를 보면 새와 인간을 대조합니다. 차이점은 뭐예요? 새는 먹을 것을 심을 수도 없고, 거둘 수도 없고, 저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새는 염려하지 않고 먹고살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심을 수 있고, 거둘 수 있고, 은행에 저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 줄 아세요? "심는 능력과 거두는 능력과 모으는 능력이 없는 참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즐거이 노래하며 살건만, 그러한 능력을 받은 너희들이 어찌하여, 먹을 것을 위해, 이 땅에 살 것을 위해, 집을 위해, 염려한단 말이냐!" 여러분, 이 메시지를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 허우적거리십니까? 왜 그렇게 아우성이십니까? 무엇이 걱정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십니까? 이 참새보다, 들에 핀 한포기의 풀보다 여러분의 존재는 더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신뢰하지 않으십니까? 염려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아니라, 염려만은 그리스도인은 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끊으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둘째,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지를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 목숨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겠니? 없다는 말씀입니다.
염려해서 일이 해결하게되면 염려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또 두 가지 대조를 말씀하십니다. 백합화와 솔로몬을 비교하십니다.
사실 백합화는 우리 나라 꽃으로 말하면 아네모네 꽃입니다. 어찌 됐던 들에 있는 백합화와 솔로몬의 차이가 뭡니까? 백합화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예요. 개는 얼굴에 흙이나 검정이 묻으면 앞다리로 비빕니다. 흙을 털어 내요. 화장하는 거 아십니까? 고양이도 화장합니다. 털을 예쁘게 하기 위해서 볼을 비벼요. 등의 털은 어떻게 멋을 내지요? 서로 핥아 줘요. 그러나, 식물인 백합화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하실 당시에, 최고의 멋을 아는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솔로몬이었어요. 그는 부인만 해도 1000명이나 되었어요. 매일 부인이 바뀌니 손질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요사이 여인천하를 보니 수많은 아내들 속에서 솔로몬도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솔로몬과 들꽃을 비교하여 보는 것입니다. 상대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논조입니다. 들꽃이 염려해서 아름답더냐! 너희가 왜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살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염려거리에 끝이 있던가요, 여러분? 염려거리를 찾고 싶으십니까? 뉴스를 들여다보십시오.
물을 먹지 못합니다. 콜레라 때문에, 대장균이 득실거립니다. 기름 값, 전세값이 오릅니다.
정치가 어수선합니다. 다 염려 거리에요.
우리가 염려해서 해결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한 기독교인이 사업을 하는데 힘이 듭니다. 새벽예배를 다니는데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요? 예,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생각했습니다.
'수요 염려 상자' 라는 상자를 만들어 놓고, 염려거리가 생기면 종이에다 쓰는 겁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어음 2000만원 막아야 됨' 잊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 염려하는가? 수요일만 되면 팔을 걷고 "음, 오늘 한번 염려해보자!" 하고는 상자를 열고 염려를 풀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염려를 하다가, 아주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요. 지난 금요일날 너무 염려가 되어서 염려상자에 넣어 놓았던 것 중 자기가 전혀 노력이나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는데, 5일이 지난 후에 해결되어 있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썼는지 아세요? '수요 염려 상자'라는 재미있는 책을 썼어요. 그 책의 결론은 "여러분, 제가 해 보니까 염려는 아무 효험이 없습니다. 무익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에요. "너희가 염려함으로 너희 목숨을 한 달이나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염려함으로 너희의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방법은 나의 신분을 묵상하는 겁니다.
31절,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에 염려의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31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의 삼위일체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32절을 보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천부께서.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설명하시고 이방인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대조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이것은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이 특권!
구약성경을 읽어보시면 그 어떤 선지자도,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는 단어를 쓴 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다 이루시고 나서, 그 날 이후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신분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왜 염려가 있는가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신분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러한 뉘앙스의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몰라요.
6장 6절을 보세요.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7절,8절 보세요.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결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거예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얘들아! 너희는 이 땅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염려거리로 삼을지 모르지마는, 너희는 그것이 너의 걱정거리가 되어서는 안돼! 왜? 그 걱정은,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너희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 너희는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는지 아니?"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음식과 의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음식과 의복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에요. 음식과 의복이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법으로 음식과 의복을 공급받아야 하는가? 염려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함으로, 하나님이 자동으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공급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왜 염려합니까? 눈이 어두워 땅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염려하는 거예요. 이 땅에 살 90년, 100년만 생각하니까 염려하는 거예요.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의 몸이 밝아질 줄 믿습니다. 왜 염려합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속으로 돈을 섬기기 때문에 염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염려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염려는 어제도 찾아 왔고, 오늘도 우리를 괴롭히고, 내일도, 이 설교를 들은 다음날도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와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나요? 하늘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묵상하시고,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묵상하시고, 우리의 신분을 묵상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있는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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