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행복한 자로다 2001-12-28 21:08:42 read : 117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신33:24-29
한국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는 저주가 많이 담겨져 있는데 은연중에 축복을 빌어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 코를 풀어 줄 때 코에다 수건이나 휴지
를 대고 '흥해라' 하는 것입니다. 코를 안풀면 욕을 하며 등을 때려 가면서도 '흥해라 흥?'
합니다. 욕을 해 가면서도 '흥해! 흥! 어서 흥해라!'라는 말은 은연중에 '흥'(興)하기를 비는
말입니다.
행복은 인류의 소망이며 목적입니다. 그렇기에 인류는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은 무신론자나 유신론자나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바램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인류는 자신을 위해 행복을 빌기도 하고
이웃을 위해서 행복을 빌어 주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수부귀다남자'하고
복을 비는 인사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복으로 소망하던 것이
오래 사는 것, 부하는 것, 벼슬하는 것,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진정
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문제에 있어서 '수즉다욕(壽則多辱)'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살면 복이 아니라 욕이 된다는 뜻입니다. 부의 문제는 돈을 많이
벌고 부해지면 허영과 부패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기에 이것 또한 복이 될 수 없습니
다. 아들을 많이 낳으면 복입니까? 아들을 많이 낳으면 못된 아들을 낳기가 쉽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동양의 행복개념은 참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堯)가 화북 지방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땅의 봉인(封人)이 요에게 "임금님께
재물을 많이 취하며 아들을 많이 낳고 장수하시도록 기원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는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습니다.
"그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재물이 많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가신 일이 많을 것
이며,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끊어질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오래 살면 그만큼 창피
한 일을 당하지 않겠는가. 이것들은 덕을 쌓는데는 한갓 쓸모 없는 것들이 아닌가?"
물질이 곧 행복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설입니다. 신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실
때, 바로 주시지 아니하고 천사에게 맡기시어 '너희가 갖다 주어라' 하셨다고 합니다. 명을
받은 천사들은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질 것이 마음에 좀 떨떠름해서, 시샘이 나서 신에게서
위임받은 그 행복을 숨겨두기로 하였습니다. 한 천사가 "바다 깊은 곳에다 숨겨둘까?" 했더
니 다른 천사가 말하기를 "그건 안되지. 사람들은 재주가 많아서 거기 숨겨두면 이내 찾아
낼 것이야"합니다. "그럼,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갖다 감춰놓을까?" "그것도 안돼. 사람들은
모험심이 많아서 거기까지 뒤져서 행복을 다 찾아낼 것이야." 그래서 어떤 천사가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란 제 머리만 믿고, 제 재주만 믿고 자만하기 쉽다. 그러니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가슴에다 행복을 숨겨두면 못 찾을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들은 제 머리만 믿
고 자만하면서 가장 가까운 가슴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더라는 이런 이야기입니
다. 일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환경과 행복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도 사람은 행복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환경 속에 행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기대합니다. 더 나은 좀더 좋은 환경만 꿈꾸고, 몸부림치고,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
하고 있기 때문에 영영 행복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최고의 선의 상태를 행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
수님은 행복에 대해 '존재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가 예수를 만남으로 세리라는 존재에서 제자라는 존재로 변화했을 때 그는 행복했
다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 기준을 돈에 두었던 세리가 가치를 그리스도에 두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삭개오가 여리고의 세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세상사람들이 볼 때 행복했지만,
사실은 불행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을 때에 비
로소 그는 행복한 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행복을 몰랐던
자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의 회심사건을 통하여 존재의 가치가 180도 변화되었을 때에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행복은 모든 인간의 주요한 관심사임에 분명합니다. 그렇
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흔히 돈이 많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
다. 또 권세가 있으면, 매사에 형통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생의 비탄과 허무가 찾아들 수 있습니다. 실로 돈과 권세가 가져다주는
흡족함은 마치 성경이 말하는 대로 '푸른 나무의 무성함'같이 잠시 잠깐일 뿐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의 70%가 정신병 유발 가능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문명의
발달과 물질이 행복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 심리학자의 통계를 빌리면,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18-34세이며 신앙
인이 불신앙인 보다 여섯 배나 더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데이터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만이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이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복이라는 단어를 분
석해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행복이란 하나님의 축복이나 의로운 일에 대
한 하나님의 보상으로서 인간이 받는 복리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마카리오스'라는 단
어를 사용하는데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의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신의 존재가 있는 곳에만 행복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의 존재가 곧 행복입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신과 인간과의 교제
의 관계를 통해서 행복이란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행복의 근
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실 때만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순간부터 출발합니다.
둘째로 복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양적인 개념에서 복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많이 받으면 많은 복을 받은 것이고, 적게 받으면 적은 복을 받
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는 복의 개념은 동양적 개념과는 정반대로 주는 것입니다.
'복'(blessing)이란 단어는 '피의 제사'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복이란 '피의 제사'입
니다. 즉 자기 희생입니다.
세계 역사상 소유한 자는 다 불행했지만 주는 자는 다 행복했습니다. 슈바이쩌, 테레사 수
녀, 주기철 목사님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가지므로 누리는 행복보다 줌으로써 누리는 행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원수에게까지 주라고 합니다.
스데반의 사건 즉 돌무더기 속에서 원수에게 사랑을 베푸는 거룩한 모습을 통해 성경이 우
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주는 자가, 끝까지 주는 자가 승리자이며 행복자라는 것을 웅변하고
잇는 말씀입니다. 소유의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로 주님이 지으셨습니다. 예배의 정신은 드림의 정신입니다. 행복은
드림의 정신에서만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것입니다.
셋째로 복이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는 말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복입니다. 친구를 위로하는 것이 복입니다. 친구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복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복입니다. 이웃을 저주한다는 것은 축복에서 멀어지는 행위입니
다. 복수와 원한의 감정은 복수하는 자와 복수하는 모두에게 파멸을 가져옵니다. 용서는 용
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를 다같이 축복합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순교했던 그 많은 사람 중에 이런 시를 마지막으로 읊고
간, 이런 유시(遺詩)를 남기고 간 믿음의 선배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낼 것입니다.
나를 구타하십시오. 나는 신음하는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가 백성을 향한 생의 마지막 축복을 통하여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
한자로다'(29)라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한'에 해당하는 히
브리어 '아쉬레'는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그
러나, 과연 우리 사람들은 이 세상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까? 보통사람들은 돈
과 권력만 있으면 튼튼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추구합
니다. 물론 돈과 권력이 사람이 안전하게 사는 조건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안전하고 튼튼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의 비탄과 허무에 빠져 사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
히려 돈과 권세로 불행해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동안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안전하고 튼튼하게 살 수 있습니까? 돈과 권력보다는 전능하
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인생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소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시며 방
패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그 능력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안전하고 튼튼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번영과 안전의 근원
이시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하
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12지파 하나 하나에게 유언적 축복을 선포하는 중에 아셀 지파에게
축복을 선언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본문 24-25절에 의하면, 먼저 아셀 지파는 인구가 번창
하는 행복한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과,
비옥한 기름진 옥토에 거주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것과, 아셀 지파가 사는 동안에 길이길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세의 축복은 너무도 훌륭한 축복이었습니
다. 이 축복의 내용을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셀 지파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 복을 더많이 받은 지파다. 그들은 형제들에게서 귀여움
을 받으며, 그들의 땅은 올리브나무로 가득히 찬다. 쇠와 놋으로 만든 문빗장으로 너희 성문
을 채웠으니, 너희는 안전하게 산다." 즉 아셀 지파가 사는 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
아 안전하고 튼튼하리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축복 기도 속에 나오는 말, "네 사는 날을 따라
서 능력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안전하리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
님께서 능력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심으로, 아셀지파 사는 동안에 튼튼하고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능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도비'로 '튼튼하다', '안전하다'는 뜻입니
다. 즉 하나님께서 아셀 지파를 능력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임으로, 흔들리지 않고 넘어
지지 않고 안전하고 튼튼하게 살게 되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49장 20절의 야곱의 축복의 내용을 보면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모든 지파는 농사를 짓든지 목축을 해서 자급자족하게 되
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셀 지파에게 더욱 기름진 것을 주셔서 왕
의 진수를 공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보기에는 아셀 지파를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신다는 뜻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 속에 '왕'의 개념이
없을 때입니다. 이 개념이 생긴 것은 출애굽하고 나서도 몇 백년이 지난 후입니다. 이런 점
에서 볼 때 이 말씀의 뜻은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지파에게
흔치 않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든지 다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더 좋은 것이 있습니
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 때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더 좋
은 주일이 있지 않습니까? 저녁에 가서 밥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텔레비젼 켤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마치 왕의 진미라도 먹은 것처럼 배부른 날이 있습니다. 또 수련회나 부흥회 때
평소보다 기름진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셀 지파는 그렇게 큰 지파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진수를 공궤
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공동체에 있게 되면 공동체가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봉사를 해도 아주 특별하게 아름답
게 하는 사람이 있고, 설교를 들어도 아주 맛있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유독 기도의 응답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런 사람
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일을 해도 재미있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잇어도 다
른 모든 봉사가 힘을 얻게 됩니다.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
습니다. 무디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 찬송을 인도하던 생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
셀 지파처럼 특별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찬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킴으로써 부
흥의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참으로 행복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백성이었으며, 풍성하고 기름진 땅을 약속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방패와 칼
이 되어 그들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세의 축복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아셀지파에게 큰복을 주셨다는 것을
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크고 훌륭한 복을 주신
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로 볼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
성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의 하
나님의 백성인,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복주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
문에,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복을 받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
가 아셀지파에게 축복한 내용에 버금가는 복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주신다는 것을 확
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튼튼하게 살며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옛날 아셀지파
사람들에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십
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살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일입니다. 미국행 정기선 한 대가 영국의 항구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배엔 노인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전쟁과는 거리가 먼 승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때이니 만큼 그 횡단은 매우 위
험스런 모험이었습니다.
그 배의 선장은 출항한 지 얼마 후, 행방을 알 수 없는 어떤 배로부터 다음과 같은 은밀
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항로를 이탈하지 말고 곧장 나아가라. 옆으로 빗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도움
이 필요할 땐 다음의 코드로 무선 통신을 보내라!'
선장은 다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먼바다에 적의 순양함이 나타났습니다.
선장은 자기가 알고 있는 코드로 급히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적의 순양함이 나타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
곧 보이지 않는 배로부터 회신이 왔습니다.
'곧장 나아가라, 우리가 옆에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친절한 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선장은 항로를 이탈하지 않았
습니다. 그러자 적의 순양함은 이 정기선을 본 것이 틀림없었지만 아무해도 끼치지 않고 오
히려 도망치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배는 마침내 무사히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선장
은 갑판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바다 밑에서부터 커다란 영국 잠수함이
위풍 당당하게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잠수함은 비록 눈에 띄진 않았지만 줄곧 정기선을 따라오면서 언제든지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을지라도 주님은
계곡에서 광야에서나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풍요로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거친 광야와 막강한 대적으로부
터 보호하시어 그들을 행복한 백성으로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따스한 팔을
벌리시어 우리를 안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
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
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도 끊을 자가 없다고 담대하게 선언하였
습니다. 이뿐입니까?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
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고 승리의 찬가를 부르기까지 하였
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
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였습
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능력과 권세로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하
나님은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셔서, 안전하고 튼튼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우리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
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복을 베풀어주
신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며, 안전하고 튼튼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에덴 낙
원을 마련하여 주시고, 거기서 안전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고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도 우
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불순종하여 죄를 지어서,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에덴 낙원에서 추방당하여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살게 되는 불행을 만
나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상실한 낙원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아들로 우리 인간을 대속하게 하
여 우리 인간을 구속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
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장차 메시야를 세
상에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때가 이르렀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이 세상에
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하시
며, 멸망받지 않고 영원히 튼튼하고 안전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안전하게 살도록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튼튼하고 안전하게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께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안전하고 튼튼
하게 살 수 있도록 복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서 친히 도와주시고, 처소가 되어 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실 때만 누
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은총을 입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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