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성도는 2001-12-28 21:07:00 read : 117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살전2:17-3:10
얼마 전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택배회사근무 중 비행기 고장으로
무인도에 표류합니다. 그때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대화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 대화 상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공을 가지고 그 섬을
탈출하다가 그만 공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진정한 친구 하나를 잃어버리는 아픔으로 괴로
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혼자 살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정
과 교회 두 군데를 만드신 것입니다. 가정에 대해서는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
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라고 부부가 하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무슨 말씀입
니까? 교회라고 하는 곳은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연구했습니다. 정말 무엇 하는 곳이 교회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
과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교회는 지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지체들이 모여 진 것입니다.
KBS 아침 마당을 보면 가끔 가정의 문제들을 다루는 상담 장면들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얼마 전에 잠깐 보니까 고부 갈등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구역이야기이며 새벽예배 드리고 온 이야기부터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며느리와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합니까?
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교회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기한 지체의 모양입니다. 내가 아프면 교회가 아프고 교회가 아프면 내
가 아픕니다. 이것을 바울은 발견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힘듭니까? 세상방식으로 훈련된 분들이 와서 일을 함께 하
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당회를 하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교회 건축을 하는데 공사하시는 장로님은 용적율이 얼마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건축 교
수 장로님은 교회의 미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음악을 하신 분은 음향을 생각해
야 하니 원형으로 지어야 한다. 정치하시는 분은 다른 교회가 와야 하니 더 크게 지어야 한
다. 교사 출신 장로님은 교육적으로 방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문제 삼으려면 교회 다니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 때문에 교회를 섬기지 않으려는 분도 계시는 줄 압니다. 이해는 됩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생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교회 처음 시작할 때 어떤 한 분이 오셨습니다. 한두 번
참여하시다가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전화 왔습니다. 요사이는 몇 분이 예배
를 들이고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은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크던 작던, 많이 모이던지 적게 모이던 함께 예배드리는 지체들 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으며, 내가 그 속에서 역사를 이루어간다, 나로 인해 이 교회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체들로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교회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가상교회 때문에 예배 드
리는 것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반대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게임은 혼
자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지체들과 함께 드릴 때 영혼이 만족되는 영적인 부분이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의 관계의 중요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
면 옆에 있는 지체들과 어떤 관계를 갖아야 합니까?
먼저, 위로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3장 2절에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
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7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어떻게 이 교회가 점점 소문나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들의 신앙이 이렇
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그 비결을 하나님은 이렇게 정의해 주십니다. "그들은 서로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로 뭉쳐 있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여러분! 왜 수지교회에 나오시게 되셨습니까? 말씀의 위로 때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의미의 위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사람을 돕기 위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옆에 붙어 서서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거예요.
세상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위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
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사도 바울이 갓 태어난 새 신자를 위로한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7절을 보십시오. 누구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에게'
너희가 누구입니까? 1년도 안 된 햇병아리 새 신자. 예수를 안 지 1년도 안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로부터, 그 삼층천에 갔다온 바울도 위로를 받았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
다.
여러분, 누구든지 위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
다. 아닙니다. 때때로 이유도 없는 낙심이 저를 찾아와요. 열등감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많이 있지요. 자꾸 제가 주일 날 기웃거리면 위로해주십시오,
참으로 건전한 관계는 어떠한 관계입니까? 서로 서로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아내가 남편
을 위로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고, 자녀가 부모를 위로하고, 부모가 자녀를 위로하는 관
계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위로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위로의 말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주님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
실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 분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보혜사"입니다. 보혜사가 무슨 뜻입
니까? 파라클레토스! '파라'는 '옆에' '같이' 'With'라는 뜻입니다. '옆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별명이십니다. 위로자입니다.
오늘부터 결심하십시오. "주여! 내가 주일날 한 번 만나 다섯 사람이상 위로하고 돌아가겠
나이다! 제가 제 아내를, 제가 제 남편을, 제 자녀를 위로하겠습니다.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겠습니다. 그를 격려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위로의 관계를 맺어갈 때, 이 교회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교회가 살아 움직여요. 지체들이 변화되고 내가 변화된다는 것입니
다.
또한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3장 6절을 보세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
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
니"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 두 번 나와요. '간절히 보고자' 계속 나오죠? 2장 17절 보세
요.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
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조금 전엔 '간절히 보고자'였으나, 여기서는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입니다. 그리고 얘기
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떠난 것은' 여기서 '떠난다'는 단어도 부모가 자식을 떠날 때 쓰는
단어였습니다. '어느 부모가 육체적으로 헤어져 있다고 해서, 그 자식을 마음에서부터 잊어
버리겠느냐!' 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3장 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중
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참다 못하여' 아덴에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 주었
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던지.
'참다 못하여'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사도행전 17장부터 제 2차 전도 여행을 읽어보시면, 바울이 아덴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기
대가 너무 컸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덴에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로마와
세계 철학의 본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덴에 들어가 철학적인 설
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어려울 때
옆에 서 있는 동역자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디모데를, 그 어려운 순간에 데살
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떠나보내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사랑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
습니다. 그를 생각해서 나를 희생하는 관계였어요. 그 단어를 3장1절에 우리가 읽은 말씀으
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참다 못하여' 3장 5절에 보세요.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참다 못하여'라는 이 단어는, 풍선에 물을 넣으면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물을 조금 더 넣으면 퍽 터져 버려요. 이것이 '참다 못하여'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싶어서 참았어요. 그런데 그 감정이 어느 순간 참다 못하여 내가 디모데를 보냈다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을 그리워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고 얘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까? 예배만 드리고 간다고 될까요? 5년, 10년을 예
배만 드리고 갔다왔다 해 보십시오. 주일예배에 딱 한 번 나와주는 교인이 있어요. 나와 주
는 교인이에요. 왔다가 그냥 갑니다. 다음 달도 오셨다가 가십니다. 5년 후에도 오셨다 가시
고, 그 다음 10년 후에 보면 왔다가 안 보입니다. 혼자 쓰러지는 거예요. 왜 매주일 식당에
가서 식사하시라고 그런 줄 아십니까? 등록시키려구요? 밥이 남아서요? 아닙니다. 교회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론"을 몰라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
요. 모든 신앙의 축복이, 여러분의 행복이 교회에서 나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장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
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것은 전혀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 보고 내
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한번 깊이 상고하면 바울의 그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요,
종말론적인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의 자랑이 되는 것(고후1:14)"입니다.
이제 바울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행복해하며 무엇을 영광으로 생각하는지를 봅시다.
첫째는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극히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다. 유명
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행복론'에 보면 '사람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행복하다'라는 말
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
리 돌아보아도 보고 싶은 사람 하나도 없으며, 다 밉기만 합니다. 이리 생각해도 밉고, 저리
생각해도 분합니다. 이렇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
야 합니다. 지금 보지 못하지만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두 번째는 그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로 만납니다. 만나서 눈이 마주칩니다. 이게 행복입니
다. 행복이라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의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또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교인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그렇게
있습니다. 그래 행복합니다. 더욱이 그 대상이란 바로 내가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한 사람들인
것입니까? 한단 높은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H. 뢰인퀴저라고 하는 사람이 쓴 「만일 나에
게 동전 한푼이 있다면」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
니다. 어떤 노인이 한 서점에 와서 얼마만큼의 전도지를 샀습니다. 사서 손에 들고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는 서점주인에게 한마디합니다. "내가 늘 이렇게
와서 전도지를 사갔는데 어쩌면 오늘이 그 마지막날이 될 것같소. 내 몸이 전과 같지 않아
자꾸 쇠하여져서 오늘은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나왔지요. 전도지를 사러 다시는 못올 것 같
구려." 그리고는 덧붙여 말합니다. "내가 이 전도지를 가지고 시간나는 대로 길거리에 나가
벌써 수십 년 동안을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시간에 생각해보니 내가
전도지 준 사람 가운데 예수믿게 된 사람이 과연 있는지, 이 전도지 효력이 있는지, 효력이
있어서 예수믿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만나보고 싶고, 만나면 참으로 좋겠구만 나는 여
태 전도지만 주었지 하나도 그 결과는 모르고 산다는 것이 마음에 괴롭힙니다. 어쨌든 오늘
이 나의 마지막 전도의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서점 주인이 그 이야기
를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저쪽 구석에서 책을 고르던 신
사 하나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사가 가까이 와서 "선생님, 내 얼굴을 모르시겠습
니까?" 묻습니다. "모르겠는데요---" "물론 선생님은 나를 모르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선
생님을 압니다. 12년 전에 선생님이 내게 전도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내가 예수믿고 하
도 감격해서 나도 그리하여야겠다하고 지금까지 12년 동안 전도지를 사서 지나가는 사람,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씩 주는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노인은 그 사람을 붙잡고 한 사람 만
난 반가움에 '내가 헛된 수고하지 않았구나'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전도해서 예수믿는 사람,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그
런 사람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누구,
누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로해서 예수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기쁜 것입니다. 만일에 이렇게 내가 전도해서 예수믿는 사
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적어도 주님 앞에 갈 때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토요일마다 기도할 때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마는 토요일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내일 주일에 누군가 하나를 데리고 교회에 나와야 할 터입니다. 적어
도 토요일은 아예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지명해서 만나고 전화도 하고 내일 교회에 나오면
냉면 산다, 하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잘 인도해서 한 사람을 척 데리고 나와서 예배를 드려
야 이게 진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달랑 나왔다가 가버리면 그리 바람직한 것
이 못됩니다. 어쨌든 나로 인해서 예수믿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또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까지 인정받을 수 있는, 내가 아니면 저 사람 예수믿지
않았을 거라고 하는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 나는 행복한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둘인데 하나는 예수를 잘믿고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으라 해도 안믿습니다. 이제 숨을 거두려 할 때 두 아들 손
을 함께 잡고 기도한 다음에 한 아들 보고는 "Good bye!"라하고 한 아들 보고는 "See you
again."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아들이 "어째서 나에게는 Good bye!라고 하십니까?" 하고
묻자 "너는 예수를 끝까지 안믿으니 너와 나는 영영 다시는 못볼 게다 그래서 Good bye!다.
네 동생은 예수를 믿으니 내가 하늘 나라에 가 있으면 다시 만날 것이다. 그래서 See you
again. 아니겠니" 하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Good bye!냐 See you again.이냐 이것이 문제
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날에 다시 다같이 영광되게 만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나의 기쁨이요, 나의 영광이다하는 것입니다.
훗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다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영광과 기쁨과 면류관이 무엇인가? 100억 번 통장
입니까? 아니면 금뺏지입니까?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면
류관과 기쁨과 영광은,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어요.
"너희가 이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옆의 성도와의 관계에서, 그가 고난 당할 때 위로하고, 그가 낙심할 때 그를 일으켜 세우
고, 그가 눈물 흘릴 때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 훗날 하나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 어디서 신앙생활 했니?"
"예. 수지 교회에서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성도 가운데 너와 붙어 있는 사람, 너와 친
밀한 관계를 이룬 사람, 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니?" 이렇게 물으실 것을 이 자리에서 생
각해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4절부터 8절을 잘 보고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의 관계는 어떤 관계였는지 아십니까?
상대가 굳게 서면 나 자신도 사는 관계였어요. 한국 속담에 정반대 되는 속담은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 반대되는 의미예요. 너희가 굳게 섰은 즉, 이제는 우리가 살리라! 여
러분, 우리가 이렇게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한 형제가 고통을 당합니다. 그를 위해 중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살아났어
요. "아! 그가 살아났구나! 이제는 내가 살리라!" 이것이 바로 서로를 성숙시키는 관계입니
다. 바울은 게다가 9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교역자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하고 말씀합니다. 교역자
의 기도에는 사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많지 않습니다. 교역자는 언제나 교인들을 위해서, 여
러분의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사업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교역자는 언
제나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잊
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교역자가 가지는 진심입니다.
바울은 그리고 나서 기뻐할 뿐만 아니라 감사했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계속 성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1절부터 13절의 내용입니다. 11절에 무엇을 위해 기도했나
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의 튼튼한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12절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끼리 서로 사랑할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결과 13절에서 그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서
기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교역자와의 관계란 아주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친척이다 자녀다 뭐
다 해봐도 교역자와 여러분의 관계만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친구라고 해 줄 사람이 누구입
니까? 내 임종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줄 사람, 내 장례식을 인도해줄 사람이 누구
입니까? 교역자와의 관계란 아주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는 여러분을 생각하
며 기뻐하고 여러분은 교역자를 생각하며 기뻐하고 의지하고--- 그것이 바로 교회와 교역
자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교역자의 마음, 그에게는 근심도 있으나 기쁨도 있고 기도도 있으
나 감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도 있습니다.
여러분, 최근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 사람의 믿음의 성숙
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해 보신 적이 있는가요?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
해 여러분의 물질을 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서로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내 옆의 사람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는 무엇입니까?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요, 친밀한 관계요,
서로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머리로만 안다고 되는 것
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있어요. 여러분 알잖아요? 부부간에 그렇게 사랑하
며 결혼했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성도간에 한 몸이라 그랬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 왜
그런지 아세요? 그 대답이 2장 18절에 나와요.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태권도 4단이 막은 게 아닙니다. 사탄이 막은 것입니다. 사탄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
을 수 없어요. 사탄은 현존하는 넘어뜨리려고 일하는 존재예요. 저는 왜 관계가 파괴되는가
를 볼 때, 이유를 다 따져 보면 이유가 없을 때가 있어요. 이유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관계가 틀어져요. 왜 그래요?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단 말이에요. 왜 그래요? 사탄이 그렇게 하는 거예
요. 다른 무엇보다도 사탄은 성도간에,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해요. 성도와 성도간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교회를 주셨어요.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많이 소문이 나
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성도의 관계입니다. 어떻
게 해야 합니까? 위로해 주십시오, 친밀하게 서로 붙으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성숙하게 하는
지체들이 될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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