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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용서합니다
    2001-12-28 21:01:18   read : 1207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눅23:33-38

    선교사들이 선교훈련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 서약에 앞서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 가장 고심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처음에
    무슨 말을 써야될 것인지를 망설입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귀하게 생각되
    는 것을 제일 먼저 쓰려고 생각하니까 만감이 교차한다고 합니다. 가령 "내가 사용하던 물
    건을 놔두고 가는데 이 세상 떠나면 이것은 누가 가져라"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래된 선교부에 가보면 가족들이 모두 순교했기 때문에 그 짐을 줄 사람이 없어서 50년,
    70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선교부 창고에 주인 없는 짐만 덩그러니 남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는 가슴이 매입니다. 또 "우리 부부가 만약 죽는다면 이 아
    이는 큰집에 맡겨라. 내 작은누이에게 맡겨라" 할 때 반드시 그 양육자들과 협의한 다음에
    유언장에다 기재합니다. 어쨌거나 선교사가 제일 첫 문장을 무엇으로 써야될 것인가를 깊이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현장으로 가봅니다. 주님의 일곱 마디 유
    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그 첫마디 유언장을 우리가 개봉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에 달리셨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데이거나 예리한 것으로 손끝만
    찔려도 아픈데, 큰 대못으로 손목과 발목이 박힙니다. 그것도 오징어 말리듯이 몸을 쫙 펴서
    힘을 균등하게 줄 수 있게 못을 친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못을 쳐서 손에다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을 때까지 계속 비틀거
    리다가 마지막 고통 가운데 절명하는 순간까지 십자가의 아픔이 그를 파고 들었습니다. 그
    를 향해서 사람들은 침을 뱉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신포도주를 먹이면서 뺨을 때립니다. 한
    사람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그 머리에다 왕관 대신 가시관을 깊숙이 찔러 넣습니다. 예
    리한 가시가 그 머리에 박히고 그 박힌 자국마다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조롱의 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쳐대기 시작합
    니다. "이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라, 십자가에 죽이라." 또 어떤 사람은 외쳐댑니다. "네가 정
    말 네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뛰어내려라. 다른 사람 많이 살렸잖아. 한번 뛰어내
    려라." 마술사가 마술 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주께서 첫 번째 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죄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죄, 그것이 인간을 불행케 합니다.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중독성이 있다는 말은 물질이나 행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중독은 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편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처음에는
    아편이 참 재미있고 신기해서 다른 사람이 다 하는 것을 나도 한번 경험하겠다 싶어 시작한
    다고 합니다. 한번 해보면 한번으로는 조금 아쉽습니다. 두 번, 세 번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
    편을 몸에 꽂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생애로 바뀌어버립니다.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편
    의 생애를 삽니다. 죄가 그렇게 중독성이 있습니다. 처음에 지었던 조그마한 죄들이 모이고
    모아져서 나로 하여금 죄를 살아버리게 만듭니다. 내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 됩니다. 죄가 있는 곳마다 한숨이 있고 슬픔이
    있고 곤고가 있고 그 죄가 있는 곳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독성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이웃까지도 고통을 주
    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영향력은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살고있는 이 사회를 아프게
    합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그처럼 사랑했던 부부관계가 깨져버립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그 즐
    거웠던 사회가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죄의 중독성도 모르고 죄의 영향력도 모를 뿐 아니라 죄가 주는 결
    과도 모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게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
    다면 사람들은 죄를 안 지었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
    에게 만약 지옥을 단 1분만 보여준다면 세상에 죄 지을 사람은 없다." 영원을 향한 멸망, 영
    원을 향한 저주, 영생을 향한 치욕과 고통을 죄가 안겨주고 맙니다. 죄는 이처럼 잔인한 것
    입니다. 가공할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첫 번째 장소가 죄
    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입니다. 천사가 예수님 이름을 가르쳐 줍니다. "아들을 낳
    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니라." 첫 번째로
    이름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 가르쳐주십니다. 주께서 나를 처음 만나주신 장소가 죄입니
    다. 사람들은 좋은 것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것 좋아합니다. 귀한 것 좋아합니다. 영광스러운
    것 좋아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가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
    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신 장소는 낮은 자리, 죄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찾아오심을 세상
    의 다른 용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은혜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주께서 나를 제일
    처음 만나주신 장소가 죄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누구든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교만해
    질 수가 없습니다. 또 주께서 나를 만나주신 장소가 죄라면 누구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아
    무도 찾아주지 않고, 누구도 외면해도 그 분은 오십니다. 오셔서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유언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
    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입니다. 죄를 알았더라면 사람
    들은 죄 안 지었을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실천의 기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 저주
    한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실제
    로 십자가의 그 고통과 저주 속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각하는 것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내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는 착각입니다. 천만에요. 착하고 좋은 생각만 할뿐입니다. 실제로는 악한 놈들이에요. 우리
    속에 악이 얼마나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에 대한 소망은 있지만 실제로 사랑을 못하
    고 있지 않습니까? 감옥에 있는 흉악무도한 죄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봐도 참 선한 생각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속지 마십시오. 실천할 때까지는 나는 좋은 사람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서 자기가 하신 말씀 그대로,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 속에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향해서 조그마한 험담만 해도 저녁에 잠을 못 자는 인생인데 주님은 그 고통, 그 아픔,
    그 떨림 속에서도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천의 기도입니다.
    그런가하면 여기 우리 주님의 기도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눈에는 눈으
    로, 이에는 이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정신은 사람이 한
    번을 찌르면 열 번 찌르고 싶은 보복심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 찌르면 하나 이상 안 된
    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함무라비 법전은 반드시 보복하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하나 때리면 몇 배로 보복하고 싶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
    분, 사랑이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랑하는 사
    람은 참 적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못합니다. 우리는 비난할 것 다 비난하고 욕할 것 다 욕하고
    흉볼 것 다 흉보고 사랑하려고 듭니다. 사랑에서 용서를 빼면 재도 안 남습니다. 마지막엔
    아무 것도 안돼요. 용서가 사랑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을 하려고 드니까 우리에게 사랑이라
    는 단어만 있지 사랑하는 삶이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향해서 그처럼 고통을 주는 사람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나를 해칩니다. 그 악독이 나를 해칩니다. 미워
    하고 있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미워하고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용서하지 못하
    고 있으면 태산을 지는 것 같은 무거운 인생의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
    듬어 주는 위대한 힘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에 사랑의 색깔을 표현해 본다면 용서입
    니다. 누구나 다 교회에 처음 찾아 나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
    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 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
    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용서가 중요합니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용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용서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기적을 체험하
    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몸으로 기적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용서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이 말씀은 용서의 선언이요 대헌장이요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절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모질고 쓰린 아픔을 온 인류가 감당해야 될 고통을 한 몸에 지금
    걸머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
    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
    니다. 왜요? 그분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절정이요 용서를 완성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가 이웃들에게 오해 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
    발당하고 억울함이 있을 때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
    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우리는 용서가 어떻게 가
    능한 것입니까?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평안도 천국도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기도
    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고통이 심하면 심할 수록 모질면 모질 수록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여" 왜요? 그 아버지가 그분을 이 땅에 보내주실 때에 용서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이웃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
    도해 보셨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기도는 용서를 가능케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가 충분히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기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장을 나누어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가 가능해 질까요?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나 혼자 상처를 받은
    것 아닙니다. 나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왜?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이해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저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
    니하였으리라." 사도 베드로는 얘기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알지 못하여 그리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지를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무지했고 너도 무지했
    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도 주인을 알거늘 만왕의 왕되시고 인류의 주인 되시며 역사의 주인
    되시는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아시겠습니
    까? 예수님의 죽음을 무효화시켜려 했던 우리의 사악함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아셨습니
    까? 그 무지를 회개하란 말입니다.
    용서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는 권면이 아닙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나의 성품을 나누어주었노라. 나는 너희에게 용서의
    씨앗을 용서의 권능을 너희에게 나누어주었노라. 너희는 용서하라 명령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따라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있을 때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기분과 느낌이 있을 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
    습니다. 내 의지를 따라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노력으로 용서하라고 말씀하
    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명령입니다. 용서해라! 우리가 할 수 있
    는 유일한 대답은 "예" 순종하겠습니다. 순종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감정적으
    로 접근하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 인간은 용서할 가치조차 없는 인
    간이라고. 그렇게 해서 버린 친구들이 얼마였으며 내팽개친 교우가 얼마였습니까?
    오늘 본문의 성경은 계속 용서를 선언했다고 현재진행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해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만큼 주님도 용서하
    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지요. 누군가 왼손에 못을 박을 때에 그 고통이 쓰리고 아파서 "아버
    지여 이 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가시관을 씌워놓고 조롱하고 침 뱉을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발을 묶어놓고 못질할 때에 땅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며
    오는 아픔을 느끼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날카로운 창이 옆구리를 찌르
    고 들어올 때에 "아버지여 이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보다 아주 넉넉한 마음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
    였을 때에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이 말씀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얘기가 아니올시다. 인간의 마음을 초월하고 율
    법을 초월하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천국의 세계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내가 똑같은 죄를 490번
    범하고 주님 앞에 찾아갔을 때에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못난 얼
    굴을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주님이나를 용서해 주실까?
    여러분 사람의 범죄라는 게 오늘은 사람을 죽이고 내일은 간음을 하고 모레는 강도를 하
    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연약한 곳이 대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똑같은 죄를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이래서 안돼지, 이래서 안돼지 하면서도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짓고 주
    님 앞에 찾아올 때마다 똑같은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게 나의 모습이요 너
    의 모습이요 우리 인간된 모습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용서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깨끗하게 용서받고 누군가를 깨끗하게 용서하고 주님 앞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할 때에 군말을 붙이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을 도무지 용
    서할 마음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니 용서합니다. 군말 붙이면 용서가 아닙니
    다.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
    니다. 이유와 변명을 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족을 붙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
    서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용서할 때에 조건을 붙이지 마십시오.
    용서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용서하라. 지
    금 당장 용서해라.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속에 생각나는 얼굴들을 용서하시기를 바랍
    니다.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될 사람이 먼 곳에 있는 것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입
    니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될 문제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받는 일입니다. 왜요? 우리 주님께서 몸을 우리에게 주면서 용서하기 하셨기 때문입니
    다.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용서했습니다. 사랑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때, 다른 것 아닙니다. 한없는 용서 아닙니까? 그래놓고 우리
    들이 사랑 이야기는 참 많이 합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사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
    다. 주님은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
    시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사랑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응답받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 속에 꿈틀거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기도, 떠드는 사람의 소리 속에 묻혔습니다. 그의 생애가 끝나자마자 모든 것이 무
    의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50일 후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
    수 그리스도, 너희가 죽인 그 분이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 메시야 되었다"고 전파
    하고 증거할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어찌 할꼬?" 하고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
    가 "너희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저들은 하루에 삼천 명
    이나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냥 의미 없는 소리 같았습니다. 멋진 문장
    같았습니다. 아닙니다. 은총의 보좌 앞에 기도했던 그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주
    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지만, 주님은 다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지만, 그 기도는 살아서 50
    일 후에 수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새로운 생애를 살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였습니다.
    이 위대한 기도를 그대로 본받아서 기도했던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묻
    혀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자
    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참하게 죽었습니다만 그 기
    도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한 청년, 죽은 스데반의 옷을
    들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스데반 뿐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예수 믿는 사
    람을 죽이고 싶어서 다메섹 도상으로 가던 도중에 용서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사울
    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 큰 용서의 발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그 생
    애가 드려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 왔다가 붙잡혔습니다. 망나니들이 칼을 휘두를 때 그는 집행
    관에게 말합니다. "잠깐 내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
    나님, 이 조선 민족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조선 민족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내 생명
    을 받으시고 수많은 생명을 이 땅에 주시옵소서." 기도 마친 다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중
    국어 성경을 집행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참수형을 당해서 목이 떨어졌습니다. 그 기도는
    의미 없는 것 같았습니다. 죽을 때 도무지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평화를 잃지 않는 이 서양
    인의 표정에 감동한 한 사람이 성경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조선
    땅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입니다. 1883년에 서상륜이
    라는 사람이 만주에 갔다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거기서 복음을 받습
    니다. 그리고 성경을 번역해 집에 돌아와서 소래 땅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
    두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들어오기 2년 전인 1883년에 소래교회가 탄생했
    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교의 기도,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그 기도가 1885년에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1907년에 평양 장대현 교회의 놀라운 부흥 운동, 30만 명이 한꺼번에 주님 앞에 돌아오는
    오순절 다락방 이래의 최대의 부흥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이 기도 능력 있습니다. 이 기도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악을 선
    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는 치욕을 영광으로 바꿉니다.
    이 기도를 내 기도로 붙잡으십시오.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들이여, 이 기도 드려주십시
    오. 사랑하는 자녀들을 놓고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님들이여, 낙심하지 않고 이 기도 드려주
    십시오. 그것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드리십시오. 내 마음의 미움
    이 박살나는 것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의 저주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슬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처럼 만나기 싫던 사람이 만나지게 됩니다. 듣기 싫
    었던 목소리가 들려지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기도는 역사상 가장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이 기도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이 기도보다 내 삶에 평화와 능력
    과 위로를 주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늘 이 기도부터 시작하십시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은혜 베푸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기
    도하면,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므로 반드시 살아서 역사합니다. 정말 미워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사건을 놓고 기도하시고, 아픔을 놓고 기도하시고, 우리 아버
    지 앞에 기도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그 짧은 기도가 은총의 보좌를 움직였
    습니다. 돌무더기 속의 외마디 기도가 하늘 영광을 이 땅에 누리게 하셨습니다. 내 마음속에
    미움으로 맺혀있는 것을 위해서 우리 조용히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깊은 용서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 이 시간에
    스데반과 같은 기도를 하게 해 주시고, 토마스 선교사와 같은 기도를 하게 해 주시옵소서.
    제 주위에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용서는 아닐지라도 무관심과 냉소적으로 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 내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옵소
    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예수님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게 허옵소서. 주여, 이 시간 주님의 용서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하시고 다시 한번 은혜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여 주시고 다시 한번 하나
    님의 사랑에 두손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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