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소원을 예수님께 아뢰라고 한다면 어떤 소원을 아
뢰시겠습니까? 새로운 직장입니까? 병을 고쳐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불경기에 좀
더 많은 돈을 요구하시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때 그러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께 나아와서 요청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본 것은 기도뿐만이 아니었습니
다. 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모습을 제자들은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
데 제자들은 신기하게도 "주여!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삶 가운데 나타난 기도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도라는 것! 대단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에 대한 회의감 및 죄책감이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기도에 대한 신화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이! 아직 제가 기도할 때 아닙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가
언제입니까? 불행한일을 당할 때인가요? 정신차려야 합니다. 먼저 기도는 영적 예방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 싫어하시는데 내가 기도해서 억지로 빼앗아
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기도가 힘이 들지요, 또 하나는 막연하게 내가 믿는
사람이니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
니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신화를 어떻게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까?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셋째로 어떤 자세를
가지고 기도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의 결과를 말씀 하셨습니다.
첫째, 먼저 기도는 무엇입니까? 11장 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어떤 목사님이 경상도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장로님이 나오셔서 기도하는데 기도가 막혀
가지고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하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예면 좋은교? 우예면 좋으니-껴"
그러더래요. 그래서 전 교인들이 감동해서 울었답니다. .
먼저 예수님은 기도란 부자간의 대화라고 소개해 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대화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기도는 아들과 아버지가 하는 친밀한 사랑의 대화입니다.
아버지! 한 번 불러 보는 것이지요, 그것은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중전과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과 태자와의 관계이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이제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겠습니다. 외경스럽기는 하지만 용서 해주십
시오,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고자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고로 기도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얼마 전에 나온 책 가운데 "CEO 가 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있습니다. 거
기 보면 CEO 50명을 연구했는데, 모두 전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특별히
그걸 읽으면서 감명 받은 부분은 이것입니다. 아주 장난꾸러기가 되었을 때, 아주 문제아 처
럼 되었을 때, 오로지 그 어머니만은 자기를 믿어주었다는 거예요. "나는 너를 믿는다" 그래
요. 이것 때문에 내가 오늘 있다는 것입니다. 친밀감으로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나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뢰입니다. 반면
에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반항입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대화임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의 내용입니다.
본문 2절부터 4절은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간단하게 두 개의
선언과 세 개의 요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말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아주 특별하게 두 부분이 갈라
져 있습니다. 처음 두 개의 선언에는 2인칭 단수가 쓰여져 있습니다. 한국말 성경에는 생략
이 되어 있습니다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
시며' 라고 하는 점입니다.
기도할 때 먼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 찬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으로 찬양을 하는 것일까? 아닙니다. 많이 오해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 어쩌
면 저 같은 사람을 이렇게 축복해주셨습니까? 주님! 구원해주셨습니까? 하며 감사하는 것이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이 임하옵시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
지만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과 가정과 교회 위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까지는 영적인 축복에 대한 기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절.4절을 보면 그 다음 세상에서 구해야 할 세 가지 요청이 나옵니다. 일용할 양
식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두 번째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해야 되고, 마지막으로 유혹으로부
터 보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해 기도하는 것 치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본적인 필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오늘 하루 사는 것도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고백과 간청입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얼마나 분노가 생기는 지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무조건 다른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
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그래서 자기가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
에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황폐하십니까? 기도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그리고 죄의 유
혹에서 승리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기도를 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먼저 주님은 우리가 오해하지 않기 위해 한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친
구를 찾아갑니다.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시간이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목소리 들어보니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알만한 친구입니다. 친구
좋아해도 그런 시간에 찾아오면 누가 반기겠습니까? 하지만 반갑지는 않아도 소리치는 것을
듣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여보게, 갑자기 친구가 지금 찾아왔는데 구워 놓은 빵 있으면 세
덩이만 빌려주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칩니다. 계속 집요하게 소리치면 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자는 척하고 누워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을 이
미 닫아걸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이불 펴고 누웠으니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네 그려'라고
말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 형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주거 환경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조그만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다 누워 잠을 자던 시절입니다. 한 50
년, 100년만 해도 방들이 아주 작았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공통입니다. 그러니까 자다가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삶은 살아본 적
이 있는 것 같애요. 형편이나 기분을 가지고 말하면 친구가 무엇이고 청을 들을 상황이 아
닙니다. 자다가 일어나다가는 온 식구 잠을 다 깨우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바깥에서
소리치는 친구를 버려 두고는 그 날밤 잠 농사는 다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요청을 들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주님의 결론을 들어보십시오."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보십시오. 체면이고 예의고 집어 던져 놓고 바깥에서 소리치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안 도
와주고는. 손님이 찾아와서 줄 것은 없고 옛날엔 참 좋은 시절이었던 모양입니다. 손님이 찾
아왔다고 이렇게 열심히 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을 보니까, 옛날 사회는 그랬습니다. 찾아오
는 손님을 홀대하면 그것은 사람 측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전체가 망신이었습
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사입니다. 계속 두들깁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달립니다. 쉽게
말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강청하는 것
에 못이겨서 결국 일어나 빵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청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부끄럼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
까? 부끄러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 드리러 나왔지만 흐뭇한 분이 얼마나 되십
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요, 그것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니가 지금 무슨 기도야? 너
나 정신차려! 그런 마음을 줍니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부끄러움을 이겨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움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기도는 부끄러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자격은 없습니다. 옆집 두드리는 것처럼 미
안하지요, 이런 모습을 가지고 왔는데 기도해도 됩니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청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방을 가면 기도제목을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렇게 기도제목을 내 놓
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 교회에서 제일 많은 십일조를 하게 해주세요,
그분의 평생기도 제목은 그렇습니다. 이 교회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내게 해달라고? 얼마
나 무식한 기도입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진짜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
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삼수생이 있었습니다. 시험 보러 가는 날 물을 먹다가 물 컵이 떨어
졌습니다. 아버지가 아이고 물컵이 떨어졌네! 진짜 사수생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조심
스럽게 물을 먹다가 그만 접시가 또 떨어졌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아이고 접시가 땅에 붙
었네" 어떻게 되었습니까? 붙었데요.
예수님은 이 비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9절에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을 하
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
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누가? 하나님이. 찾으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찾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이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 거듭 명
령을 하십니다. 왜 반복해 설명하십니까?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
고도 안심이 안되시는지 10절에 다시 그 이유를 세 번 거듭 밝히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
라"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은 세 종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다른 표현을 통해서 모두 같은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입니
다. 받기까지, 찾기까지, 열릴 때까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는
표현을 동원해서 간절히 매어 달리도록 교훈 하십니다. 부끄러움을 접어 두고 간절한 마음
으로 얻기까지 간구하도록 교훈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도의 태도인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
라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 직장과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과 유혹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이 모든 기도의 제목들을 계속
해서, 담대하게 기도해야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넷째. 그러면 어떤 기도의 결과가 있습니까?
기도를 한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기에는 같지
만 기도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실패처럼 보이나 승리하는 것입니다. 기도한 사람에
게는 구한 것보다 좋은 것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11절 이하를 보십시오. "얘들아, 아비된 자들아! 너희 중에 너희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
면 독이 가득한 독사를 줄 아비가 있겠느냐? 달걀을 달라고 하면 독이 가득한 전갈을 줄 부
모가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지 않느냐?"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버지라고, 부모라고 하면 자기가 못먹어도 자식을 먹이려고 그럽니다. 자기가 못 입어도
자식은 좋은 것 을 입히려고 그럽니다. 못 배워도 자식에게는 공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
니까? 그러니까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 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
며 알을 달라 하면, 계란을 달라 하면, 달걀을 달라 하면 달걀처럼 생긴 전갈을 주겠느냐"하
는 것입니다. 전갈이 움츠리고 있으면 달걀 같습니다. 근데 알처럼 그것을 주면 전갈은 쏘면
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알하고 비슷하다고 해서 전갈을 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도 자식이라면 선한 마음이 발동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 하물며 선
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도전하면서 기도의
관한 교훈을 끝맺고 있습니다. 끈질긴 기도를 드릴 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너희 악한 것들 너희 스스로 한번 생각해 봐
라 너희도 너희 자식이 달라고 하면 너희가 못 먹어도 좋은 건 주지 않느냐. 하물며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면 혹시 이런 질문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왜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로 매어 달리도록 요청하느냐고요. 그냥 "주십시요"할
때 주면 되지요. 왜 그랬을까요? 500원 넣고 버튼을 누르면 나오도록 그렇게 안하시고 말입
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왜 주님이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리한 검을 아
무에게나 맡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탁월한 권법을 아무에게나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습니
다. 만화 보면 그런 것 안나옵니까? 검술 배우기 위해서 입산을 했는데 검술은 고사하고 마
당 쓸도록 하고 그것도 몇 년씩 밥하도록 하고, 빨래하도록 하고, 그런 다음에 사람이 되었
다는 것이 확인이 되어야 놀라운 비법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
니다. 능치 못한 일이 아무 것도 없으신 분이 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모습
은 어떠합니까? 무능력하다면 사단은 여러분 같은 신자는 조금도 겁을 낼 리가 없습니다.
"너 참 잘 믿는다. 너희가 어느 교회 교인인데. 수지 교회 교인이구만. 잘 믿네. 너 정도면
수 백 명, 수천 명도 겁나지 않는다. 평생 그 정도만 신앙생활 해라 기도 생활을 해라"
그러나 여러분이 갑자기 "주님 제게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사
단은 바짝 긴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큰 일이 나겠다. 어떻게 하든지 막
아야지' 하며 집중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려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세
기의 속화된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기도하는 데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
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내용
과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하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 도
래하는 것을 목도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정도를 탈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
단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사생결단하고 주님께 매
달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 공부 좋고 제자 훈련 좋고 기도 모임 좋지만 그냥 고만고만
해 가지고는 절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아듣도록 온갖 예를 들면서 거듭거듭 권면 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그리고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요청하
지도 않는데 주님은 계속 집요하게 가르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로 연속적으로 요구합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말은 기도에
대한 단순한 얘기가 아니고 천국에 대한 약속입니다. 천국 문을 두드리는 신비한 의미를 약
속하기 때문에 천국 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
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노
력으로 천당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기도함으로 천국 문을 여는 것입니다.
유명한 요한 웨슬레는 "하늘나라는 무릎으로 올라간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해서 능력이나
기적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까이 나아가는 것
입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기도 없는 설교는 교인들에게 찬밥을 먹이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로 하늘의 열기를 받아서 영양가 있는 밥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먹도록 하는
것이 곧 목회자의 설교다. 목회자는 요리사와 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교인들이 늦게 와서 기도 없이 설교 듣고 가는 것은 찬밥 먹고 가는 것
과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와서 하나님 앞에 찬양하며 기도로서 준비한 예배는 따뜻한 밥을
대접받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는 곧 기도요, 기도가 곧 찬양이며, 찬양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되겠습니
까? 우리의 생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선하신 하
나님의 명예를 걸고 성령의 능력을 주심으로 우리의 기도에 답하실 것이라고 보장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그처럼 한심합니까? 그것은 기실 우리가 무엇을 기
도하는지 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구지책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
같다면 구태여 기도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기도 안하고도 얼마든지 밥먹고 살지 않습니
까? 그냥 고만고만하게 보기 싫은 사람 쳐다보지 않고 요리조리 적당하게 살려면 그런 삶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살고 있잖아요.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왜 한심합니까? 그
것은 누구에게 우리가 기도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좋으신 분과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도하기를 즐겨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구한
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고만고만해 있습니다. 자신을 이
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
다. 끈질긴 기도, 강청하는 기도만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성도로서 세상을
살게 만들게 할 것입니다.
기도하면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무조건 이득입니다.
손해가 없습니다. 기도는 축복을 담는 바구니입니다.
2001년 1월 9일자 국민일보에 나온 간증입니다. 경상북도 영덕에 있는 교회의 안수집사
김상태 씨 이야기입니다. 그가 다니는 21년이 되는 교회로 비바람이 들어오고 흔들거리는
낡은 교회였습니다. 출석 교인이 50명이라 재정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김 집사님은 수리도
못하는 낡은 성전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새벽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수리하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그는 성탄절을 앞두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내가 이번에 고기를 잡으
러 가는데, 고기를 많이 잡아서 성전을 수리할 수 있게 기도를 좀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
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12월 24일에 엄청난 방어 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보통 고기떼는 중앙에는 몰리지 않는 법인데, 한 가운데 있
던 김 집사님에게 고기가 다 몰렸습니다. 수협 위판장에 경매하여 4억여 원의 수입을 올렸
습니다. 그는 십일조도 드리고 감사헌금도 드리고 건축헌금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드디어 성전을 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달에 또 기적이 일어나 국민일보 2월 12일자에 실렸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지 한 달만에 5m나 되는 대형 밍크고래를 잡은 것이었습니다. 혹 돌고래가 걸리기는 해도
대형 밍크고래가 걸리기는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정도 크기의 큰고래라면 그
물을 끊고 도망을 갔을 법도 한데, 그 고래는 항구로 끌고 와서 건져 올릴 때까지도 신기할
정도로 얌전하게 있었습니다. 이 고래를 팔아서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김집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가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기도가 변화 시켜주고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전부 삐삐를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
니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도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 TV를 보는데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잘못해서 자동차가 언덕으로 굴러 떨어 졌는데 핸드폰으로 119로 연락 하
니까 구급차가 금방 와서 실어 가는 것입니다.
핸드폰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무선 연락이라면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무선 연락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선으로 연락하는 것이 기도입니
다. 이것을 요즘 용어로 'Heaven Phone'이라고 합니다. 하늘에 통하는 전화입니다.
우리가 위급할 때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애인보다도 더 좋은 우리 주님, 이 세상의
아버지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더 능력 있는 전능하신 아버지 앞에 우리가 Heaven
Phone 기도를 통해서 간구 할 때 우리의 모든 소원이 응답될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는 기도가 부족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불이 붙기 시작한 교회입니다.
지금 기도하십니까? 이 기도의 불길 속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냥 와서 기도하십시오,
틈이 나는 대로 중보 기도를 드리실 수 있길 바랍니다. 기도로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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