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개척하라 2001-12-28 20:55:37 read : 111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수17:14-18
사람들을 만나보면 참 불평들이 많습니다. 불평의 종류들도 참 많습니다. 정말 무엇이 부
족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돈이 없어서 건강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불평하
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불평하는 것인지 자랑하는 것인지 잘 모르게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믿습니다. 왜냐하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쌀이 1년에 1000가마 수확을 하는데 쌓아 놓을 창고가 없다고 걱정하는 것입니
다. 하루에 돈을 한 가마니는 버는데 그것을 세어 놓아야 하는데 바빠서 못 세어 놓겠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걱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창고야 지으면 되고 돈 세는 사람이나 구하여 두
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 된다고 걱정하고 불평하느냐 말입니까? 할 일
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걱정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최대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실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
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시기
에 하나님과 단절되면 인간은 마치 마른 막대기처럼 힘이 없게 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많이 주었으면 그에 맞게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을 옳습니다. 하나님이
힘과 능력을 주었으면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해야할 행동은 하지 않
고 엉뚱하게 걱정하는 것은 잘 난 척만 하면서 사람 약오르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미 카터가 쓴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책에는 그의 신앙생활에 대해 적혀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
이 있습니다.
"우리들,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다 높은 삶의 표준과 기대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의 원칙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원칙은 일반적인 종교
규범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개인의 행동과 일생을 기준 하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
다. 그런 기준들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자진해서 때로는 억지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탁월
한 삶, 그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관, 그 가
치관의 실현을 위해서 드려지는 최선의 삶, 우리는 그 이하일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카터가 이러한 삶의 좌우명을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을
받기 전에 유명한 해군 제독인 릭오버 제독과 면담을 갖게 됩니다. 이 해군 제독은 젊은 해군장교인 카터
에게 전술과 전략에서부터 군인의 자세, 태도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카터는 땀을 흘리
면서 대답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제독이 화제를 돌려서 해군사관학교 시절에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공부했는가를 물
었습니다. 또한 웃으면서 성적은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성적에는 자신이 있어 점수와 등수를 대
답했더니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카터는 식은땀을 흘
리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야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이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카터는 더 이상 답변을 할 수 없었습
니다.
그날 밤 카터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이 해군 제
독이 던진 것과 비슷한 질문을 나에게 던지실 지 모른다. 이때 만약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나는 어
떻게 대답할까?"
그날 그는 인생의 좌우명을 얻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봅니다. 요셉 자손들입니다. 그들을 자랑합니다. "여
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요셉 자손을 큰 민족이었
습니다. 다른 민족의 두 배나 되었으니 얼마나 복을 받은 것이 큰 민족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 않겠
습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열심히 일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이라고 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
은 어찜이니이까?" 무슨 말입니까? 왜 이 정도밖에는 안주냐고 따집니다. 우리처럼 큰 민족
을 알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요셉처럼 큰 족속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7 지파는 땅을 얻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
지파는 분명 큰 땅을 얻었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그들을 큰 민족을 거느리고 있고 능력이 있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또한 가지고 있는 것도 넉넉하지는 않을지라도 지낼 만은 한 것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힘이 있을 때
우리가 능력이 있을 때,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혹시 지금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종종 우리는 그러한 죄를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감사하여야 할 때 감사하지 않습니다. 열
심히 일하여야 할 때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불평하고 짜증내는 일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힘을 바른 곳에 필요한 곳에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
입니다. 저 같은 면 욕을 하든지 아니면 혼을 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
라림 산지가 네가 너무 좁을진대" 참 멋있게 말합니다. 먼저 그들의 불평을 다 받아 줍니다.
그래 너의 말대로 에브라임 산지가 좁다고 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넉넉하다고 말해 줄만 한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에브라임 산지가
좁다고 말해줍니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책망할만한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역시 좋은 지
도자는 다릅니다. 꾸중하기보다는 격려하면서 그들의 기분을 받아 주면서 지도합니다.
무엇이라고 지도합니까? "너에게 준 땅이 좁으냐 그렇다면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의 땅 삼림에 올라가 스스로 개척하라" 무슨 뜻입니까? 가만히 있으면서 받기를 바라지 말
고 원하는 땅을 스스로 얻기 위해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가 요셉자손들에게 말한 것을 그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기에 그렇
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고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력이 필요한데 그
것은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어서 행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권면을 받은 요셉 자손들을 곧바로 일어나서 행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
니까?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하였기에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행하려 하는 일
을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만듭니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요셉 자손을 불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요셉 자손이 가로
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두 가지 그들을 불평을 합니다. 첫 번째는 여호수아가 가서 개척하라는 땅은 좁다는 것입니
다. 가보지도 않고 좁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땅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불평하면
서 볼 것이 아니라 내가 가서 얻을 땅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가려는 마
음이 없기에 그 땅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얻어 보았자 좁은 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불평은 가서 정복해야 할 땅의 군인들은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
금 자기들을 철병거가 없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데 어떻게 철병거를 가진 군대들을 정복하
여 그 땅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소총을 가진 군대와 탱크를 가진 군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싸움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 자손이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전쟁한 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싸웠습니까? 요단강을 자신들의 힘으로 건
넜습니까? 여리고를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하였습니까? 아말렉이나 아모리나 기브온 전투를
자신의 무기나 군대의 힘으로 정복하였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셔서, 기적적인 힘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정복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적들의 강함만 보는 것
입니까?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고서 했지 언제 그들의 힘으로 싸운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주저앉아 있는 요셉자손들에게 여호수아는 다시 권면합니다. 책망하지 않
습니다. 도리어 권면 합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 즉 한 분
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참 멋진 말입니다.
그들이 뽑냈던 말에다가 한마디를 덧붙여서 말해줍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큰 민족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지고는 안 되
는 민족이라고 덧붙여서 말하여 줍니다.
왜 그들을 권능이 있는 족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에게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요셉 족속은 권능이 있는 족속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요셉족
속은 권능 있는 족속으로 멋지게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어떤 적일지라도 다 멸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키가 큰 족속일지라도 철 병거를 가진
군대일지라도 아무리 험악한 산악일지라도 요셉족속이 가는 곳에는 당해낼 군대가 없었습니
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군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충분이 그 산지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비록 삼림일지라도 개척해야 한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
렇습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얻으려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습
니다. 그러면 요셉의 자손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가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
니다. 힘써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힘써 찾는 자에게 찾게 될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
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 뒤로 물러선 자에게 열리지
발견되지 않습니다.
또한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쫓아내리라"고 여호수아는 요셉자손
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손
에 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 손에 황금이 있는데 남의 손의 은을 부러워한다면 그것처럼 우스운 행동은 없을 것입
니다. 내 손에 총이 들려 있는데 남의 손에 들려 있는 막대기를 무서워한다면 그것처럼 바
보 같은 행동은 없을 것입니다.
윌리엄 허스트(William R. Hearst)라는 신문 편집인이면서 고대 미술품 수집광인 미국인이 있었습니
다. 그는 고대 미술품이라면 뭐든지 좋아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귀중한 도자기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해야할 일을 모두 뒤로하고 즉시 유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도자기를 찾으려고 유럽의
이곳 저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도자기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한 도자기 상에게 새로운 정보를 들었습니다. 몇 해전에 미국의 어떤 언론인이
그 물품을 사갔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도자기를 사간 사람이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가운
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이 산 저 산을 넘어 헤매다가 돌아와 보니 행복은 바로 옆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
다. 그 이야기처럼 자신이 찾던 보화를 이미 오래 전에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값어치도 모르고 창
고에 쳐 넣고 있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혹시 우리들도 그처럼 자신 안에 있는 보화를 잊어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문제는 밖에 보이는 적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입니다. 내편에 누가 있느냐 하
는 것입니다. 내 편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사는 자입니까? 누구를 하나님으
로 믿고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왜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까? 왜 두려움이란 단어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
버려도 되는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두려움은 전혀 쓸모 없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할 일 앞에 두려워 머뭇거리고 있
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앞에 놓인 땅 곧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들을 개척하기
를 원하십니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고 시도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믿음으로 개척하는 자의 것입니다.
게으르게 앉아서 자신의 상황과 환경을 탓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고 심지어 하나
님조차 원망하는 자들을 결코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여러
분 앞에 있는 곧 여러분들이 필요한 일들을 믿음으로 개척하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가면 꽃들이 많이 있는 로스 알토힐이라는 꽃마을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들이 있는데 그 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게된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이 도시에는 요한이
라는 우편 배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똑같은 자전거를 타고 항상 똑같은 길로 "편지 왔어요, 소포 왔
어요"라고 외치며 우편물을 배달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쳇바퀴처럼 순환되는 삶을 15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중년이 되면서 인생과 직업에 대한 회의와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단
순하고 단조로운 삶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이 우편 배달 일을 계속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로 바꿀
것인지, 바꾼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매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은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 일이 너무나 지겹고 지루한데 어떻게 계속하느냐고
묻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면서 보람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이
문제로 기도하던 그에게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것 참 좋은 방법이로구나. 자, 이제부
터 다르게 살아보는 거야.'
그는 여전히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거리를 똑같은 자전거로 똑같은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습니
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우체부 가방 안에 꽃씨를 넣고 다니며 지나가는 집집마다
계속해서 꽃씨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꽃씨는 죽기도 했지만 어떤 꽃씨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가 지
나가는 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거리는 꽃의 거리가 되었고 그가 다닌 마
을은 꽃마을이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5월도 다 지나고 있습니다. 혹시 올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가라고 하는 땅으로
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기로 작정한 일들을 두려워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
습니까?
보여지는 환경에 눌려 뒷걸음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예 시도하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까?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가 포도밭에 갔습니다. 포도들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여우는 군침을 흘리며 포도를
따 먹으려고 했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너무 높은 곳에 포도가 달려 있어서 따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여우는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간신히 포도송이에 손가락 끝을 대 보았을
뿐 단 한 알의 포도도 따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여우는 지쳐 버렸습니다. 여우는 화를 내면
서 포도 넝쿨 아래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습니다.
"흥 시어 빠진 포도는 거저 줘도 안 먹겠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헐뜯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개척한다고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시간 정성
과 힘을 써야 얻어 지는 일입니다.
조금 해보다가 그 일에 질려 물러서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얻을 필요가 없는 것들
이라고 헐뜯으면서 무시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꼭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
은 일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십시다. 여호수아가 요셉자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
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큰 사람이고 권능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대적이 강
할지라도 네 앞에 큰 일일 있을 지라도 다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폴리에 있는 어느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가진
인생 최대의 꿈은 오페라 가수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늘 이를 열망하며 지내던 그
소년은 열 살이 되던 해에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성악 레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 목소리를 들어본 음악 선생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너는 노래를 할 수 없어.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그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건 무리지. 네
목소리는 덧문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같이 거칠어."
음악 선생으로부터 이런 지적을 받은 소년은 의기소침하여 그동안 쌓아온 꿈들이 한꺼번
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같은 소년의 절망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
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향하여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깃털보다 더 포
근히 그의 쓰린 가슴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한번 시작해 보
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들의 두 눈망울에 맺힌 이슬을 손으로 쓸어주
며 높은 이상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쓰린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다시 음악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그의 가정은 매우 가
난하여 만족할 만큼 자주 음악 수업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따스한
격려와 그를 향한 뜨거운 기대로 인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음악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
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가 앞으로 어떤 희생을 감내하고라도 너의 성악 레슨비를 마련하마. 너는 성악
에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너는 분명히 해낼꺼야."
이같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끊임없는 격려는 결국 놀랍게도 커다란
성공의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가수가 되기를 꿈꾸던 한 가난한 소년이 마침내 세기를 거
듭하여도 잊혀지지 않는 저명한 성악가 중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고결한 이상을 가슴에 안은 자, 뛰어난 힘과 능력을 지니고 싶
어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내 것이 되
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
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쫓아내리라"(17-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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