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03일 (토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목사를 막아라, 텅빈본당 /목사 연금 1,600억으로 '돈 장사'한 집사 구속/ 캄보디아 박율 목사 체포 충격               최태민 구국선교단 참여 목사들 / 십일조 하지 말라는 목사 /한우갈비’외치는 기감목사들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서울광장서 개막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 무죄               선교사들 위한 안식관 두 곳/ '노트북이 뭐라고' 소송 총동원한 사랑의교회               언더우드 후손 28명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군종장교 범죄               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예장통합 ‘제2의 세습방지법안’ 총회 통과/ 예수님처럼 교회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적극 반대 /목회자의 고백 7가지 실수               총회장 2명을 배출한 여인의 힘! /복음화율 10% 안 되는데 주일학교만 1천 명              

  홈     이삼규     강문호.     고신일     곽선희.     김광일.     김기석.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성광.     김성수     김은호     김정호.     김홍도.     류영모.     명설교     박봉수.     오주철.     옥한흠     유기성     이동원     이성희.     이양덕.     이영무     이윤재     이재철.박영선     이정익     조봉희.     조용기.     주준태     지용수     피영민     하용조     한경직.     홍정길.임영수     해외목사님     관     괄사치유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한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사건별설교(구약)     사건별설교(신약)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샘플설교
  오래된 설교(왕)
  카드,핸드폰결제

설교내용검색

네이버.다음.구글


시작페이지 설정


호산나 자동차


교회인쇄주보디자인


밀알.현수막.주보


제주2박3일210.000원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남학매일성경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베리타스칼럼
  • 강남신앙간증
  • 아멘넷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강문호목사
  • 고신일목사
  • 김기석목사
  • 김대동목사
  • 김명혁목사
  • 김성광목사
  • 김승욱목사
  • 김형준목사
  • 김흥규목사
  • 명성훈목사
  • 박광철목사
  • 박건목사
  • 소강석목사
  • 이동원목사
  • 이성희목사
  • 이한규목사
  • 정근두목사
  • 정태기목사
  • 조태환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교단 사이트

    말씀,QT

    사전.지도사이트

    성화,주보그림자료

    성경연구공부자료

    성경신학 자료

    Home

    높은 곳에서 호산나
    2001-12-28 20:49:50   read : 111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막11:1-11

    불란서 혁명이 터지고 나서 눈부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젊은 지도자 한 사람이 있
    었습니다. 나폴레옹입니다. 그의 등장을 지켜보며 온 유럽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
    다. 그렇게 흥분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26살 먹은 천재 음악가였던 베토벤도 포함되어 있었
    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을 무척 존경했습니다. 자기보다 한 살 위였지만 그의 인물됨에 가슴
    이 벅차 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에게 조금이라도 존경과 감
    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작품을 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도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 "보나빠뜨라 교향곡"이라고 붙이고는
    5년 후에 나폴레옹에게 증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이 마침내 황제에 즉위했다는 말이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토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보나빠
    뜨라'라는 제목을 써두었던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리며 이렇게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그 사람도 속인에 지나지 않았어.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황제가 되다니 정말 실망
    했어."
    그리고는 그 교향곡 이름을 "심포니아 에로이카"로 바꾸고 특별히 제 2악장에는 "장송 행
    진곡"이라는 음울한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는 그로부터 17년 후에 나폴레옹이 세인트 헤레
    나에 가서 유배 생활 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나폴레옹
    에게 바치려고 했던 그 교향곡을 다시 손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다 내다보고 있었어. 제 2 악장을 장송 행진곡이라
    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
    지도자에 실망한 사람이 어디 베토벤뿐이겠습니까? 세계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에 등장했던 왕이나 통치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사람들에게 안
    겨 준 것은 결국 실망과 허탈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냉혹하게 교훈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
    도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지도
    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저 분만이 인류가 기다리는 진정한 왕"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당시의 세계 최대 강국
    은 로마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 정부가 파송한 빌라도를 위시한 지도자들이 와 있었습
    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
    루살렘으로 들어오는데 모든 백성들이 그를 향해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하고 외치고
    있습니다."하는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빌라도는 아마도 술잔을 들고 마시
    다가 너무 우스워 배꼽을 쥐고 웃다가 술잔을 다 쏟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귀 새끼
    를 타고 오는 주제에 왕이라고?'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어
    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는 분을 놓고 인류가 기다리는 왕이요 구원자라고 누가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엄숙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만이 진정한 왕이요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자다."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지난 3년간을 우리가
    돌이켜 보면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의 신분을 공적으로 노출시킨 일이 없습니다. 가끔 지도
    자들이 "네가 누구냐? 신분을 분명히 밝혀라"며 따지고 들었을 때도 예수님은 직접적인 언
    급을 피하시고 인자라고 하는 약간 모호한 용어를 쓰시면서 대꾸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
    장 15절을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바람에 일부
    러 피해서 산으로 도망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7장 4절에 보면 자기 형제들이 "아니, 세상에
    나타나서 세상에 큰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면 왜 숨어 다니느냐? 스스로 자기 정체를 밝
    히고 당당하게 맞서지"하고 빈정거렸을 때에도 예수님은 "나의 때는 아직도 이르지 아니하
    였다"하시면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자들과 오붓하게 한적한 곳에
    서 만날 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곧 메시야
    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요,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기를 원치 아니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태
    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자기가 다윗의 자손이요 평화의 왕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를 하신 셈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니
    셔티브(initiative)를 쥐고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태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
    람들이 몰려들어 자기를 향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소리를 지를 때도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막지 않으
    셨습니다. 삼사 일 후에는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
    는 폭도로 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을 막
    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공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자마
    자 어린아이들까지 합세를 해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하고 외쳐댔습니다. 그것을 보
    고 흥분한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곁에 와서 따지고 들었습니다.
    "당신, 저 소리 못 들어요? 입 좀 막도록 해요.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도록 내버려둬요?
    입 좀 다물게 하라고."
    그 때 예수님은 유명 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아니하면 여기 있는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인류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
    니다. 사람이 그를 환호하지 아니하면 돌이라도 소리를 지르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우리가 성경 속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우연한 행
    진의 한 결과가 아니라 이것은 계획된 하늘의 섭리의 행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예
    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옛날 구약의 유월절에 백성들의 죄를 구속
    하시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재로 그는 세상의 죄를 구속하고 또 이스
    라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더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가 정확하게 유월절을 앞
    둔 엿새 전에 그 분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때를 그 하나
    님의 그때를 기다렸다가 정확한 그 때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입
    성하시기 위해서 그는 먼저 감람산 쪽의 산을 오르십니다. 이 산 마루에는 두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벳바게, 또 하나는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감람산
    의 등선에서 불과 100m 떨어진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자, 거기에 오르신 예수님은 이제 한 마리의 나귀를 찾고 계십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
    다. 저희 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
    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
    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이 간단한 이야
    기 속에서 그의 범상한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맞은 편 마을
    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알고 있었습니다.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
    든" 그러니까 나귀 끌고 오너라 하니깐,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면 어떻게 해요? 그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바로 그 분 자신이 나귀의 주인 그와 전
    혀 상관없어 보이는 한가롭게 놀고 있었던 나귀 한 마리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라고 선포하
    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나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인생의 주인, 여기 앉아 있는 여러
    분과 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 그리고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
    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4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대로 하매 뭐라 그랬을까요? 주가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니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분이 메시아요 약속된 메시아요 그 주인이
    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것은 하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인 것임을 주목해 보십시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
    고 계신 주님이라면 그분이 만물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이 없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지는 보람찬 인생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는 하나
    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인생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아
    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다니
    다가 오늘 이런 인생의 길에서 서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갖고 오늘 이 땅에 나를 보내셨고 나는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성패는 단순히 세속
    적인 어떤 성공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계획,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왕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그 분의 의도대로 내 인생이 쓰여지고 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그 중요한 첫
    번째는 예수를 왕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나를 향해서 계획을 갖고 계시다! 놀
    라운 계획을 갖고 있다! 내가 온 것은 내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분은 내 삶이 허무와 갈등에 가득찬 고뇌에 찬 인생을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이 왕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
    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바뀌고 새로워지는 첫 번째인 것입니다.
    둘째는 왕의 구원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
    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려
    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
    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었습니다. 그를 왕으로 기
    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
    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아마도 이 찬송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들의 입술에서 먼저 순
    수한 아이들에 입에서 이 찬송이 터졌을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우리는 이 찬양 속에서
    이 말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에 대한 메시아로서의 기대 그 구원에 대한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들은 구원을 기대했고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기
    대한 것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들이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제공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었던 메시아로서의 기대는 영적인 메시아보다도 다분히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는 로마 정권을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자유, 이것은 정치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한 그 자체를 우리는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메사야로 오셨다면 그 분은 탱크와 군마를 거느리고 타고 당당하게 이 성에 입성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성!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이유를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것이다." 그는 겸손한 왕, 그래서 예루살렘 도성에 뛰어 노는 가장 어린아이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권위가 있는 사람도 권세가 없는 사람도 지식 있는 자도 무식한 사람도 누구나 쉽게 친근히 다가설 수 있는 겸손한 예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예수,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희망을 약속하는 예수,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압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 가운데 본질적인 문제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그렇습니다. 오늘 나를 방황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 내 인생의 방황, 내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어려움,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삶의 존재의 갈등 그것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이 죄로부터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은 예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
    아이슈비츠 수용소 하면 소름 끼치는 이름 아닙니까? 나치 치하에서 얼마나 악명을 떨쳤
    던 살인의 현장이었습니다. 거기에 폴란드의 프란시스 파에 소속된 신부 한사람이 갇혀 있
    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을 뽑아 냈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을 굶겨 죽이기
    로 작전을 세웠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사람을 차출해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걸려들면 죽음으로 가는 겁니다. 몇 사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수들이 벌써 몇 사람을
    불러내어 그들을 지하 모처에서 굶겨 죽이려는 잔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줄 알고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좀 살려 주시오. 나에게는 처자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식구가 있습니다."
    그러자 그 간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 대신 죽어줄 사람이 나오면 고려할 수 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막스밀리안 콜베 라고 하는 신부가 선뜻 나섰습니다.
    "나에게는 딸린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간수가 "꼭 하고 싶으면 대신 하라고."
    그래서 콜 베 신부님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그 팀에 끼게 되었고 결국에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 들어가서 굶어 죽었습니다. 콜베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바로
    이런 죽음을 일컬어서 구속적 죽음, 곧 대속적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왕의 구원을 분
    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왕 되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기 위해서는 세 번째로 왕의 눈물을 이해할 수가 있으셔야 합니다. 왕
    의 눈물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호산나 찬송 속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다 이런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직전에 한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본문의 사건의 계속되는 진행은 누가
    복음 19장 41절에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사건 직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났던 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가까이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네 가까이 오
    시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 아마도 이것은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찬송하는데 왕으로서 그 분을 환영하는데 예수님은 이상하게 우시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예루살렘 성에 다가오시면서 그가
    우시는 모습 속에 정치적 메시야의 기대를 걸고 흥분한 군중들의 환호성 호산나! 찬양하는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감람나무 이 감람산 입구를 돌아서시면서 예수님은 아마도 그의 눈에
    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42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는 숨기웠도다."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부수고 그리고 그들을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줄
    수 있는 예수상을 예수에게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폭력의 힘을 가
    지고 오신 예수가 아니라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너희들이 평화의 의미를 알았더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눈에는 내가 숨기워져 있다. 예수를 예수로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백성들. 그리고 그 분이 정말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참된 평화, 정치 적인
    자유이상의 본질적인 자유, 인간 존재의 자유, 실존의 자유, 나를 참으로 자유케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샬롬의 주님, 평강의 주님, 너희들의 눈에는 내가 가리워져 있구나.
    예수상. 참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 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43절에 "날이 이를지라 한 날이 올 것이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부터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 함을 인함이니라" 예
    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다가올 운명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자, 지금 은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군중들 예수에게서 지금 이 땅에서의 당장의 어떤 이득과 이해관계를
    기대하면서 환영하고 있는 그 군중들의 모습 속에서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맞지 않
    는 예수임을 알았을 때 불과 며칠 후에 호산나! 찬양하던 이 군중들이 예수를 향해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이렇게 폭도로 돌변할 군
    중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거절
    한 이 백성들, 그리고 예수를 거절한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A.D 70
    년 로마의 타이토스 티도 장군과 황제가 영도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정
    복했습니다. 이 다가올 심판 왕 되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구원을 거절하고 멸망할 도시의
    운명. 그리고 이 도시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호산나! 이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
    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그 분의 눈물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 후에 잠시 후에 그
    는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내일 아침이면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그
    분은 또 한번 우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을 그가 심
    한 통곡으로 우셨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 통곡의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다
    가올 십자가의 고통이 괴로워서 흘리신 눈물이 아닙니다. 예수 믿지 못하고 예수를 알지 못
    하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그 운명을 슬퍼하시며 그는 우십니다. 구원받아야 할
    영혼 예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살고 하늘의 평화를 맛보고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그 백성들의 운명을 내다보시면서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향해서
    흘리는 애타는 눈물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그 눈물 때문에 십
    자가를 앞에 두고 흘리셨던 그 눈물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를 곤고히 여기시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 그
    눈물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분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
    니다. 그의 눈물 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입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물을 흘릴
    차례입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유
    아직도 우리가 충분한 눈물을 흘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을 위해서 충분
    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의 백성들의 고통의 행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
    다.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아직도 안
    타까운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 알지 못하고 방황하
    는 이 거리 속에 수많은 우리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면 민
    족이 살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거두리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주변의 안
    타까운 우리 가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이 시대는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감격 속에서 내 눈에 눈물이 흘려지
    는 날 우리 민족은 치유될 것입니다. 새로워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겸손하신 왕이요, 희생하신 왕이요, 구원하신 왕이신, 입성하신 예수님이
    오늘 이 자리에 계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가까이 다가오
    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쉬어라. 너 마음이 몹시 무겁지? 피곤
    하지? 힘들지? 그러나 내 곁에 와 쉬어라. 사랑하는 자야 나는 너를 위해 죽었노라. 너를 너
    무 사랑해서 죽었노라. 내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소유해라.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너를 구원하
    기를 원하노라. 영생의 나라로 너를 인도하기를 원하노라. 비록 인생 여정이 힘들고 고달파
    도 조금만 참아라.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 나라를 네게 주
    노라."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겸손하신 주님, 희생하신 주님, 구원의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
    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격려하는 사람이 되라
    끝이 좋을 자신 있습니까?
    좁은 문에 집중하라
    대표선수 교인이 됩시다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너와 함께 하느니라
    신앙 성장의 방해물을 제거하라
    우리의 멘토 다윗
    은혜를 받아야 산다
    아름다운 면류관
    부지런히 가르치라
    성도의 기도
    하늘에 열린 문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개인정보취급방침 |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