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와 나 뿐 2001-12-28 20:48:09 read : 116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9:1-8
요즘 유행하는 세 가지의 말들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잘보시는 분들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남자들에게 '장진구 같은 놈'이라 말하면 그 보다 큰 욕은 없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고주희 같은 여자' 정치인들에게는 '아지태 같은 사람' 말하면 아주 큰 욕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들이 오고 갑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 시대, 제대로 되는 것은 없는 것처럼 여겨지니 자연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무슨 말로 변명을 하여도 괴로운 세상임이 사실입니다. 전쟁의 공포는 항상 우
리 주위에 있고 좋은 소식이란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현재도 그렇고
미래는 더욱 암담하기만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그 옛날 말하기를 아무리 어두운 밤하늘
이라도 자세히 보면 별 하나는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암담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그리고 세계도 계속 진통하고 있습
니다. 아무튼 세상에는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역
시 자기 자신의 문제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새가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면서도 자기 마음
이 기쁠 때에는 새가 노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슬플 때에는 새가 운다고
합니다. 진정 새가 우는 것인지 노래하는 것인지를 분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도 이렇게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기 마음의 처지대로 사물을
보고, 세계를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 세계관과 자기관이 하나로 통하는 이유가 있는 것
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에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
다. 그 때문에 일반적 상식으로 말하기를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는 일단 욕심을 줄이라, 욕망
을 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인데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인
해결일 것 같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 보고 우리의 이성, 우리의 논리, 우리의 과거
경험들에 비추어 추리해 볼 때 이 정도로, 이렇게 되면 망하고 끝난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
을 느끼며 공포에 쫓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더욱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문제가 소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한
절망의 문제입니다. 비록 현재는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확실한 미래만 보장된다면야 지금의
어려움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이 소망의 문제도 주관적으로 볼 때는 결
국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현재 내가 기쁜 일을 당하고 있으
면 앞으로도 기쁜 일이 있을 듯이 전망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여 현재에 어려움을 겪고 있
으면 이제는 앞도 보이지 않고 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현재가 행복하면 지난날의
고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그 숱한 고생을 오늘의 이
기쁨을 위해 있었던 것으로 좋게 해석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 기
쁘면 저 미래도 아름답고 푸르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전망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리고 보면, 이제 결론을 지어 한마디로 묶어 이야기하자면 첫째는 나 자신의 문제요, 둘째는
현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모든 문제와는 달리 전혀 차원이 다른 행복의 절정을 말해
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헤르몬 산에서 변화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주님과 함께 지나는 동안에 저들이 '여기가 좋사오니, 주여!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떠나가지 맙시다!'하고 말했습니다. 옛날 유대에서는 귀한 손님이 왔을 경우 특별히 자신들
이 쓰는 거처와 구분된 초막을 지어 모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환희에 넘쳐 초막 셋을 지어 예수와 더불어 세 분
을 모시고 그 환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대로가 좋고 이대로 오래 오
래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끝나도 좋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극치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극치는 뭐라고 앞 뒤 가릴 것 없이
이대로가 좋다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왜 제자들은 거기가 좋다고 그렇게 말했을까요? 거기
는 위락시설도 없었고, 좋은 음악도 없었으며, 좋은 음식을 먹는 식당도 없었습니다. 그런
데 왜 그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좋다고 했을까요? 욕망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특별한 것을
소유라도 했습니까? 출세를 했습니까? 앞날이 보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그 어느 것 하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이렇게 기뻤습니다. 이것은 종합
적인 인식입니다. 여기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철학도 논리도 필요 없습니다. 보았습니
다. 만났습니다.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좋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험이
요, 행복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변형되셨다고 하였는데 이 "변형"이라는
말은, 뜻 그대로 모습, 모양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이는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보내 영화로운 몸입니다. 태초부터 영화로우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잠시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뿐입니다. 그
러니까 오늘 여기에서 그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앞으로 있
을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모
습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적이요 본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
라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선생으로 모시고 있는 그 예수가 이런 분이란
말입니다. 이제 그 본체를 아는 순간 그는 다른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그저 엄청난 행복이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제일 사랑할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사랑합니다. 똑같이 인생이 태
어났지만 어떤 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고, 어떤 분은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일
만 골라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살면서도 어떤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과 지혜를 모아서 하나님을 증거하는가 하면 니체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하
면 하나님을 없다고 할까, 죽었다고 할까 이제는 하나님 시대 가 아니고 자기 시대라고 할
까 그런 사탄에게 지배를 받은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
다. 어느 곳이 살기가 좋습니까? 또 어느 나라가 가장 인간 대우를 받고 또 어느 지역에 이
민하기가 좋은지를 물어보고 많은 사람이 실질적으로 유동하면서 삽니다. 보따리를 다 풀어
놓을 사이가 없이 이곳 저곳 찾아보면서 정착을 해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은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할 정도로 모든 사람 앞에 선전하고 싶은 그러한 장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 네이루, 호주의 시드니, 이태리 나폴리 등 3대 미항과 스위스의 알프스
산 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울 정도로 이런 아름다운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곳이 우리가 영원히 '여기가 있는 곳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될
까요? 그런 곳에 살면서도 더 좋은 곳이 어디 없습니까? 있으면 한 번 더 옮겨보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아무리 좋은 권세, 황금 덩어리를 옆에다
가 쌓아놓아도 정말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인간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디까
지나 육적인 육신에 관한 것이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고난 역경이 있어도 바다야 잔잔하라, 풍랑아 잠잠하라고 주님이 한 번만
말씀해주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집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까 맛이 없던 처음 포도주보다도 나중 것이 더 좋아지는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
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 자신이 뭐
라고 했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소유한 자는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예수 안에 새로운 삶이 이
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짜증이 나며,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사실은
많을 것 같아도 많을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
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를 뵙는, 얼굴과 얼굴로 대하는 체험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 또
한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라는 가사가 있
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평생에 참 만족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권세를 가질수록 불안하다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만이 부귀와 명예가 귀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한 때 많이 부른 복음성가 중에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주의 복음 전하리'
라는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그 동기를 보면 참 은혜롭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한 분은 서울
경기고등학교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9세의
나이에 극동건설에 취업을 해서, 그 가 사우디에 책임자로 갔으니 얼마 나 빨리 성공한 사
람입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자기 머리가 좋으니까 머리를 굴리는 대로 돈을 막 모아줄 수
있고, 거두어들일 수가 있는 사람으로서 돈을 마음껏 쓰면서 온갖 여성들과 온갖 향락을 즐
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벤츠 420을 몰고 신나게 달리는데 앞에 오던 차와 정면충돌
해서 그 순간에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8일만에 정신이 깨어났는데 두 다리가 잘려
진 채로 서울대학병원 17층 입원실에 불구자의 몸으로 입원된 모습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렇게 즐기던 한 순간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두 다리가 이미 사우디 사막에 묻혀진 그런 지체
장애자로서 자기 모습을 본 순간에 그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내다
보는데 마침 서울 경동교회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보면서
그는 거기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가 글을 썼는데 그 순간에
쓴 글이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 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죽을 세상이
왜 그리 더러운지 이제야 알았네」 눈물로 눈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이 기독교 월간
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음악성이 있는 분이 이 글을 읽고 감동이 되어서 곡
을 붙인 것이 복음성가로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두 다리
를 사우디 사막에 잃어버려졌지만 그는 예수를 소유했습니다. 오히려 그 때 그런 향락 오락
연락을 누릴 때보다도 더 즐겁고 더 만족하고 더 거룩한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계속해서 재미있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 이 사람 베드
로는 자기의 자기 됨을 잊어 버렸습니다. 내가 감히 이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자기 자격에 대한 살핌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순간에 자기 모습이 보인다면 이건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추한 모
습, 그 더러운 인간상이 보인다면 감히 어떻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변화산에서의 장면을 보면 베드로는 자기 모습에는 전혀 관계치를 않습니다. 내가 얼
마나 무자격하고, 얼마나 추한 죄인이며, 얼마나 못된 인간인가 하는 문제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를 미워할 생각도 없고 자기 자신을 저주할 마음도 없습니다. 오
직 하나의 마음, 하나의 기분으로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습니다일 뿐입
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미래에 할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부끄러
움도 개념치 않았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즐기는 행복을 누릴 수 없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린애들은
보면 꾸중을 듣고 한참 울다가도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웃고 즐거워합니다. 그것을 보면
금방 울다가 웃기는 왜 웃느냐 변덕스럽다 하지만 실은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기에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 기쁘면 기뻐할 것이지 무슨 체면 때문에 못할 것이더란 말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베드로는 아무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그대로 주님과 함께 기뻐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처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집안 걱
정도 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자기 직업에 대한 문제,
뿐만 아니라 산아래 동네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곤경에 처해 핀잔을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
어떤 문제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나!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의 영광 속에 들어가 있는 자기 모습을 벌써 보고 있
단 말입니다. 그래서 감격합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
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4,5절)
고마운 마음에 초막을 짓는데 거기에 자기들을 위한 초막은 없습니다. 자기 걱정이 없습
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가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변화산의 베드로는 오직 예수뿐, 자기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따위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만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다른 문제가 있겠습니
까?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으로 전부요,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죄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것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데, 무엇이 그렇게도 문제가 많아서 결국은 불평하며 원망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이 사건이 있었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
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광경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9장 1절을 비롯해서 공관복음서인 세 복음서가 이 사건을 연결하여 반드시 앞
서 강조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엿새 후에 이 사건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변화산의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일시적으
로 저들 앞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 또한 이를 통하여 어떠한 고통,
어떠한 십자가, 어떠한 가시밭길이라도 갈 수 있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
가의 길도 변화산의 체험이라면 기쁘게 지고 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
라."(행14:22) 그렇습니다. 그 날에 있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에 있은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십자가를 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니라."
그 날을 생각하고, 그 날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종말론적이요, 본래적이며, 또한 현재적이
야 합니다. 그 때문에 고난을 극복하며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기적은 사건만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의 환상이 아닙니다. 이
약속을 보여주셨기에 그 약속을 믿는 신앙으로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옳습니
다.
여기 한 무명의 병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저에게 순종을 배
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
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
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민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비참하게 만
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넓은 마
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당신에게 삶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
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모든 것을 주셨습니
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진정 믿는 자의 기도입니다. 오직 예수!
문제가 많은 것 같으나 사실은 아직도 주님을 바로 만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고 그래
서 중생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땅으로만 기울어지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영광
의 메시야를 바로 보며,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이루어 질 때, 그 영광과 체험에 살
아갈 때, 이 세상의 고통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오늘 당하고 잇는 고통 자체도 벌써부터
행복의 벅찬 마음으로 이겨 나가게 되는 것이 옳습니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들려지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
라." 이 말을 듣는 자에게 바로 이와 같은 영광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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