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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써 여호와를 알자
    2001-12-28 20:40:43   read : 122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호6:1-6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갖는 인간적인 번민이 있습니다. 춥다, 배고프다, 아프다 하는 문제는 동물에게도 있는 느낌이지만 인간적인 고민은 아닙니다. 가령, 아픈 것과 슬픈 것은 같지 않습니다. 배고픈 것과 외로운 것도 서로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플 때에 슬퍼지고 배고플 때에 외로워집니다. 여기에 인간만이 갖는 고통이 있으며, 이것을 번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번민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소원과 현실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없고 소원이 없다면 아마도 아픔은 있을지언정 슬픔은 없을 것이며, 배고픔은 있을지언정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번민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높고 먼 곳에 있습니다.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둘째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자기 능력을 알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는 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가령, 부지런하면 잘살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부지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 학생들에게도 고민이 많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성적이 나올 텐데 공부가 안됩니다. 아니, 공부를 못합니다. 공부를 잘할 수 없는 자기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부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맞추어야 할 터인데 그럴 수 없기에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 받을 자격이 없음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셋째,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일반사람들과 다른 또 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원을 몰라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의 고통을 외면하실까?'하는 고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기도할 때
    나 이야기를 나눌 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나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기원합
    니다. 그러나 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뜻에 합쳐 주시기를 고대하며, 기
    왕이면 내 뜻대로 했으면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을 꺾느라고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양보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여기에 우리의 원망과 불평과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한 아담이 에덴동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
    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했습니다. "나 여기 숨었습니다." 꼭 어린아이들
    숨박꼭질 하는 것 같이 '어디 있니? 아 여기 있다'입니다. 숨지 말아야합니다. 이 상태를 묻
    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숨었다'-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께서 원하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대답을 듣
    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내가 여기 숨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여
    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정신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정신과 전문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상하게도 정신병자들은
    하나같이 교만하다고 합니다. 제 정신이 들었건, 혹 정신이 없건 간에 '나는 부족합니다. 나
    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혀 없답니다. 다 많이 알고, 잘났고, 똑똑하다고 합니
    다. 그래,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정신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라고 소리질
    렀습니다. 그러니까 뒤에 있던 정신병자가 "네가 왜 나폴레옹이냐?"라며 따집니다. 또 다른
    정신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 전부가 다 잘난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교만한 자가 정신병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보면 도
    리가 없습니다. 들려지는 것도 없습니다. 가장 어리석고, 가장 우둔하고, 가장 바보가 되어버
    리고 마는 것입니다. 꽉 막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씀
    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
    라(호6:6)"-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십니다. 지식적인 것을 요구하고 계신
    단 말입니다. 안다는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철학적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헬레니즘으
    로 헬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고, 또 하나는 헤브라이즘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입
    니다. 헬레니즘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별개로서 지식과 감정이 따로입니다. 그러므로 아
    는 것은 아는 것일 뿐 결심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적인 생각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
    는 것을 하나로 봅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라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많
    이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가 '야다'라는 말입니다. '야다'는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쳐서, 체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지식을 가져서 안다면 그
    것은 곧 실천을 의미하는 온전한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을 가지고는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생각입니다. 이 앎은 전인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격
    을 움직여 생명의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가진 지식입니다.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자기 장례식 조사를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자신의 장례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프로그램을 자신이 만들어보세요. 여러분
    의 조사를 여러분 자신이 한번 써 보세요. 누구는 이런 사람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자 무슨
    말로 결론을 내려야 합니까? 이제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본래성을 알고, 내
    마지막 운명을 알고, 그리고 근본적인 나 자신의 본체에 의하여 오늘 현재 내가 무엇을 해
    야 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지식을 가졌습니까? 사랑은 어떻습니까? 뜨거운 사랑을 하는 그 순간 사
    랑에 의해 인격이 달라져서 온몸으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유행가 가사에서도 사랑하면 예
    뻐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순간부터 얼굴이 달라지고 사람
    이 완전히 바뀝니다. 남자라고 하면 무조건 욕하고 아주 부정적이던 여자도 일단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남자에 대한 편견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인생을 밝게
    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말하기를 정신적 상태에서 볼 때에 인간
    은 세 종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무관심하게 사는
    방임된 인간입니다. 자기를 내버린 인간입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말자, 하나님이 있어도 그
    만, 없어도 그만이다- 이렇게 관심없이 살다보니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고, 내가 누구냐 하
    는 것조차 물어보지 못하고 사는, 버려진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 못했으
    나 찾으려고 무진애를 쓰고 사는 철학적 인간입니다. 무지개를 따라가는 어린애처럼 '어디엔
    가 있겠지'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찾아 헤맵니다. 그저 헤매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종
    교적이요, 철학적 인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섬기며 하나님 안
    에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줄 알았는데 벌써 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벌써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며 그 은혜
    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매일매일 확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
    님 안에 있는 자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지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
    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순간 나를 알고 남을 알며 세상을 알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생각이 부족해서 망하고, 정치적으로도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일
    련의 모든 도덕적인 패륜행위도 알고 보면 바로 알아야 될 것을 모르는 데서부터 비롯됩니
    다. 또한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
    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능동적으로 효과적으로 창조적으로 알고 회개하
    고 돌아오도록 재촉하시는데 사람들은 계속 지식을 버립니다. 아니 알지 아니하려고 조금
    알아지는 것조차 거부하며 몸부림칩니다. 그 현장이 바로 술집이며 댄스 홀입니다. 이런 곳
    들은 똑똑한 사람들을 바보 만들고 일부러 미치게 하는 곳으로, 즉 지식을 버리는 곳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를 비인간화시키는 일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고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
    다. 본래 제사란 하나님 스스로의 자기 계시입니다. 또한 희생적 사랑을 제사를 통해서 우리
    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죄인과 의
    로우신 하나님이 만나는 그 현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가 속되
    게 되면, 속화되고 타락하면, 복을 받으려는 수단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귀한 예식이 하나
    의 수단이 되어 자기 중심,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종교 예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죄된 가증한 행위를 원치
    않는 그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공동번역에는
    본문 6절이 "제물 바치기 전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
    이라(호6:1)." 찢으시는 하나님, 때리시는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하
    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말씀하십니다. "심판이 있다. 예루살렘 성은 망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당장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심판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오늘 망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 것입니까? 의인의 자식은 걸식하지 않고 죄인의 자손은 망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살아있다고 무사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지금 성
    공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악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죄 값은 사
    망으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실천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분이시기에 때리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자녀를 책망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매를 쳐야 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매
    를 맞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싸매어 주고 도로 낫게 해 주시
    겠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생할 때에 에스겔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싸매어 주실 것이고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위로의 말씀
    을 주신 것입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하나님의 창조
    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잘못하면 부모들은 야단하거나
    때립니다. 아이들이 혼이 나서 울다가 잠이 들면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이 아닙니까? 자식들이 너무 속썩이면 나가 죽으라고 매질해
    놓고도 일단 가출하고 나면, 다 용서할 터이니 돌아오라고 다방면으로 찾아다닙니다. 왜 때
    리고 왜 웁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치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찢으
    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을 알아 달라고 말씀하고 계
    십니다.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하고 고통 당할 때에 일으키시고 부르시는 사
    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1장 5, 6절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아무리 때려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매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때리시는 아버지께서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 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불붙는 사랑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을 알아 달라 하심입니다.
    특별히 곧 치유하시리라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 "이
    틀이 멀다 하시고 살려주시고, 사흘이 멀다 하고 일으켜주시리라, 급하게 그저 회개하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바로 영접하고 치유해 주실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 - 여러
    분, 이 세대를 '지식의 홍수' 세대라고 합니다. 5년마다 지식이 배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끝
    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치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무식하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점점 더 어두워 가기에 세상은 점점 더 어두
    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동생이 언니한테 "나는 믿어도 언니처럼은 안 믿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언니처럼 매달리고 울고불고 하면서 광신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어도 이성적으로, 타당성 있게, 절제하면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니가 얼마
    나 복된 사람인지 알 때가 옵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도 있고 저런 신앙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색깔이 많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가지각색이지요"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믿
    음은 하나입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아직 교만하기 때문에, 아직 계산이 많
    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언니처럼 안 믿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무조건 하나님 한 분만 붙
    들고 울고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대학생의 신앙이 따로 있고 40대의
    신앙이 따로 있고, 직장인의 신앙이 따로 있고 노인의 신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
    앙은 오직 하나입니다. 울면서 매달리는 불쌍한 언니 같은 신앙, 그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구체적인 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돌아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면,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오듯 조건 없이 돌아와야 합니
    다. 돌아온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지 맙시다. 살리든 죽이든 아버지께 맡기고 무조
    건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째, 매를 맞으면서도 그 형편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실 매맞는 자
    식보다 때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괴롭습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십자가의
    사건 아닙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때리시고 그리고 구속하시는 뜨거운 사랑을 계시해 주셨습
    니다. 그러므로 매맞거나 그 어떠한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
    이 아버지께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셋째, 사랑의 응답은 사랑뿐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사랑을 원하십니다.
    인애란 무엇입니까? 주경학자 게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형
    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인애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
    웃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 순한 마음, 독이 없는 마음,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깨끗하고 흠이 없는 마음을 가지며, 이웃을 향해서도 깨끗하고 순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독하게 사랑하는 것 같은데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과는 대로가 뚫려서 철야하고 금식하는데 사람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
    한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사람하고는 교분이 그렇
    게 좋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담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나 사람을 사
    랑하지 못하는 것도 비정상이고, 사람은 지독하게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
    도 비정상입니다.
    또 인애라는 말속에는 충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충성이란, 의무나 도리를 다하는 것이
    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즉 제자로서의 도리, 종으로서의 도리, 교인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는 것,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없으면 충성을
    하지 못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습
    니다. 그러므로 불충성하는 사람, 맡은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운
    사랑이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가정에서 불충실한 사람은 아내나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불충실한 것입니다. 무엇
    이라고 변명을 해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인애가 끓어 넘친다고 하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은 사랑에 근거하고 사랑은 충성의 원동력, 강력한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데랴 온 군인, 즉 용병은 충성된 병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친히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갚을 길이
    없어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는데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지
    않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때에 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주인이 불러서 "내가 너
    를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마땅히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몹시 책망한 이야기
    입니다. 만 달란트는 천만 불에 해당하고 백 데나리온은 20불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비율은
    오십만 분의 일입니다. 만 달란트나 탕감 받은 그 감격으로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못
    할 이유가 무엇이며,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조건 없이 마땅히 용서해야만 했습니
    다.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 하나뿐입니다. 하나
    님이 나의 삶에 오셔야 살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시도록 초청한
    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바로 인애를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해 이기적이
    지 않고 희생적일 때, 책임을 지는 사랑을 베풀 때, 내가 내 욕심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다
    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마음을 열 때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
    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 무서운 심판을 모르며, 그 뜨거운 사랑을 모
    르며, 엄청난 용서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도 교만이 있고, 절망이 있고, 싸움이 있는 것입니
    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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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격려하는 사람이 되라
    끝이 좋을 자신 있습니까?
    좁은 문에 집중하라
    대표선수 교인이 됩시다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너와 함께 하느니라
    신앙 성장의 방해물을 제거하라
    우리의 멘토 다윗
    은혜를 받아야 산다
    아름다운 면류관
    부지런히 가르치라
    성도의 기도
    하늘에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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