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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
    2002-01-15 10:40:28   read : 151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후 13:11-13


    아기 낙타의 궁금증


    아기낙타가 엄마낙타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우린 왜 이렇게 눈썹이 길어?" 그러자 엄마낙타는 의젓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응, 그건 사막에서 부는 모래바람에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응. 그렇구나.."

    조금 후 아기낙타는 엄마낙타에게 또 물었습니다. "엄마, 우린 왜 발가락이 두 개야?" "응, 그건 사막에서 모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란다." "응. 그렇구나.." 아기낙타는 사막에 잘 적응되어 있는 자기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또 묻습니다. "엄마~엄마, 우리 등은 왜 이렇게 불뚝 튀어나온 거야?" "응, 그건 물이 없는 사막에서 물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란다. 이건 우리 낙타들만의 자부심이지." "응. 그렇구나.."

    그렇게 한참 얘기를 다 들은 아기낙타가 엄마낙타한테 말했습니다. "엄마... 근데, 우린 지금 동물원에서 뭐 하는 거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미있는 이 이야기를 적용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 왜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왜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서로 아름다운 삶을 나누며 사랑과 기쁨과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에 나가 맡은 일과 일터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며 악한 세력과 선한 싸움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요 선교사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집 안에 모여 식구들끼리만 친교하고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적하는 예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그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이제는 그 주님께서, 육체가 아닌 영적 존재로서, 우리와 같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성령이신 하나님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직접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의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모든 분야에 걸쳐, 그분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살아 계실 것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잠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분이 예수님이시고, 지금도 영적 존재로서 우리 곁에 계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영(靈)은 실체(實體)입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인 것처럼, 영적 존재인 성령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실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둘째 편지에서,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예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사귐, 이 셋이 하나가 되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오늘 우리들을 위하여 축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바울이 축원한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만,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갈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그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이, 인간이 누리게 되는 가장 큰복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를 떠난 무질서한 삶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일지라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왜 모르는지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 몸은 땅을 벗어날 수가 없고, 그 호흡은 공기가 없이는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인 고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서는 도무지 살아남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나와 "우리는 물 없이도 살 수 있노라"고 외치는 것처럼, 심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교회는 금년도 표어를 작년에 이어"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 정하고 부제로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로 결정했습니다. 금년에는 특별히 성령이 교통케 하시는 능력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망이며 성령의 미래적 역사입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열정적 신앙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성령은 항상 교회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으로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의 교회 안에서와 위에서 그리고 그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속적인, 기운을 북돋우시는, 각성시키시는, 인도하시는, 권능을 부여하시는 행동은 성령의 행동입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성령을 체험하기까지는 그것을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교통하심"을 체험합니까?

    첫째로, 교회는 그 자체가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올 때마다 친교의 그 무엇인가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색유리 창문의 색처럼 우리가 단지 한번만 붙이면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왔다가 가는 바람, 혹은 확 타오르다가 타서 없어지는 불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은 그가 원하실 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며, 그 후로 우리가 그를 찾을 때, 그에게 응답할 때, 그의 생각에 순종할 때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의 예배 중에 강력하게 임재하심을 느껴왔으며, 우리가 단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무익한 시간을 보내는 듯 싶지만 그때조차도 그의 진리의 말씀이 누군가를 위해 말해지고 있음을 압니다.


    둘째로, 우리는 종종 일종의 "교회 안의 교회"인 다양한 종류의 모임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경탄합니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순절 날에 다락방에 모인 자들에게 임하였던 성령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강렬하게 개인적인 동시에 또한 철저하게 단체적인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모든 시대를 위해 계속 되도록 작정된 교회에 대한 영원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한 집단의 사람들을 장악하시며, 그들로 믿게 하시며, 그들을 훈련시키시며, 그의 봉사를 위해 그들을 사용하실 존속하는 작은 모임들을 필요로 함을 압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이 비공식적인, 성령을 경험하는 작은 모임들이 없으면 교회는 침체될 정도로 형식적으로 되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과 밖의 사람들에게 설교되고 있는 곳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발견합니다.

    기도, 소망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위대한 사랑이 있을 때 성령께서 한 인간을 장악하시어 놀라운 방식으로 그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koinonia’란 어휘는 보통‘교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3:13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축복기도에서는 ‘교통’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독특한 표현이다. 교통이란 말은 교제라는 말보다 좀더 강한 표현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교통케 하시는 성령이란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이루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을 수 없으며,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지금도 내 안에 계심으로 하나님과 교통케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이란 곧 하나님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수직적 관계는 예배를 통해서 견고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교통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교통은 성도들 상호간에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성도와의 교통이 자연스럽고 당위적입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구제로 나타났으며 성도들의 합심기도로 나타났습니다. 성도들은 연합합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도간의 사랑과 합심으로 평화롭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입니다. 교통은 지속성이고 교통케 하시는 성령은 꾸준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교통에 대한 설명에서 고린도후서 13:13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 나오는 ‘성령의 교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wniva)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공동체, 사귐, 교제, 참여, 나눔 등의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신자들은 성령의 교통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 등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물론 성령의 감화, 감동, 충만도 좋은 것이지만 성령의 교통이라는 말이 가지는 공동체적 차원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교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가 되게 하고, 또한 우리 서로 서로가 교제하여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성찬예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떡과 그리스도의 피인 잔을 먹고 마심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찬예식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나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하고, 각 지체들이 연합하여 한 공동체를 이룬 것을 거듭 확인하며 기리며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이라는 수단이나 도구를 가지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도구로 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원래의 뜻입니다. 성령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가장 깊고 친밀한 하나 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사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고,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심판주와 죄인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교회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의 깊은 연합을 보여 주셨습니다. 교통이란 코이노니아라는 것인데, 코이노니아에서 커뮤니티, 즉 공동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성령의 교통은 성령의 개인적인 감화와는 조금 다릅니다. 성령의 교통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교통케 하시는 성령


    삼위일체적 축도의 원형으로 유명한 고린도후서 13:13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은혜가,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돌려지고 있는데, 성령에게는 교통하심이 돌려지고 있는 사실은, 성령의 사역이 특별히 무엇인지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빌 2:1 참고). 화평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된 백성들이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된 것도 ‘성령 안에서’(엡 2:18)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이 돌로 하여 그 위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도 ‘성령 안에서’(엡 2:20­22)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성령의 사역 또한 교통케 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한 에베소서 4:2∼4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교통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고린도전서 12:4∼13의 말씀은 교통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또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20절)을 육체의 일로서 열거한 사실은 반대로 성령의 하시는 일이 서로 교통케 하시는 일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것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라고 한 것입니다. ‘만민에게’, 즉 ‘자녀들’과 ‘늙은이’와 ‘젊은이’와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라 하신 예언에서 강조되는 것이 무엇인가? 남녀노소와 계급의 구별 없이 임하셔서 서로 교통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의 모든 교통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고.

    언어의 소통에서 삶의 교통에로


    사도행전 1장의 기록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4­5절).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절). 예수님의 이 분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14절)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 두 가지 약속, 즉 첫째로 성령이 임하실 것이며 둘째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온 땅에서 주님의 증인들이 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은 놀라운 현상을 동반했습니다. 즉, “그들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행 2:4).

    사도행전 2:6에 따르면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고, 7∼8절에 의하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인데 듣는 사람들은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화평과 일치의 관계의 시작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 시작은 바로 언어의 소통이고, 그 결과는 다름 아닌 삶의 교통이 아닌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 그것은 바로 교통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그 확장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한국교회가 이제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통케 하시는 성령과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우리에게 잃어버렸던 생명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음으로써 우리에게 회복시키신 생명을 실제로 우리가 소유하고 향유하도록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천지창조 시부터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기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새 생명이란 단지 몸으로 다시 사는 것도 의미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의 치료법


    좋은 의사는 환자에게 즐거운 산보를 하거나 해변 같은 경치 좋은 데 가서 안정을 취하며 영양가 있는 음식만 먹으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일정한 운동과 음식을 금하고, 칼로 째고, 불로 지지고, 쓴 약을 규칙적으로 먹도록 시킵니다. 환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좋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는 병을 낫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 전체가 한 부분도 병 없이 언제나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정신상의 끊임없는 괴로움도 모든 사람이 극복해야 할 시련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높이기 위한 어려움 앞에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을 의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령의 능력은 예수님을 무장시켰고 사도들과 초대교회를 무장시켰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오늘의 교회가 존재하고 성도가 존재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4에 분명히 명시한 것처럼 전도하는 것도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또 믿음도 성령의 능력으로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성령이 내재하고 계신다고 하는 믿음은 갖고 있으면서도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체험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하지만 영혼은 메마르고 힘을 얻지 못하고 무력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지만 그리스도를 향해 변화된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거하시지만 성령께서 능력으로 사로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로 전도 하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많으나 생활에 변화 받는 자가 적습니다. 교회는 많으나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통하여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교회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죄는 성령의 능력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소극적 사고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가 와서 인생들을 흔들지라도 이상 중에 전진하는 자는 최종승리가 보장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암교회 성도님들은 성령충만으로 꿈꾸는 자가 되십시오. 연약한 우리일 지라도 꿈꾸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이 마지막 세대에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놀라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꿈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절망적인 무수한 난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어두운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앞의 푯대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주는 마음의 담대함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잃는 순간을 당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 은 "생명의 샘"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의 모든 삶은 카리스마적 체험이 된다." 성령에 사는 사람의 경험, 지식, 모든 사건이 전부 카리스마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문제이며 카리스마적 체험으로 의미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요. 모든 일에 하나님과 나와의 은사적 관계, 카리스마적 관계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시인이 "잡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습니다.


    "시드는 꽃을 더 이상 시들지 않도록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흐르는 강물을 붙잡을 수가 있겠는가?


    지는 해를 산마루에 매어 둘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향기 없는 조화를 만들어내고, 하늘을 잃어버린 박제된 새들을 만들어간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봐도, 아무리 멋진 박제된 새를 만들어봐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인간의 존재에게도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지고 그 물질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내가 일평생 영화를 누리겠다는 것은 물거품의 결과를 맺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존재의 참 비결은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희망 안에 사는 사람은 노래를 불러주지 않아도 춤을 추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환경이나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아도 감격과 감동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2년도 모임마다, 예배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존재하는 한, 교회는 영원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 잡혀 있는 한, 성도들은 절대 주저앉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 금년 한 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된 생명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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