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곧 눈물을 담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받으시기를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신 생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를 울리는 생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우리로 하여금 울게 하시는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울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울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울려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아주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뭡니까?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은혜는 나를 울려주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부모에게서 내가 받고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효자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눈물로 고백할 때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의 사람들은 울려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가슴을 울려주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게 만들고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로 하여금 울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가장 위대한 인물로 우러러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은혜는 주님께서 울려주는 눈물을 받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으로 해야 할 것은 눈물을 담아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세 종류가 있습니다. 분노하는 관계로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불행한 관계입니다. 웃으면서 만나는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관계입니다. 눈물로 만나는 관계는 신비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눈물로 만난다면 신비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만날 때 눈물로 만나고 있다면 이것은 신비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세 번 우셨다는 기록을 성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사랑했던 가족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를 찾아서 종종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서 무덤 가운데 들어간 지 나흘 되었을 때 동네 사람들도 그 무덤 앞에서 울고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도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도 마음으로 민망히 여기사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의 우정을 담아 흘리시는 눈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조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또 하나의 큰 눈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라고 하셨던 말씀대로 그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하고 기도할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눈에서 눈물이 핏방울처럼 떨어졌습니다.
주님은 그 눈물의 농도가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조용하게, 자기 조국을 위해서는 큰 소리로,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통곡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개인적인 인간의 우정을 담아서 흘리시던 애정의 눈물, 더 나아가서 민족을 품에 안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민족애의 뜨거운 눈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구령의 깊은 통곡이 겟세마네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기로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시면서 주님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눅 23:29-31) 하고 주님은 통곡하시면서 우리를 향해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주님의 눈물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흘러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다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2-44)
그러면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어 쫓으시며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눅 19:46)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먹는 음식 가운데 최고의 음식이 눈물의 음식입니다. 눈물로 먹은 빵은 그 빵이 밥맛이 아니고 신비의 맛이 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어머니의 눈물을 먹은 자식은 효자가 됩니다. 목자의 눈물을 먹는 성도는 생명을 건 동역자가 됩니다. 선생님의 눈물을 먹은 제자는 역사에 위대한 사상가가 됩니다.
이 땅에서 가장 숭고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먹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은 자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 정신으로 살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가서 목회할 때 어느날 고난주간에 금식하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성전에 가서 엎드릴 때 십자가를 보는 순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는다"는 감동이었습니다. 저는 통곡하면서 이렇게 회개했습니다. "주님, 죄인입니다. 주님 악한 종입니다. 주님 삯군 목자입니다. 주님 불효자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 버리셨는데 저는 아직도 세상을 버리지 못한 탐욕의 종이오니 용서하소서." 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제단을 적시고 그 이후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렀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길을 걷는 순간에도,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렀습니다.
어느날 제가 새벽에 종을 치기 위해서 줄을 잡고 종탑 밑에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이 고을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 멸망해가는 영혼을 살려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때 제 가슴속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환상이었습니다. 저는 종줄을 놓고 땅바닥에 엎드리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주님, 왜 우시나이까?" 주님께서 제 가슴에 잠잠히 울려준 음성은 "종아, 내가 네 안에서 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주님께서 이 종의 가슴속에서 울려주므로 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울게 하시므로 울고, 주님이 웃게 하시므로 웃고, 주님께서 탄식하시므로 탄식하고, 주님께서 괴로워하시므로 괴로워하는 종이 되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어도 눈물로 적시어 먹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눈물로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눈물로 담아준 순간에 행복을 얻었고, 신비를 얻었고,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더 이상 소원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담아주신 그 눈물 이상의 더 무엇을 얻겠습니까
하늘을 보아도 주님께서 눈물을 담아주시고 땅을 보아도 땅에서 눈물을 담아주셔서 그 눈물로 하나님의 신비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무엇을 받으시기 원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우리의 고백은 눈물을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으로 표현됩니까 무엇을 주어야 어머니 마음을 다 주겠습니까? 눈물을 흘려주는 것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다 담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눈물을 먹은 자식은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흉년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께서 모든 형제들에게 밥을 해서 다 나누어 주고 어머니는 빈그릇에 물을 담아 마시면서 더 줄 수 없는 것이 가슴 아파 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때 저는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물을 먹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먹은 이 자식이 어머니의 마음을 먹었지 어머니의 간장을 먹었지 효자가 되어야지'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한국 민족 역사의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가르치면서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쳐들어와서 한국의 여인들에게 행했던 참상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눈물을 먹는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만남이었고 신비의 만남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그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스승의 눈물은 하늘의 눈물이지' 그 눈물을 먹으면서 한국이라는 말을 가슴에 담았고 '한국 민족을 위해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 깊은 민족애를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눈물을 담아주는 스승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담아주고 있습니까? 눈물을 담아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하늘이 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종에게 눈물을 담아준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십년 목회하면서 종을 울게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감동을 주고, 또 가슴이 쓰리도록 하늘의 신비를 담아주는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나를 만났을 때마다 그들은 고백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을 생각만해도 눈물이 납니다. 목사님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흐릅니다. 오늘은 목사님이 생각나서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의 만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의 신비의 만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의지가 강해서 눈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안일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눈물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담으면 의지가 강한 사람도 눈물이 흐를 것이고 인생을 화려하게 살아온 사람도 그 눈물을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은 진실을 담은 고백입니다. 눈물은 양심의 이슬입니다. 눈물은 사랑의 샘물입니다. 눈물은 하늘의 심정을 담아 내리는 빗방울입니다.
웃음 속에는 거짓이 있습니다. 웃고 욕하고, 웃고 시기하고, 웃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 속에는 진실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수십년 동안 목사에게 웃어준 사람들 가운데 배후에서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담아준 사람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최상의 은혜, 이것은 주님의 눈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도 눈물을 흘리셨고 지금도 나를 향해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던 그 눈물을 담아 흘러주고 있습니다.
첫째, 평화는 주님을 왕으로 모신 세계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주님께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평화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민족, 평화를 잃어버린 가정, 평화를 잃어버린 인간들을 향해서 주님이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담아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이 민족의 감격스러운 날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분단 50년만에 남북의 정상이 함께 만났습니다. 얼싸 안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합니다. '평화의 만남이라는 것이 뭐냐? 얼싸안는 것이 평화인가 아니다. 진실로 주님의 눈물을 담아서 두 정상이 눈물을 흘리기까지는 평화는 오지 않는다.'
"분단 50년동안 서로 원수 맺고 살아온 것이 억울하다. 우리 과거가 너무 너무 한탄스럽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비통한 일인가" 하고 서로 껴안고 운다면 그 이상 더 큰 평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던 그 주님의 눈물이 평양을 적시고, 서울 땅을 적신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주님을 향해서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일이 없습니까? 주님께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아서 흘려야 할 눈물이 한 방울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주님, 눈물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눈물을 담아서 주께 드리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부모님을 향해서 눈물 한방울도 흘려보지 못한 자녀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내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으로 눈물을 담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눈물을 담아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가장 고귀한 눈물은 하나님을 향해서 쏟는 눈물이며, 자기 조국을 위해서 쏟는 눈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의 눈물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릴 수 있는 눈물은 주님의 눈물이며 그 눈물을 주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눈물을 우리에게 흘려 담아준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둘째, 성전 안에 숨어있는 강도를 잡아내야 합니다.
주께서 성전에 가셔서 채찍을 드사 장사치들을 내어쫓으시며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인 아닌 것이 들어와서 주인노릇 하는 것이 강도입니다. 주인은 쫓겨나고 들어와서는 안될 것이 들어온 것이 강도입니다. 오늘날 주께서 평화를 빼앗은 이스라엘 민족의 강도를 누구로 보았습니까? 로마로 보았습니까 권력잡은 정치가로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많은 민중들은 자기들의 강도가 로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의 권력에 편승된 무리들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로마가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를 빼앗은 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도를 성전 안에서 찾아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밟고 있는 자들, 제물로 들어와야 할 자들이 상품으로 들어와서 우글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하고 있는 장사꾼들로 보았습니다.
원래 멀리서 제물로 와야 할 소나 양을 먼 길에서 가지고 오기가 어려우니까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성 밖에서 짐승을 사서 제물로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장사꾼들과 제사장들이 결탁해서 돈을 받고 성전 틀 안으로 장사꾼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데서 짐승을 팔아가지고 남는 이득을 대제사장에게 공납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거늘 어찌하여 장사치들이 여기 들어왔는고" 하면서 내어쫓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서울 장안에 온다면 이 민족의 평화를 빼앗아가는 강도를 누구에게서 찾겠습니까? 지난날 동안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강도라고 생각해서 일본을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을 쫓아내니까 미국과 소련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미국을 쫓아내고 소련을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가고 나니까 또 하나의 권력잡은 강도들이 들어와서 수십년 군사정권으로 국민을 누르고 핍박했습니다. 우리는 국회 의사당을 보면서 강도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타락한 정치가들을 바르게 살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강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강도로 보지 아니하고 '너희가 바로 강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강도로 내쫓고 있습니다. 이 집이 강도의 굴혈이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미국에 부흥회를 갔을 때 캔사스 시티에서 집사님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아니하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외가 돈을 벌기 위해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흑인 강도가 들어오더니 "엎드려?"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저 구석으로 가?" 하고 말했습니다. 두 내외가 벌벌 기어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 살려주면 다 가져가도 괜찮지' 구석으로 가 있는데 또 "금고문 열어?"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니까 기어가서 금고문을 열어주면서 "다 가져가도 좋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강도가 금고문이 열리니까 돈을 꺼내서 가게에 있는 좋은 물건을 들고는 공중에 총을 몇 방 쏘면서 떠났습니다. 두 내외가 무릎을 꿇고 이런 책망을 듣습니다. "너 강도에게 목숨만 살려주시면 다 가져가도 좋습니다. 그랬지? 네가 언제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 앞에 한번이라도 감사하면서 다 바쳐본 일이 있느냐 강도 하나님 잘 섬겼다. 너는 지금까지 강도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았구나!"
지금 우리의 심령 속에는 수없는 강도가 들어와서 주인노릇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심령이 강도 만나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 심령이 무엇으로 짓밟혔습니까 무엇으로 우글거리고 있습니까? 어떤 때 우리 심령속에 짐승이 우글거립니다. 주님의 음성은 사라지고 짐승이 우글거립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주님의 음성은 사라지고 짐승떼 우글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진실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양심적입니다. 기도할 때 그 순간만은 선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지킨 사람들이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지킨 사람이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기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들으려고 교회 나옵니다. 그래서 설교가 시원치 않으면 교회에 안오려고 설교 누가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 만나려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친구가 이사가면 자기도 떠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 하려고 교회에 나오다가 배울 것 없으면 그만 둡니다. 어떤 사람은 연애하려고 다니다가 그 사람 떠나면 자기도 떠납니다. 그런데 기도하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끝까지 나옵니다. 누가 설교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이 교회를 지키며 결국은 민족을 지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친히 성전에 가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거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을 주님께서 찾고 있습니다. 그를 애국자로 찾고 있습니다. 끝까지 이 민족을 지키면서 이 민족을 사랑하면서 이 나라를 지킬 자가 누구냐? 정치가가 아닙니다. 사업가가 아닙니다. 교육자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착한 것 아닙니다. 부자 되었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직분 받았다고 인간성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 민족을 지켜온 위대한 애국자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순국한 선열들, 그리고 3·1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죽어갔던 우리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서 끝까지 기도한 사람들이 이 지상의 애국자요, 영원한 애국자, 하나님 나라의 애국자, 예수 그리스도 그 믿음의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