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받는 사람 2002-01-11 01:31:12 read : 137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복음 3:22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가슴이 설레이도록 울려준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이 바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이 이 말씀으로부터 출발했으며 그의 모든 사역이 이 말씀을 감동으로 받으면서 계속 되었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을 때도 이 음성을 들으면서 가슴에 담고 그의 십자가의 생애를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생애를 일관되게 움직였던 신비한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도 이 음성으로 일어나야 하며 우리가 하루동안 일할 때도 이 음성을 들으면서 일해야 되고, 내가 잠잘 때도 이 음성을 들어야 하며 마지막 내가 인생을 마감하고 천당에 갈 때도 이 음성을 듣고 죽어야 참으로 행복한 생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기간동안에 이 음성이 세 번 들렸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형체같이 강림하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마 3:16-17, 막 1:9-11, 눅 3:21-22) 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 들려준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서 기도할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가 너무 좋아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하사이다" 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마 17:5, 막 9:7, 눅 9:35).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이 음성은 곧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고 확증시킨 마지막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음성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에 따라 일생을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사랑받는 아들로 사셨고, 또 사랑받는 아들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주신 음성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뭡니까? 우리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영광이며 내게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첫째,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왜 태어났느냐고 부모님에게 물어보아도 해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하나의 해답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랑받는 자로 이 세상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 해답 외에는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왜 사느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산다."
혹시 이 세상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이 없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가는 곳마다 미움 받으며 살아왔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고 결혼하여 남편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는 한많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탄식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음성은 우리에게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선택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해 주려는데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나 자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으세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 위에 삶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에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자녀를 낳은 부모는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해 주려고 낳았다고 할 때 인격적인 관계가 됩니다. 결혼할 때 서로 사랑해주려고 만나야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만날 때 사랑해주려고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가가와 토요히꼬(賀川豊彦)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습니다. 그는 슈바이처, 간디와 함께 20세기 3대 성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천풍언은 어느 시장 소실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본처 자녀들과 한 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구박하고 학대하는지 그는 살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가 열두살 되던 해 길 모퉁이에 서 있는데 구세군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이때 하천풍언은 즉시 그 대열에 따라 나섰고 전도 대원이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서자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대받는 서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삶의 의욕을 얻었습니다. 그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는 이같은 깨달음에서 새로운 출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자기 존재를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 이 한 사건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존재를 보면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사랑받기 위해서 산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을 받아야 산다.
사실 우리는 사랑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없이 살아온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사랑받은 일 없다고 말하지만 사랑없이는 지금 살아있지 못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살 맛이 나고 살 의욕이 있고 살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일년이 넘도록 따라 다니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이 왜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랑할 만한 사이가 못되는데...' 그런데도 남자는 변함없이 사랑을 고백해 옵니다. 어느날 그 남자의 정성이 너무나 지극해서 여자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무엇이 좋아서 그러시는거에요. 왜 나를 사랑하는거요. 사랑이 무엇인데요." 그랬더니 이 남자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당신을 사랑하면서부터 사는 맛이 나고 세상이 아름답고 내가 소중해집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면 살고 싶은 의욕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살리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자연 만물이 소생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어린 아이를 살려냅니다. 사랑은 모든 존재를 살립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시는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고 자연만물까지 살리려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살았다는 것 자체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무도 사랑을 받을 때 잘 자랍니다. 저 영국 런던의 어느 교회 정원에 열두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각 나무에 열 두 제자의 이름을 붙였는데 가룟 유다의 나무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배신자" 하면서 침을 뱉고 지나가니까 나무가 말라죽었습니다. 말없는 나무도 계속 미워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상처를 통하여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가장 많이 받고 있습니까? 기적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고난받는 예수에게 부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상처받은 예수에게 부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받은 생애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상처를 받으므로 사랑받는 아들임을 확증시켰습니다.
우리는 많은 상처를 통해서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삶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사랑받는 자」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이렇게 분석하여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선택받은 자요, 둘째는 축복받은 자요, 셋째는 상처받은 자요, 넷째 나누어 주는 자라고 분석했습니다. 그것은 깊은 영성에서 얻은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창세 전부터 사랑받도록 택함을 입었습니다. 사랑받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떤 경우에도 축복받은 자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자가 사랑받는 자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까? 내가 병들 때, 약할 때 우리 부모가 가장 많이 사랑해 주었습니다. 자녀들이 병들고 아파할 때 부모의 진한 사랑이 흐르고 깊은 애정이 담아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큰 사랑은 우리의 상처를 통하여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십자가의 상처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상처로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지금 내 생활이 실패와 좌절, 배신, 가난, 질병, 온갖 상처로 신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은혜로 채우십시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상처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아니고서는 그 사랑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가 있습니까 버림받은 상처가 있습니까? 가난과 실패를 통해서 내가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상처가 얼룩져 있습니까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상처가 있습니까? 그 상처 속에 담아줄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 받겠습니까 그래서 나 자신이 비참한 존재로 소외당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내 자신이 모든 삶의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을 때 내가 사랑받는 자요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이때 모든 상처가 치유될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고난에 대한 해답을 무엇으로 내리겠습니까? 고난은 축복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상처나 얼룩진 고난에 대하여 우리의 해답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아니하고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구나! 이렇게 고백하면 그 상처가 치유되면서 그 상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상처받은 일생입니다. 전 생애가 상처의 일생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사 53:4-5)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가슴속에 무슨 상처로 신음하고 있습니까? 자기만이 아는 상처로 괴로워하는 그 아픔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나는 사랑받기 위해 상처를 입었다고 고백하면서 승리하십시오.
넷째,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라고 푸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을 믿을 수 없을 때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보면 엄청난 자기 존재에 대한 감사가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다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 받은 것을 모릅니다.
오래 전에 안양 교도소에 설교하러 다닐 때 일입니다.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은 청년이 출소한 후에 어느날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부모를 잘못 만나 내 기구하다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서 고아원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바람이 나니 어머니는 가출하고 새 어머니는 자기를 싫어하니까 고아원에 맡긴 것이 결국 교도소를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어머니는 밉고 자기 아버지도 죽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저도 섬짓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물었어요. "당신은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없오?"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받은 일이 없오?" 아무에게도 사랑받은 일이 없다 했습니다. "당신이 고아원에 갈 때가 몇 살이었오." 물으니 "다섯 살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때까지는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군요. 형제여, 형제는 부모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것이오. 내가 어린시절 생명을 살려준 사랑은 다섯 살 미만에 받은 것이오. 당신이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 받은 사랑을 알면 인생 전체가 축복이 될 것이오. 감사하시오." 했더니 엉엉 울면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잘해주었고 무엇을 주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믿음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낳게 하셨는데 나를 낳게 하기 위하여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택하셨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상처를 입힌 부모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하신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상처까지도 다 사랑으로 믿고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사랑을 다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그 사랑으로 믿어질 때 내 사랑이 풍성한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스웨덴의 감독 니그렌이라는 사랑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아가페와 에로스」라는 고전적인 책을 쓴 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가페는 사랑함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사랑이요 에로스는 필요에 따라 사랑하는 사랑이라"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치한 사랑은 자기 욕구를 위한 것이요 무엇인가 받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요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작이 자기 욕구로부터 오는 이기적인 사랑이 있고 상대적으로 받았으므로 보답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고 이유가 없어도 사랑하기 위해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사랑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시는 마음을 읽어야 하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하며 그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를 받을 때 모든 것을 살려놓는 엄청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 있습니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받은 것을 믿지 않을 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사랑받은 것이요,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 사랑받은 증거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다만 사랑을 모르고 산 것이 죄요, 불행이요, 실패인 것입니다.
다섯째,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면 사랑은 썩어버립니다. 흐르는 물은 썩는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로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을 나누어 주는 자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사랑은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다섯가지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첫째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요, 둘째는 책임을 지는 것이요, 셋째는 존중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해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해야 될 줄은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안생깁니다.
이런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임해야만 사랑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사랑의 마음, 사랑의 힘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랑받는 것도 성령의 은사요, 사랑을 주는 것도 성령의 힘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임하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가정에 돌아가 자기 아내를 볼 때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성도를 만날 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만나야 합니다. 그때 내가 인격적인 존재가 되고 그 사람도 인격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이것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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