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4월 29일 (화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목사를 막아라, 텅빈본당 /목사 연금 1,600억으로 '돈 장사'한 집사 구속/ 캄보디아 박율 목사 체포 충격               최태민 구국선교단 참여 목사들 / 십일조 하지 말라는 목사 /한우갈비’외치는 기감목사들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서울광장서 개막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 무죄               선교사들 위한 안식관 두 곳/ '노트북이 뭐라고' 소송 총동원한 사랑의교회               언더우드 후손 28명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군종장교 범죄               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목사님이 운영하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예장통합 ‘제2의 세습방지법안’ 총회 통과/ 예수님처럼 교회도 하늘에서 내려와야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적극 반대 /목회자의 고백 7가지 실수               총회장 2명을 배출한 여인의 힘! /복음화율 10% 안 되는데 주일학교만 1천 명              

  홈     이삼규     강문호.     고신일     곽선희.     김광일.     김기석.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성광.     김성수     김은호     김정호.     김홍도.     류영모.     명설교     박봉수.     오주철.     옥한흠     유기성     이동원     이성희.     이양덕.     이영무     이윤재     이재철.박영선     이정익     조봉희.     조용기.     주준태     지용수     피영민     하용조     한경직.     홍정길.임영수     해외목사님     관     괄사치유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한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사건별설교(구약)     사건별설교(신약)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샘플설교
  오래된 설교(왕)
  카드,핸드폰결제

설교내용검색

네이버.다음.구글


시작페이지 설정


호산나 자동차


교회인쇄주보디자인


밀알.현수막.주보


제주2박3일210.000원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남학매일성경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베리타스칼럼
  • 강남신앙간증
  • 아멘넷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강문호목사
  • 고신일목사
  • 김기석목사
  • 김대동목사
  • 김명혁목사
  • 김성광목사
  • 김승욱목사
  • 김형준목사
  • 김흥규목사
  • 명성훈목사
  • 박광철목사
  • 박건목사
  • 소강석목사
  • 이동원목사
  • 이성희목사
  • 이한규목사
  • 정근두목사
  • 정태기목사
  • 조태환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교단 사이트

    말씀,QT

    사전.지도사이트

    성화,주보그림자료

    성경연구공부자료

    성경신학 자료

    Home

    그리스도인의 위상 /행5:12-32
    2002-01-29 13:25:36   read : 120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변화'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행하신 표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물이 굉장히 맛있는 포도주가 되었어요.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나빠서 늘 포도주를 즐겨 먹었는데, 그 맛없는 물이 맛있는 포도주가 되었어요. 엄청난 변화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도 예수 믿는 것을 한 마디로 얘기하는데, 변화의 정도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암환자가 나아도 굉장한 일인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어요.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변화의 징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가 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혹시 여러분의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 남편이 여러분이 교회에 나가고 난 다음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이 후부터 어떤 다른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 집사람이 교회에 나가더니 달라졌어!"
    또한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의 직장 동료와 상사들이 여러분에게서 어떤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껍데기만 있는 신앙은 아닌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구원받지 못한, 가치관이 여전히 바뀌지 않은 그저 종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늘 믿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항상 믿는 자로서의 독특성을 지녔습니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과 무언가 달랐어요.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그 위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대 예루살렘 성에 예루살렘 교회로 말미암아 그 도시가 떠들썩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 하면 그들의 위상이 얼마나 하늘에 있었던지... 로마 시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은 받았을지언정, 그들의 위상은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로마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 고관들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잡아넣고 핍박하면서도,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에는 그들의 배우자를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위상이 있었어요. 비록 그들이 재산도 없고, 핍박받는 종교단체의 한 무리일지 몰라도...
    그 당시 로마 사회는 지극히 타락해 있었어요. 딸을 시집 보낼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남자들과 여자들이 음탕했어요. 서로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로마 고관들은 그리스도인들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것이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암암리에 그 사회를 이끌어가며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해서 어떤 독특성을,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좁혀서 당신은 어떻습니까? 가정과 직장에서, 친구와 친척에게서, 믿지 않는 그들로부터 어떤 위상을 여러분은 얻고 계십니까?
    이 사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변화 -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자신의 몸을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찢기시며, 우리를 변화시킨 이 놀라운 신분의 변화 - 와 위상을 다시 한 번 회복해야 될 때가 왔다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위대한 위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는가? 본문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야 한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12절에서 16절까지 보면 굉장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15절을 보세요.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사도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베드로를 한 번 만나기가 너무나 어려우니까, 베드로만 만나면 모든 병이 다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니까, 병자를 메고 와서 길가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손은 고사하고 그림자라도 한 번 맞으면 낫겠다고 줄을 선 사람이 많았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조금 더 강해(講解)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우리의 믿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그때 사도 바울의 손수건만 갖다 대도 병이 나았다면, 오늘은 왜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영안교회 담임목사인 이 박정근에게는 왜 그 절반의 능력도 없는가? 그림자는 고사하고 안수를 열 번씩 해도 왜 감기 하나 못 떨어뜨리는가?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도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능력이 일어난다고 성경구절을 갖다 댑니다. 철야하며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면 그런 능력을 받지 못할까 봐 기도원에 갑니다. 그냥 하면 안 되니까 40일 금식기도를 2회, 3회 합니다. 혹자들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며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원에서 병이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나은 것은 전부 위장병이요, 속병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은 못 보았어요. 우리 교회에도 수많은 능력 있다는 부흥사가, 제가 오기 전에 다녀가셨더군요. 그 가운데는 사람을 "얍!" 하면 쓰러지게 하는 분도 있어요. 지금 서울에서 큰 목회를 하십니다. 그 분이 하는 부흥회 마지막 날, 전교인을 세워놓고 이마를 치면 다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 교인인 이호놈 집사님의 눈을 뜨게 하지 못했어요. 아무도 그 분의 눈을 보게 하지 못했어요. 그 집사님의 믿음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그 당사자의 믿음에 관계없이 사도들이 손수건만 갖다 대고, 머리만 한번 쓰다듬어도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떴다고 성경은 분명 얘기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능력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봅시다. 12절을 보세요.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는데, 누구에 의해서인가 하면 사도들의 손에 의해서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믿는 자는 누구나 다 능력을 받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얘기합니다.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켰다고요.

    이 사도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특이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당시, 이 땅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셨어요. 그 교회를 세우는 주춧돌을 삼은 사람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이기 때문에 사도들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공급하신 것입니다. 그 능력이 오늘 이들로 하여금 그림자만 쏘이게 했던 겁니다. 손수건만 대어도 병이 나을 정도로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일은 우리가 본받고 답습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박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병이 낫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기적이 안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하고 의문이 생기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제 얘기를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게 오해하니까, 늘 우리 가운데 불신이 생기는 겁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집사람의 암을 낫게 하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배태익 성도의 암을 낫게 하여 살아있는 것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믿는 겁니다.
    오늘도 기적은 있어요. 오늘도 힐링(healing)은 있어요. 오늘도 하나님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힐링(healing)은 있되 힐러(healer)가 없다는 겁니다. 병 고침은 있되 병 고치는 자, 오늘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러한 사람을, 사도들을 이 땅에 남겨두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시대 사도들과 같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오늘 아무도 없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해도 그런 일은 나타날 수 없는 겁니다. 왜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병을 고칠 것인가? 내가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면 내 병을 고쳐 주실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를 데려 가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12절을 다시 봅시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 재미있는 것이 복음서에 보면 '기사'라는 단어밖에 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는데, 그것을 '기사'라고 표현했어요.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가면, 똑같이 예수님이 병 고치고 기적 일으킨 것을 '표적'이라고 얘기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이 사도행전에는 '표적과 기사'가 같이 등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표적과 기사가 다른 사건입니까? 아닙니다. 똑같이 병을 고친 사건인데, 성경이 그것을 다르게 부를 뿐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더니, 사람들이 "와~ 기차다! 와~ 놀랍다! 저건 기사(Wonders)야! 초자연적인 능력이야!" 라고 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가 끝나가면서 사도 요한이 그 말씀 가운데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이 기사만 가지고 놀랄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의 표적으로 인식해야 된다." 표적이란 기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 뒤에 있는 하나님의 교훈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기사가 일어나고 표적이 따라옵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믿는 사람들은 모든 기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그 자체만을 사모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기적을 왜 일으키셨는지, 하나님이 그 기사를 왜 우리 가정과 교회에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사건 자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하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의 손으로 머리만 쓰다듬어도 병자들이 낫고, 수많은 믿는 자들이 늘어나서 사도들의 능력이 전하여진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의 삶을 영위해야 할까요?

    12절에서 16절을 읽어보면 한 가지 굉장히 비슷한 것이 있어요. 이 말씀을 깊이 읽는 가운데 와 닿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서 돌아오신 것 같았어요. 사도들이 행한 기적은 예수님이 행한 기적과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방법과 그 모양으로 그들을 고치셨어요. 그런데 사도들이 똑같이 예수님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전도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그들의 눈길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겠는가?
    원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과거에 죽었던 예수,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나는 예배당에 있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며 변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사람도 많고, 도를 닦은 사람도 많습니다. 무력을 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 부족한 나를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말한 마디를 할 때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셔서 내 혀를 다스리는 겁니다. 화가 날 때 말을 뱉고 싶다가도 참을 수 있는 겁니다. 행동 하나를 할 때에도 예수님을 닮게 하는 겁니다. 내 생각을 날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위상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살아 계셔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소망!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살아나시게 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감옥에 들어갔어요. 천사가 나타나서 그들을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게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 베드로가 마지막에 어디에서 죽었습니까? 그는 감옥에서 죽었어요. 왜 이 때는 풀어주시고, 저 때는 안 풀어 주셨을까요?
    사도 바울도 감옥에서 한번 풀려났는데, 그가 마지막에는 감옥에서 죽었어요.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아, 그 때는 기도를 많이 했고, 마지막에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기도를 소홀히 했구나!"
    여러분이 이렇게 이해하시면 오늘 저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감옥에서 생활하거나 풀려나거나, 병을 가지고 있거나 앓고 있거나, 그것이 상관없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감옥에 있든지, 이 땅에 있든지, 가난하거나 부하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내가 처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살아나시는가!
    오늘 세상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늘 기도로 승부를 걸려고 합니다. 능력으로 승부를 걸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자가 1년 사업해서 2천만 원 벌었더라,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십일조를 바치고 기도했더니 6천만 원 벌었더라. 할렐루야! 라고 간증하면 박수를 칩니다.
    그러면 병에 걸려 죽는 그리스도인들은 뭡니까? 사도 베드로는 감옥에서 죽었어요. 지금 성경이 그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건강하게 하실 수도 있고, 병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주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다시 현존하는 것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환경이 어떻습니까? 가끔 제가 얘기합니다. "전도하십시오."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맨날 구호금 타 먹으면서 전도하니까, 전도가 되겠습니까!"
    이 말은 부자가 되어야 전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자에게 가 볼까요? 전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처했던지 간에, 그 환경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시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교인들이었어요.



    2.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땅을 사는 인생을 철학적인 면에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후자입니다. 당연히 목적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가? 많은 사람들은 존재하기 위해 삽니다. 나의 존재를 위해 삽니다. 단순히 잘 살고, 병에 안 걸리고, 행복하고... 오복을 다 누리는 이 땅의 존재! 그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기도하는가? 내 존재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왜 헌금하는가? 내 축복을 위해서 헌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부름 받은 삶'이라고 얘기합니다. Calling!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살아간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왜 이 땅에 보냈습니까? 이 땅에 더 넓은 아파트를 짓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다른 사람은 70년 사는데, 예수 믿었더니 100년 살게 하기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나, 천국에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남겨놓으신 이유를 이미 공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우리 인생에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는 부름 받은 삶입니다. 하늘나라를 이 땅에 전파하는 대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목적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혔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증인 노릇을 했는가, 아닌가 입니다.

    그 예로 14절 보세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병을 고치니까 증거가 일어났어요. 그래서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아, 그럼 병 고쳤는데 나와야지!"
    그럴까요? 병 고쳤다고 다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쳤는데도, 그것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41절과 42절을 보세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기도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병이 낫고,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을 때 전도가 일어났어요. 사실 이 논리는 이상합니다. '사도들이 손만 대면 병자들이 나았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시기하여 군사를 보내 그들을 잡으려 했어요. 그 군사 중 하나가 베드로를 잡으려고 오른쪽 어깨에 손을 댈세, 그 대인 손이 사정없이 부러지더라.' 이렇게 돼야 스토리가 맞는 것 아닙니까?
    병 고치는 사도들이 다 감옥에 잡혀갔어요. 그들이 병을 고칠 때, 믿는 무리가 주 앞으로 수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능욕을 받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전도가 계속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전도했어요. 능욕을 받을 때에도 그들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우리가 왜 예수 믿는가? 병 고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땅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이 땅에 남겨놓으신 단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증거하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는 나옵니다. 새벽기도도 나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전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평생에 "교회 나오세요." 이 얘기 말고, 한 영혼을 찾아 가서 성경을 펴고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당신의 죄 때문이며, 주님이 당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전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이것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위상을 잃어갑니다.

    무엇이 세상을 바꿉니까? 나와 나의 착한 행실이 바꿉니까? 아닙니다. 복음이 바꿀 수 있는 겁니다. 무엇이 깨어져 가는 가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까? 복음이 합니다. 무엇이 죽어져 가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복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으십니까? 복음이 이 사회를 구원할 줄 믿으십니까? 복음이 깨어져 가는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증인 노릇하시기 바랍니다.
    이 제명 집사님이 지은 「전도행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옥한흠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사랑의 교회 집사입니다. 그가 누구를 전도했는가? 지존파 6명을 전도했습니다. 지존파는 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마들입니다. 처음 전도할 때, 그들은 발악을 하며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나는 예수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특히, 지존파 두목인 김기환은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악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이 사형을 당하며 교수대에 달릴 때에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자기의 죄를 자백했어요. 특히 김기환은 자신이 가진 재산 전부를,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고 하면서 교회에 재산을 헌납했어요. 찬송가를 부르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죽었습니다.
    여러분, 지존파를 전도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전도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복음은 지존파뿐 아니라 고재봉 같은 살인마도 변화시킨 줄 믿습니다.

    무엇이 이 사회를 변화시킵니까? 무엇이 당신의 남편을 변화시키고, 무엇이 당신의 자녀를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복음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증거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의 종교 집단이 되어 버렸어요.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면서까지 우리에게 복음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증거함으로 잃어 버렸던 그리스도인의 위상을 회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29절을 보세요.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순종(휘파코에)' 이란 단어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번밖에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순종이란 단어가 수백 번 쓰여졌지만, 이 단어는 네 번밖에 없어요. 이 순종, 즉 '휘파코에'라는 단어는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왜 오늘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는가? 저는 순종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가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은즉' 무슨 말인가 하면, 순종 없이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 없이 헌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이 한국 교회에 벌어졌어요. 예배시간에는 꽉꽉 모입니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는데, 거짓말하면서 사업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깨끗하게 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가정에 가서 올바른 말을 하라고 하는데... 교회에 와서는 찬양하지만, 집에서는 욕을 쏟아냅니다. 사회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릅니다. 가난한 자들을 탄압합니다. 길거리에 다니면서 싸우기는 1등입니다. 아파트에서 악마라는 사람으로 소문났는데, 교회에 가면 집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상이 다 떨어져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 위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순종만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에 왜 참석하셨습니까? 그냥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일에도 순종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순종은 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외를 그리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함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은 현대판 사울입니다. 사울의 말로(末路)를 아시나요?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버림으로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세상은 저와 여러분을 보고 당신들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하면 그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저도 믿고 싶어요,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뭡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도 나와 별다른 것이 없던데요!"
    그러는 사이에 그리스도인의 위상은 다 땅에 떨어져버렸습니다.

    영안 성도 여러분!
    이 위상을 우리가 회복해야 할 줄 믿습니다. 가정에서 먼저 그리스도인 어머니 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 자녀 여러분! 수많은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에서도 혼자 믿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그 불신자 가정에서 당신의 위상을 회복하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냄으로, 구체적인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므로 직장과 사회에서 잃어버렸던 위상을 회복하십시다. 우리가 이 위상을 회복할 때야말로 이 땅에 복음이 충만할 것이고, 우리의 2세가 사는 이 사회는 지금보다 더 소망 있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관련기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