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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가면
    2002-01-29 13:24:19   read : 1736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5:1 ~ 11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 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지요? 어린 시절 다 소꿉장난을 했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겁니다. 주변의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너는 아빠, 나는 엄마를 정해서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여보, 나 왔어!" 상대방 아이가 잘 모르면 가르쳐 주기까지 합니다. "잘 다녀왔어요!" 하고 인사해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때로 순사놀이도 합니다. 나는 순경, 너는 도둑놈 이렇게 정해서 합니다. 요즘은 이것이 바뀌어서 서로 도둑놈 하려고 한답니다. 경찰이 범인에게 당하는 것이 많다보니 그런 모양입니다.

    소꿉장난 속에서 아이들은 모든 인생을 흉내냅니다. 때로 아빠 엄마가 되고, 때로 선생님, 때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아이들만 소꿉장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도 똑같이 이 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아이들은 놀이로 하는 반면 어른들은 진지하게 합니다. 아이들은 드러내놓고 하는 반면어른들은 은밀하게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속과 다른 모습을 띠고 살아가는지요? 슬픔을 감추기 위해 때로는 웃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재미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처럼 나를 감추고 살아갑니다. 지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내가 다 아는 질문을 날카롭게 포장해서 던집니다. 나의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지적합니다. 나의 선함을 알리기 위해 때로 남을 돕고, 헌금을 합니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많은 일들을 행합니다. 일종의 소꿉장난인 셈입니다.

    성경은 어른들의 이러한 놀이를 한 단어로 표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선(僞善)'입니다. 이 단어의 원 뜻을 찾아보니 재미있는 뜻이었어요. 우리말로 하면 '가면 배우'입니다.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배우입니다. 옛날에는 배우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연극에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때 목소리와 얼굴을 바꾸기 위해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주인과 종의 역할을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역할도 합니다. 이런 가면 배우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Hypocrite!

    때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아픈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실 되게 삶을 살아야 마땅한데, 때로 하나님 앞에서조차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삶이 아닌 연기를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기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가볍게 보아 넘기실까요? 아니면 귀엽다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과연 가면 배우에 대해서, 우리가 늘상 생활에 젖은 이 가면을 쓰고 사는 삶을 과연 어떻게 진단하실까요? 오늘 저는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리의 머리에 대한 진단을 진지하게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때는 바로 부흥의 때였습니다. 부흥의 물결이 온 예루살렘 교회를 뒤덮고 있을 때에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20문도(門徒)가 다락방에서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이 땅에 임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나아가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증거 했더니,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교회가 비좁았습니다. 순식간에 교회는 만 명 이상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 명 이상 되는 성도들이 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자기의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32절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모두가 남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나바였습니다. 이 부흥의 물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동참하기 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 절반은 떼어놓고 나머지 절반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죽음이었어요.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부부가 다 죽었어요. 세 시간 차이로 부부가 강대상, 사도 베드로 앞에서 거꾸러져 죽은 것입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왜 하나님이 그들을 죽여야만 했습니까? 아예 안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절반이나 바친 이들이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설령 이들이 죄를 지었다 해도 부부를 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은 죄가 뭐가 그리 심각하다고 부부를 세시간 차이로, 그것도 교회 앞에서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이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읽기를 원하십니다. 도대체 이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들의 잘못을 이토록 엄하게 다루셨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교회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명심하고 지나가야 이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 본문은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징벌하심은 어떤 면에서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말씀, 메시지를 전달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의 소유를 바쳤습니다. 10분의 1만 바치면 되는데, 절반을 바쳤어요. 많이 바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이들은 저주를 받아 죽어야만 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 본문 가운데서 찾아야만 합니다. 왜?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대할 때 이 사건을 계시적인 차원으로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하나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 안에도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대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자신들로 볼 때는 불행한 일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어떤 교훈을 말씀하시기 위해 그들을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과거와 현재에도 그랬듯이 후세에도 이런 일을 얼마든지 범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바로 이 위험한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교회를 지키시기 위해서 이 사건을 다루신 것입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에는 반드시 교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종합적인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게 이 두 사람의 죄를, 초대교회의 부흥의 물결 한가운데서 두 사람을 죽일 만큼 엄하게 다루신 그 교훈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각한 죄 몇 가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죄는 다름 아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잘못입니다.



    1.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죄

    하나님은 이것을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한날 강대상에서 죽이실 정도로요. 오늘 본문은 이들 부부가 왜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려고 했는지, 구체적인 동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문맥상 그 동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나니아~'이런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불행한 번역입니다. 원문에 보면 'But(그러나)'이라는 단어가 끼어 있어요. '그러나'가 있음으로 해서 이 5장은 4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이 편리하기는 합니다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태초에 기록되었을때, 장과 절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설교를 하려고 보니 너무 찾기가 힘들어 장과 절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잘못 나누어진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 5장도 그렇습니다. 4장과 이어져야 합니다.

    4장에서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팔아 10분의 1 또는 10분의 2를 헌금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 바나바라고 불리는 요셉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지고 몽땅 다 드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루살렘 교회 본 출신이 아닙니다. 저 촌구석인 구브로 출신이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새가족이 와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하나님 앞에 드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러니까 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의 시선이 이 바나바에게 다 모인 겁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 멤버가 아니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주동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 교회의 기둥을 이루는 주동 집사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안수집사쯤 되겠지요. 지도자였습니다. 교인이 만 명이 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면 그 교회에서 유명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가족이 하나 와서는 재산을 다 팔아서 몽땅 바쳤던 겁니다.
    온 교인의 시선이 "와! 저 사람이 누구야? 바나바 아니냐!"하고 몰렸어요. 그러자 이들의 마음 속에 질투가 생겼어요. "그래도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인데!"

    이들이 헌금한 동기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정말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질투와 자기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동기였다고 문맥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헌금한 동기였습니다.

    체면 때문에 한 것입니다. 정말 드리고 싶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때문에, 그래도 내가 저 새가족보다 나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겁니다. 결국 아까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할 수 없이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궁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적게 드리고 극대의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반만 바치기로 한 것이었어요. 말과 행동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교인들은 그들이 재산을 다 드린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반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누구만 알고? 부부만 알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각하게 보신 이들의 죄였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하나님의 눈을 무서워해야 되는데, 이들은 사람의 눈만을 의식했다고 본문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분이 살아 계셔서 나를 보고 계신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 분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 분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명예와 이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체면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믿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당신이 나의 왕입니다"라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는 우리가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는 겁니다.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알고 나를 따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을 쫓는 양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쫓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님을 쫓기보다는 사람들의 인기를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살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를 이 시간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 성경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혀 중요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우리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가볍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님은 문제 삼으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 한국은 체면의 문화입니다. 유교는 체면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체면의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안에도 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정말 주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면 그것을 자부심으로 알고 외로워도 그 길을 걸어가야 되는데, 사람의 눈 때문에 헌금하고 교회 출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요? 우리가 체면의 문화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체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내 영광입니다. 내 프라이드(pride)입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겁니다. 내 체면이 구겨지는 것은 정말 못 견딥니다. 내 자존심이 상하고 명예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뜻하면서 내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 죄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우리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 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이 죄를 근절하시기 위해, 모든 예루살렘 교인들과 오고 있는 세대의 성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 부부를 엄중하게 죽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

    '주의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이 말을 거꾸로 얘기하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의를 행하기가 쉽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눈을 팔고 조금만 잘못하여도 하나님을 보아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 때문에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세 가지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먼저 구제의 예를 드셨어요. 구제할 때 너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어요. 나발불면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얼마를 바쳤다고, 고아원에 얼마를 기부했다고, 수재민을 위해 1억을 냈다고 KBS 방송국에 나발을 불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바친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저 교회는 1억을 바쳤는데, 우리 교회는 2억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동기로 행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구제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또한 금식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금식할 때에 40일 금식을 평생에 몇 번 했느니, 3일 금식을 했느니 하지 말라. 금식할 때에 세수를 하고, 양복을 입고, 화장을 깨끗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화장하라고 하십니다. 말라보이지 않도록 통통한 색깔을 내고, 명랑한 웃음을 띠면서 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유창한 말로 공중기도에 힘쓸 것이 아니라, 혼자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짧게 하고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심각한 마음으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헌금했는가? 반을 헌금했으면 많이 바친 겁니다. 오늘날, 아파트 2억 짜리 팔아서 1억을 바친 겁니다. 이것이 보통 헌신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왜 입니까?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헌금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하나님 앞에 불경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주일날 나오십니까? 제가 체크하니까 나오십니까? 누구 때문에 헌금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십일조 하십니까? 제가 헌금 많이 나오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게 안 하는 줄 아십니까? 저도 할 줄 압니다. 다음 주부터 주보에 십일조와 선교헌금 명단을 내고, 집사님들이 낸 액수를 날마다 봅니다. 제직회에 그 액수를 돌립니다. 그리하면 헌금이 지금보다 두 배는 늘어날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아픔이며,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무리들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신앙생활 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 중심에 제가 서 있습니다. 이 목사가 가장 일선의 죄를 범하기 쉬운 자리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 시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합니까? 누구 때문에 구제사업과 기도, 봉사를 하십니까? 혹시라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우선순위에 있습니까? 내 체면이 있습니까? 대표적이고 계시적인 사건, 오늘 말씀을 당신의 것으로 삼아 이 순위를 뒤바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삽시다!

    그래도 미국은 좀 낫습니다. 체면문화가 아니거든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꾸로 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우리 죄로 인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표로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2. 거짓의 죄

    미국은 제가 가서 살아보니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는 거짓과 위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짓말이 습관이 되어 밥먹듯 합니다. 이것 때문에 미국 가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성추행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은 성추행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위증, 즉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나중에 큰 이슈로 다가왔어요. 결국 거짓말 때문에 탄핵 당할 뻔했어요. 벌써 학자들은 미국이 썩었다고 얘기합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위증한 것을 알고도 탄핵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문화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문화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군사문화의 특징 때문입니다. 군사문화라는 것은 수단과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이겨야 됩니다. 그래서 정치판도 이기면 군자가 되고, 지면 감옥 가는 겁니다. 선거에서 지면 다 감옥 갑니다. 다음에 또 누가 지면 감옥 갈 사람 천지일겁니다. 거짓말을 해도 어쨌든 정권만 잡으면 의인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사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군사문화가 우리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우리 모든 사람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편법을 써서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교회 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얘기로, 성경을 읽기 위해서 양초를 훔치는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말이 됩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말아야지, 어떻게 성경을 읽기 위해서 남의 집 양초를 훔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통용되는 교회가 오늘 한국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거짓을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사탄의 대명사를 하나로 얘기했어요. '그는 거짓의 아비라' 그는 거짓말에 왕자라는 겁니다. 사탄이 누구냐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사탄이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습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그는 거짓말을 통해서 인간을 타락시켰어요. 어떤 거짓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이 말씀을 사탄이 하와에게 가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또한 사탄은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왜 못 먹게 하는 줄 아니? 숨은 동기가 있어.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과 똑같이 될 거야!' 거짓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타락시킨 이 사탄은 지금도 동일한 원리와 방법으로 우리를 멸망시킵니다. 오늘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속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파괴하는 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그것을 성경은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늘상 하는, 미덕으로 하는 문화에서 자라났습니다. 오늘 이렇게 잘못된 우리의 문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가능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어떤 목사님이 하루는 심방을 갔습니다.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밖에서 아이가 뛰어 들어 와서 엄마에게 누가 왔다고 하는 겁니다. 누구냐고 물으니까 거지가 돈을 얻으러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얘, 가서 엄마 없다고 그래!" 아이가 쫓아 나가서 "우리 엄마가요, 엄마 없다고 하래요!" 실화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이 사회를 이대로 두면 다 멸망하고 말 겁니다. 사람이 서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도 없어요. 국민은 정치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상호간에 신뢰하지 못하고, 학생은 선생을 신뢰하지 못하고, 부부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부모가 자녀를 믿지 못하는 이 세대에 결국 멸망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사회를 누가 건지겠습니까? 오늘 우리 영안교회가 해 봅시다. 아멘!

    우리끼리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거짓말을 하지 말자! 이를 여러분 마음속에 심으십시오. 저도 한국 사회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러나 노력해 봅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주시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악입니다. 이들 사건을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어요. 재물의 일부를 감추었어요. 남의 것도 아니고 자기의 것을 감추었는데 죽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오늘 하나님의 지적을 우리 잘 한번 살펴봅시다. 자기의 것을 감춘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는 큰 문제가 걸려 있다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3절과 4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이 말은 거짓말을 말합니다. 또 누구를 속였나요? 성령을 속였어요. 베드로에게 거짓말했는데, 베드로는 그가 성령을 속였다고 얘기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의 이 말씀이 얼마나 합당합니까? "아나니아야, 너의 땅이 너에게 있을 때는 그것이 너의 땅이 아니더냐!" 그리고 "그 땅을 판 돈이 다 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의 물건을 가지고 큰 죄를 지었느냐!" 이는 내 물질을 가지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10분의 1을 바쳤느냐 안 바쳤느냐를 우리는 중요하게 보지만, 하나님은 태도를 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헌금의 액수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헌금을 잘못했을 때,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중요한 죄악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헌금했을 때입니까?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때입니다. 목사님과 집사님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만홀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겁니다.

    십계명 중에 제 3계명을 아십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의 심각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섬기지 않았어요.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는데 급급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긴 겁니다. 오늘 교회에 이러한 죄가 가득 합니다. 사람의 눈은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눈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귀머거리입니다. 오늘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장님입니다.
    저기 계셔서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입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건, 죄를 짓건,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한 신학자는 죽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신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사신 분입니까?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이신가요?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신의 거룩을 얼마나 엄중하게 보여주셨습니까? 웃시야의 사건을 아시지요.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옮깁니다.
    그런데 소가 펄쩍펄쩍 뛰는 겁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시야가 손을 내밀어 그 법궤를 잡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그를 쳐죽이셨어요.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혼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궤가 떨어지려고 해서 웃시야가 도와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시야를 죽였어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에 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문제, 하나님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가 거기에 연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이 법궤는 나를 대표하니 아무나 만질 수 없다. 제사장들만 만질 수 있다." 이 거룩! 제사장들만 만지게 하시고, 성전을 만드시고, 성전 가운데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다. 대제사장들만 1년에 한번 속죄일 날만 들어와야 된다. 대제사장도 자기의 죄를 다 속죄하고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그 대제사장을 죽였어요. 그래서 지성소 안에 대제사장이 들어갈 때, 커다란 끌리는 옷을 입고 끝에다가 방울을 달았어요. 제사장의 발목에 줄을 매달아 놓았어요. 방울소리가 오랫동안 안납니다. "아, 하나님이 제사장을 죽였구나!" 하면서 백성들이 밖에서 줄을 당겨 내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섬기라는 겁니다. 그 분은 너무나도 거룩하신 분이니까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을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께서 한 가지 진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과 염소로 다 나눌 겁니다. 그날 예수님이 양들에게 "양들아, 너희는 복 받을지어다. 너희는 내가 목마를 때에 물을 주었고, 헐벗을 때에 옷을 주었지 않느냐!" "저희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요." "이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염소들을 향해서는 진노하시면서 이들을 밖에 내어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요."
    "너희 형제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형제에게, 자녀와 부모에게 거짓말하고, 이 땅에서 편법을 행하며 남을 속이고 살 때에, 그것은 그 사람만을 속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거짓말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해 거짓말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를 속였지만,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함이 아니요, 하나님께 대하여 거짓말하였도다!" 그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혹시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사람의 칭송을 받으면서 은밀한 죄악을 마음에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교회에 헌신하면서, 속으로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많은 헌금을 하면서, 그러나 얼마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언제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까? 겉으로 착실하면서, 속으로 하나님을 속이며 날마다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아실 테니까요.

    오늘 돌이킵시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 부부의 비극이 부부가 똑같다는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만이라도 나았더라면 그를 말렸을 겁니다. 둘이 똑같았어요.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위선의 탈을 던져버리는 일에 서로를 도웁시다. 내 명예를 버리고,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을 우리는 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감사한 것은, 이후의 내용을 읽어보니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왜 징계를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 안의 죄악을 제거하시기 원하십니까? 우리를 징계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구원케 하심인 줄 믿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큰 부흥을 체험했듯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위선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끊어, 우리 영혼에 구원이 다가오고 나아가 우리 사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위대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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