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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 충만한 삶의 특징
    2002-01-29 13:20:29   read : 170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4:13 ~ 20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보통 3분법,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침례교회에서는 2분법을 많이 주장합니다. 영과 몸입니다. 영과 혼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영혼과 몸으로 구분합니다. 인격이 영혼과 관계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저도 3분법을 믿었는데, 날이 갈수록 2분법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인격! 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중요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 영혼, 즉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심령과학이란 것을 통해 영적인 세계를 알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은 영혼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지 않으며, 영적인 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영혼은 늘 다른 사람의 영과 관계를 가지며 살아간다는 진리입니다. 영혼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반드시 어떤 다른 영과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사도 바울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를 몇 가지 설명해 주십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언제 죽었는가? 이는 영적으로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영적인 상태를 세 가지로 말씀해 줍니다. 그 중에 영과 관계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느 영혼이나 관계없이 그 영혼은 이 세상의 불순종하는 영을 따랐다고 합니다. 구원받기 전의 모든 영혼들, 그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에 상관없이, 얼마나 완벽한 지식을 가졌느냐에 상관없이, 그 영혼은 사탄에게 종노릇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현재시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번 받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아 나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영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영과 관계를 갖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영이 바로 악한 영입니다. 이 세상의 불순종의 영이요, 사탄의 영입니다. 술취함과 방탕과 음행과 호색과 시기와 불법 등의 모든 죄가 나혼자 스스로 짓는 것 같지만, 실은 속이는 영의 유혹과 꾀임에 따라 내가 범죄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내 영이 혼자 범죄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으면, 다른 영과 관계를 가진 그 착해 보이고 천사 같은 영이 나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은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늘 다른 영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확인해 보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영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심각한 질문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고 성령과 관계 맺고 있다고 단언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하고, 현재시제로 계속해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를받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성령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영은 어떤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때, 몇 가지 특징들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이 특징들을 살펴보게 되면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의 악한 영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자동적으로 자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첫 번째 특징은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이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겁니다.



    1.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이 있다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붙들림 받은 사람들에게 한가지 특징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아시지요? 느부갓네살왕이 그들에게 큰 신상인 우상을 세워놓고 절하라고 합니다. 모든 백성이 다 절을 하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협박을 합니다. 풀무불을 일곱 배나 뜨겁게 하고, 지금이라도 절하지 않으면, 저 불에 던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얘기합니다. "왕이여, 만일 왕이 그리하시면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시겠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결코 절하지 않겠나이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을 풀무불에 집어 던졌습니다.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네 사람이 거기에 동행하며, 그 불 가운데서 눈썹 하나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협을 받고서도 전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했습니다. 순교 역사를 보면 열두 사도와 초대 교인들은 하나같이 순교했습니다. 목베어 죽고, 불에 타 죽었지만, 그 중의 누구 하나도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두려워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침례교회 순교자 가운데 김영관 목사님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지금 중국 연변에 살고 있는 그 분의 며느리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7년 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70세에 가까운 그 분의 며느리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갓 시집 온 새댁이었을 때 일입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0세였어요. 공산당이 시아버지에게 예수를 부인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거절합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당에서 그를 두들겨 팹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 능력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공산당들이 분에 못 이겨 대나무 칼로 그의 피부, 껍질을 벗겨 죽였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죽어갔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담대하게 했을까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한 다음 히브리 기자는 이런 결론을 맺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마지막에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성령과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담대함이 그 속에 있다고 본문은 가르쳐 주십니다.

    13절을 보세요.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기탄없이' 헬라어로 '파레시안'입니다. 이 단어가 29절에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담대히(파레시안)!'

    이 사도들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습니까? 세상 어떤 것에도 추호의 두려움이 없는 태도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디서부터 이런 담대함을 얻었을까요? 흔히 '담대함'에 대해 오해를 하나, 용기와 담대함은 다음의 몇 가지로부터 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1) 무지에서 오는 담대함

    우리나라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잡아먹을 때쯤 된 개는 호랑이를 보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하룻강아지, 즉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강아지는 호랑이를 봐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에게 달려듭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모르니까! 그러나 이 사도들의 담대함은 이런 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2) 천성적인 담대함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간이 크다고 합니다. 간과 담력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의사 선생님들 말을 빌리면, 쓸개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깜짝 놀랄 때, 쓸개에서 분비물이 나오는데, 간이 큰 사람은 분비물이 많이 나와서 두려움을 덜 탄다고 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과연 간이 컸을까요? 아닙니다.

    3) 훈련으로 말미암은 담대함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서 담력 코스를 밟았는데, 밤에 한사람씩 산을 지나가게 합니다. 조교들이 기가 막히게 변장을 합니다. 무덤 옆에 관을 놓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게 구멍을 뚫어 놓습니다. 그 구멍을 지날 때 조교가 또 다른 구멍에 숨어 있다가 "이히히~" 하면서 다리를 팍 잡는 겁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실신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코스를 몇 번 거치고 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지금 이런 담력을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도들의 담력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거기에 대해 본문은 몇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 올바른 지식을 가질 때 담대하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베드로가 글을 몰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대필이긴 하지만, 베드로 전·후서를 쓴 것으로 봐서 그는 글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베드로를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자기들과 같이 구약과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아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잘 얘기하는가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이들의 담대함은 올바른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지식에서부터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 담대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우주를 알고, 나를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경을 통해 이 세상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의 담대함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담대함이 올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 안에 담대함이 찾아올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두려움입니다. 질병과 사고에 대한 두려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혹시 내 사업이 부도나지 않을까, 아름다운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이 행복이 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먹이지 않겠느냐?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너희도 입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이 지식을 가질 때에 쓸데없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줄 믿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늘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음은 마지막이며, 절망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빨리 죽기를 원한다!" 왜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몸은 장막입니다. 장차 영원할 집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은 영원한 장막으로 가는 이사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빨리 이 땅을 떠나 죽기를 원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리를 알 때, 쓸데없는 이 세상의 두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동행할 때 담대하다

    이런 담대함은 또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가? 13절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예수님과 동행할 때 담대함이 찾아온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십자가를 몸에 품고 다니거나 목걸이를 걸고 다녀요. 여기서 말하는 동행은 그런 육체적인 동행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3년간 예수님과 동행했어요. 같이 먹고 잤어요. 그런데 그는 두려워서 범죄하고 말았어요. 로마 군인이 칼을 들이대고 "너 예수 알지?" 하고 물은 것도 아니고, 계집종이 와서 "너 예수와 함께 있었지?" 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어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요.

    그런데 그가 여기서는 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한 줄 믿습니다. 정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게 될 때, 일어날 때나 잠들기 전 항상 예수님과 대화하며 동행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걱정, 근심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동행을 체험하며 살아가십니까?



    셋째, 믿음의 체험이 있을 때 담대하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믿음의 체험!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간증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관념적인 믿음입니다. 체험적인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담대하지 못하고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겁니다. 왜? 남의 얘기는 많이 들었고, 성경 얘기도 많이 압니다. 그러나 나의 체험이 없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닐 때, 눈먼 소경이 눈뜨는 것을 보았어요.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보았어요. 그런데 그는 그저 관념적으로 믿었을 뿐입니다. 막상 그 앞에 시험이 닥쳐오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가 담대해질 수 있었어요. 왜요?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얘기가 아니었거든요. 바로 내 얘기였어요.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더니, 그가 일어났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이런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체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남의 다리를 긁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얘기 들으면서 좋아합니다. 성경 읽으면서 그저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의 신앙생활 속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본 적이 있습니까? 문자적인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삶에 기적은 가까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내 남편이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가 돌아옵니다. 도저히 끊을 수 없던 나쁜 습관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할 때,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저는 10년 간 미국에서 유학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지금도 제 친구들은 저의 아버님이 한국에서 굉장한 갑부인줄 압니다. 갑부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갑부라고 했어요. 이는 제 마음속의 하나님 아버지를 두고 한 말입니다. 저는 일원 한 푼 도움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얼마나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당장 생활비가 떨어졌을 때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오고, 거기에 수표가 들어있고, 학교의 메일 박스를 열어 보면 100불이 들어있고, 누가 보냈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꼭 그 때에 맞춰서... 제가 돈 몇 만 불, 장학금, 이런 것이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저는 놀라운 것을 얻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구나!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그 이후, 돈 때문에 걱정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마쳤으나 한국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직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오면 직장이 없어요. 직장이 안되면 굶어야할 판입니다. 저도 똑같은 입장이었어요. 들어올 비용이 하나도 없었어요. 비자카드를 끊어서 이사 비용을 다 지불하고, 몇 천불 빚을 지고, 이곳에 돌아왔습니다. 직장이 없었어요. 빚내서 전세를 얻고 살았어요. 전세금까지 빚이 1억 가까이 되었어요. 장모님은 걱정이 되어 사색이 되었지만, 저는 걱정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공부시키셨기에, 하나님이 직장을 주실 줄 믿었어요. 4개월을 동백회(동네 백수들의 모임)회원으로 보낸 다음, 생각지도 않은 부산 영안교회로 하나님이 저를 인도해 주셨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몇 가지 부탁하셨어요. 보따리를 싸고 목회를 해라.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목회를 해라. 저는 지금도 그런 마음입니다. 어느 섬인들 못 들어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저는 믿음의 체험이 있거든요. 하나님이 역사하신 기적을 맛보았거든요.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왜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실패해야 합니까? 병이 찾아오면 낙담하고, 사업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불평하고, 서로 원망하며,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며 마쳐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 있지만, 그러한 삶은 악한 영이 여러분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담대함은 올바른 지식을 가질 때, 예수님과 동행할 때, 믿음의 체험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담대함이 여러분 가정을 뒤덮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홍수같이 몰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배태익씨! 1년 반 전에 수술을 했어요. 암이 다 퍼져서 살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살아 있어요. 우리가 새벽 기도할 때 또 수술 받았어요.
    암이 더 퍼졌어요. 제가 심방 갔더니 "목사님, 한 달만 더 살면 소원이 없겠어요. 제가 이제 예수님 알았는데, 한 달간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죽고 싶어요. 한 달만 살게 해 주세요!" 우리가 연합해서 기도했습니다. 지금 4개월이 지났어요. 암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믿지 않는 그의 가족을 구원하고 나서, 그 후에 배 선생님을 데려가실 줄 믿습니다.

    믿음이란 뭡니까? 크리스찬이 누구입니까? 내 상식으로 사는 겁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체험하는 겁니다. 내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이 능력을 다 잃어 버리고 이렇게 무능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우리 모두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회복시키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부흥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부산을 구원하는 도구로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2.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18절과 19절입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신앙이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왜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 앞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겁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갑니다.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어요. 선원들이 묻습니다. "너 때문에 풍랑이 온 것 같은데, 당신 도대체 누구요?"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천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요나는 육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다로 도망갔어요. 배를 탄 후 "후유~ 됐다!" 하면서, 풍랑 속에서도 잠을 잤어요. 바다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안 미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천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는 압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다 인정하면서, 실상 우리는 늘 그 분을 소경의 하나님으로 압니다. 내가 은밀하게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사십니까? 왜 타협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타협합니다.

    야곱과 리브가가 그러했습니다. 평생을 기다렸어요. 임신했을 때, 이미 리브가는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야곱에게 알려줍니다. 그것 때문에 야곱을 사랑했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아들!' 그러면서 평생을 기다렸는데, 어느날 남편 이삭이 에서를 축복해 주겠다고 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왜 거짓말했습니까? 환경을 본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 앞에서 살았으나, 그순간 환경을 본 것입니다. 너무 다급해졌어요. 지금 거짓말을 안 하면 이삭이 에서를 축복할 것입니다. 끝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야곱이 거짓말해서 축복 받았을까요? 야곱이 거짓말을 안 했다면, 어떤 결과가 왔을까요? 그래도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셨을 줄 믿습니다.

    에서를 축복하려고 할 때 "야곱아, 어디다 손을 올리느냐!" 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셨을까요? 환경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거짓말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했어요. 내 지식과 상식으로 판단했어요. 그래서 거짓말했고, 거짓말 한 결과는 어떻습니까? 리브가와 야곱은 그렇게 사랑하는 모자간이었는데, 거짓말 때문에 평생 만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거짓말했던 야곱은 염소 털로 아버지 이삭을 속였는데, 자기의 아들들이 염소의 피를 가지고 자기를 속였어요. 요셉이 죽었다고 보고했어요. 수십 년을 고통 가운데 보냈어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구 앞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을 의식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혹시 돈 앞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까? 돈이 바로미터입니다. 돈 앞에서는 신앙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얼굴이 환해져서 물어보면 돈이 잘 벌리는 겁니다.
    죽상을 하고 있으면 사업이 안 되는 겁니다. 돈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옳은 줄 믿습니다. 이왕에 눈치를 보려면 하나님의 눈치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목회 하면서 이것이 관건입니다. 저도 사람이 즐거운 설교를 하고 싶어요. 제가 능력이 없는 줄 아십니까? 자료가 없는 줄 아십니까? 설교 준비 할 때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면 좀더 부흥될 것 같고, 좀더 유익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목회하고 싶습니다. 우리 영안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인들이 모인 단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늘 하나님 앞에 살아가십시오.



    3.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산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0절)

    이 세상에 두 가지 삶이 있어요. 하나는 쫓기면서 사는 삶, 다른 하나는 부름 받아 사는 삶입니다.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늘 쫓겨요. 일, 돈, 환경, 시간에 쫓깁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늘 바쁩니다. 늘 만족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내가 환경을 지배하기보다 환경이 나를 다스립니다. 돈과 시간이 나를 다스리고 늘 쫓깁니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아가다가 쫓겨서 죽습니다.
    부름 받아 사는 삶을 볼까요? 능동적인 삶입니다. 목표가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하셨을 때에 내게 주신 소명이 있다는 겁니다.

    D.L 무디는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구둣방을 하며 남의 구두를 꿰매면서도 자기 안에 주신 하나님의 소명을 한번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주여! 내가 사는 것이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마지막 떠나시면서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무디는 이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는 구두를 꿰매면서도 그 사명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무디의 설교 원고를 보면 읽지를 못해요. 철자법이 다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미국을 변화시키는 부흥사가 되었어요. 너무나 못 배워서 목사 안수도 못 받은 그였지만, 부흥사가 되어 미국을 변화시켰어요. 이것이 바로 부름 받은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당신이 지금 성령과 교제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보세요. 나는 부름 받은 삶을 사는가, 아니면 쫓기는 삶을 사는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를 이루기 위해 힘쓰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을 유유하게 살아갑니다. 그는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분별합니다. 먼저 해야 될 일과 나중에 해야 될 일을 분별하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지표가 되어, 우리 모두 세상을 이기며,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며, 부름 받은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영안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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