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과 감사 2002-01-29 13:19:30 read : 163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20 : 1~16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예수님은 가르침의 천재이십니다. 그는 언제나 가르치실 때마다 진리를 생활 속에서 찾아 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업과 시장 얘기를 하십니다. 오늘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니 고용주와 고용인, 봉급, 더 나아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갈등, 요즘 연일 신문에 보도되는 노사 갈등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 속에 있는 이야기라는 마음으로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척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로마의 압제 속에서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는 바닥을 치닫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로마 제국에 수많은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 세금은 수입에 따라 내는 세금이 아니라 일정하게 정해진 세금이었어요. 그 해에 농사가 되지 않으면 땅을 팔아서라도 그 세금만큼은 채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토지를 잃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어요. 그 결과 당시의 팔레스타인 시장에는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열렸습니다.
오늘날은 아침 9시에 일하고 저녁 5시나 6시에 퇴근하지만, 그 당시는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것이 노동의 기준이었어요. 해뜰 무렵인 새벽 6시부터 해질 무렵인 저녁 6시까지 일하는 것이 통상 예였어요. 농사지을 땅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날품팔이 노동을 팔아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족을 위해 오늘 하루 내가 노동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노동하지 않고 품을 팔지 않으면, 자녀들과 가족들이 굶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시장에 나가 누가 나를 데려가기 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나와 자기를 데려가기 바라며 웅성거리고 있는 겁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한 인력시장에 한 주인이 왔습니다. 그는 큰 농장의 주인이었어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많은 기대를 하겠지요. "아, 오늘은 한두 명이 아니고 몇 명을 뽑아 가겠구나!" 하고요. "주인님, 제가 포도농사에는 아주 경험이 많습니다. 제가 작년에도 사장님 댁에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써주세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필요한 사람만큼만 데리고 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주인을 기다려야 하겠지요. 아침 9시가 되었고 이미 해가 많이 떴어요.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조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주인이 나오더니, 또 거기 있는 사람 몇 명을 데려가는 겁니다.
이제 나머지 사람들은 마음에 낙심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희망이 있어요. 그것은 12시에 일해도 품삯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나절이라도 일해서 품삯을 받아야 가족들이 연명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데 똑같은 주인이 나와서 12시에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지쳐 있습니다. 그때, 통상적인 예를 깨고 3시에 주인이 나와서 또 사람들을 데리고 갑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마감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5시에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시켰습니다.
드디어 6시, 업무시간이 다 끝났어요. 이제 봉급 받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봉급을 거꾸로, 늦게 온 사람부터 주는 겁니다. 5시에 온 사람부터 봉급을 주는데, 웬일입니까? 그 사람은 이해하기를, 오늘 밤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6시에 끝나는 것을 보니 12분의 1 데나리온,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했는데, 봉급을 받아보니 한 데나리온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노동자의 임금이 하루 한 데나리온이었어요. 하루치의 품삯이 다 들어있는 겁니다. 너무나 놀랐어요. 갑자기 이 농장에는 기쁨과 설렘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설렘과 기대감이었을까요? 새벽 6시부터 일한 사람들은 흥분이 되었어요.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약삭빠른 사람은 이미 자기의 봉급을 다 계산했을 겁니다. "야! 오늘은 횡재했구나!"
저 사람은 한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나는 아마도 12 데나리온, 혹은 휴식시간을 다 빼면 적어도 10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설렘이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봉급 봉투를 받아들고 나서 그 설렘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 아침 6시에 일한 사람이 봉급 봉투를 뜯어보니 그 속에는 한 데나리온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자 이 농장에는 기쁨과 설렘이 다 사라지고 노사쟁의가 일어납니다. 급기야 노동조합이 생기고 데모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플랜카드에는 아마 이렇게 적혀 있었을 겁니다. "물러가라! 포 사장!" (포 사장은 포도원 주인을 지칭합니다) "노동자의 품삯을 떼어먹은 포 사장을 구속하라!" 노동조합장이 나오더니 연설문을 낭독합니다. "포 사장은 국가노동법과 시장원리를 위배하므로 우리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우롱하였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농장과 회사를 위해 사력을 다해 일해 왔건만, 그는 우리들의 이 수고를 돌아보지 않고, 갓 들어온 신입사원과 우리들의 봉급을 동일하게 지불함으로 우리 노동자들을 기만하였다. 물러가라! 포 사장!" 이는 성경에 없는 것 같지만 제가 현대어로 번역한 겁니다.
11절을 보세요. 이 말씀이 나옵니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아주 강한 헬라어의 '원망'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최고 강한 원망의 뜻입니다.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기쁨과 설렘이 원망과 분노로 바뀌었어요. 그들의 데모에 대한 주인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인은 두 가지를 대답합니다. 하나는, "나는 너희에게 정당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아침 6시에 데리고 올 때 계약서를 썼지 않았느냐?" 그 계약서에 한 데나리온씩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당시 보통 이런 계약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노동자의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준다는 것은 너와 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도 주인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들을 불러올 때에 한 데나리온씩 줄 것을 약속했어요. 그래서 그는 얘기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정당하다. 너희는 하루 일했고 하루 품삯을 받았을 뿐이다" 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이, 비록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내가 은혜로 호의를 베풀어서 5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뿐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반문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행한 것을 너희가 악하다고 보느냐? 그것이 가능하고 옳은 일이냐?" 이것이 비유의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많은 학자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이 본문을 잘못 해석하십니다. 어떤 학자는 평생 성경을 연구했지만 잘못 결론을 맺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저 온 사람은 유대인이고, 나중 온 사람은 이방인이다." 그래서 천국,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의문을 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한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천국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이 비유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는 주장합니다. 1절에서 '천국은 마치∼' 라고 하면서 천국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 부자, 가난한 자, 양반과 상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등함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옳은 얘기지만 이 비유의 뜻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어떤 뜻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16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을 주시기 직전인 19장 마지막 절을 보아야 합니다. 19장 30절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비유의 앞과 뒤에 똑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오늘날 교회 안에 똑같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교회생활, 신앙생활 하는 사람 가운데 먼저 된 자가 있고, 나중 된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신기한 것은 처음에 먼저 되었던 자가 후에 나중 되는 경우도 있고, 나중 되었던 자가 시간이 지난 다음 먼저 되는 자가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교회 안에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구별되는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살면 먼저 된 자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면, 신앙 연수는 오래되었으나 나중 된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불평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이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불평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면서, 왜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가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날카롭게 지적해 주십니다.
1. 물질적 보상의식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왜 감사하지 못했을까요? 먼저 들어왔는데 왜 나중 된 자가 되어 버렸을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들이 물질적 보상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배경은 19장에 나타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께 부자 청년이 찾아와 얘기합니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계명을 지키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또 할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가 부자임을 아시고 말씀합니다. "너에게 딱 한 가지가 부족하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라고 했어요. 그 부자 청년은 돈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튀어나옵니다.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 말은, 저 부자는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나는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베드로가 버릴 것이 있어야 버리고 좇아오지요? 그런데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니 우리에게는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마 19:27) 라고 질문합니다. 이 베드로의 질문 앞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훈하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오늘 교회 안에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훈계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좇는가? 왜 신앙생활 하는가?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상급은 바라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이 땅에 약속이 있지만 반드시 천국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므로 덤으로 주는 약속을 받는 것과 물질적인 보상을 동기로 삼아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도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한 대가로, 헌금한 대가로, 십일조를 드린 대가로, 주님께 충성한 대가로 이 땅의 물질을 보상받으려고 하면 감사보다는 원망에 사로잡혀 남은 생을 망치기 쉽다고 예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나중 된 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도 중요하고, 얼마나 많이 바쳤는가도 중요하고, 얼마나 헌신했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열심히 헌신봉사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사탄이 나아와 하나님께 대적을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칭찬합니다. "너, 욥을 봐라. 참 신앙인이 아니냐.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 사탄이 이 얘기를 듣고 시큰둥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그게 뭐 대수입니까? 아닌 말로 욥은 재산 많지요, 자녀 잘 되지요, 건강하죠, 예쁜 마누라가 날마다 시중들어 주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어찌 안 섬기겠습니까? 나라도 섬기겠네요! 그게 뭐가 대단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권을 줍니다. "그래, 욥의 목숨만 건드리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아라!" 사탄이 욥을 시험합니다. 먼저, 재산을 다 날립니다. 그 다음, 자녀들이 다 죽습니다. 자녀들이 버스 대절해서 단풍놀이 갔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 죽습니다. 광풍이 불어오더니 증권 투자했던 300억이 날아가고, 부동산에 투자했던 200억이 날아가고, IMF가 와서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어요. 건강했던 몸도 병들었어요.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한다고 했던 부인이 병들고 돈 없으니까 저주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로 생각해 보세요. 놀라운 것은, 욥은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욥은 얘기합니다. "내가 적신으로 나와서 적신으로 돌아간즉(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즉)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 내가 어찌 하나님을 원망하랴! 오직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거야!" 친구들이 그토록 그를 야유하고 조롱해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거부합니다. 여러분, 이 사탄의 호소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 사탄의 말을 듣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당신은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왜 봉사합니까? 왜 헌금합니까? 왜 성가대하고 교사합니까?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건강과 자녀를 지켜주시고 장수하게 하시는 것이 신앙의 동기라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 물질적인 보상, 이 땅의 보상을 바라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환경이 좋을 때는 감사하지만, 조금만 어려우면 여기 있는 사람들 같이 이를 갈며 언젠가 주인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게 된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물질적인 보상의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주님이 너무나 귀해서 신앙생활, 헌신, 봉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 외의 동기는 다 없애기 바랍니다.
2. 공로의식
왜 원망하고 불평했을까요? 이유는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수고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10시간이나 더 넘게 일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이러한 공로의식 때문에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알아서 모셔야지, 내가 이만큼이나 했는데 왜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목회자들의 불만 1호는 내가 그렇게 수고하고 사역했는데, 왜 교인들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가 입니다. 반대로 교인들의 불만 1호는 내가 이렇게 이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우리 목사님이 나를 알아모시지 않는가입니다. 목사도 불평이 있고, 교인도 불평이 있습니다.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 누구 덕인데!'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힘을 안 썼다면 이 교회가 이렇게 될 수 있었나! 어림도 없지! 이 교회 지을 때 내가 힘 좀 썼잖아!' '내가 여전도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이렇게 되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은혜로 봉사합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교회에 들어와 천국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공로 의식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 본문의 사람들처럼 원망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이것이 옳습니까?
그 날의 아침을 생각해 보세요. 추위에 떨고 있었던 그때! 오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없을까 하면서 노심초사하던 그때! 오늘 하루 벌지 않으면 가족과 내가 굶어죽을 그 때에, 주인이 찾아와 나를 불러주던 그때! 내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행위를 깨끗하게 해도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죄의 종이 되어 이곳저곳 추위에 떨고 있던 그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나같이 더러운 자를 불러주셨던 그날 아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래된 위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구원받은 감격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 앞에 부름 받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름 받았는데, 그 모든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구원받아 포도원과 천국에 들어와서 내가 행한 작은 봉사만 기억에 남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을 향해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새벽 6시에 와서 주인을 위해 종일 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왜 내가 병들고 이렇게 밖에 못살아야 합니까?" 원망의 마음이 그들 속에 있는 겁니다. 이것이 목사와 안수집사, 집사의 위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일찍 들어온 자의 실수였습니다.
그렇다면 늦게 들어온 자들의 마음을 한번 볼까요? 3시가 되었어요. 이제 다 포기했어요. 그날 5시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다린 것으로 봐서 아마도 절대적으로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하러 나올 때 자녀가 이런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내일까지 등록금 내야 돼!" 그 아이의 눈빛을 보고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새벽 6시에 나왔으나 뽑히지 못했어요. 9시에도 지나갑니다. 반나절 품삯이라도 기대했지만 12시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요. 마지막까지 기다려 봅니다. 오후 3시, 절망의 순간이 찾아왔어요. 주인이 나타났으나 그냥 지나갔어요. 이제는 일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5시에 부름을 받았어요. 거기다가 1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다 받았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주인을 사랑하며,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충성했겠습니까?
왜 남아 있었을까요? 돈을 들고 가지 않으면 굶어야 할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차마 일을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가족에게 일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마 6시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을 겁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5시에 오더니 자기를 향해 오라는 겁니다. "아, 오늘은 밤일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1시간 동안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밤일을 할 줄 알았는데 "땡땡!" 하고 종을 치는 겁니다. "1시간 밖에 일을 안 했으니 돈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봉급 봉투에 하루 품삯이 들어있는 겁니다.
늦게 들어온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니까? 이 사람들은 봉급을 받아들고 어떻게 했을까요? 6시에 가라고 한다고 갔을까요? 아닙니다. "주인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 집 청소라도, 아니면 화장실 청소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남자지만 빨래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도와드릴까요?" 이것이 늦게 들어온 자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맺으신 겁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저는 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합니다. 지난 여름 서용산 선교사님이 사역하는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즈스탄을 갔어요. 아침 일찍 선교사님과 차를 타고 가는데 길옆에 남자들이 모여 있었어요. 차가 가까워지니까 막 달려오더라고요. 물건 파는 사람인가 했더니 아니었어요. 바로 인력시장이었어요. 그 나라에서는 하루종일 일하면 2달러를 받아요. 2500원입니다. 이것도 잘 받는 거랍니다. 그 돈을 벌기 위해 건장한 남자들이 떼로 몰려 있는 겁니다. 오전 11시쯤 그 길로돌아오는데, 절반도 못 팔려 가고 축 쳐져서 나머지 사람들이 나무그늘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들은 아마도 굶어야 될거라고 선교사님이 말해 주었어요. 그 심정을 생각해 보셨나요?
어떤 자가 먼저 된 자입니까? 감사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아,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설교를 지금 저에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식년 나갔습니다. 지난 6년간 영안교회에서 목회 하는 동안 제가 참 유명한 사람이 되었더군요. 인터넷 방송으로 세계에 제가 나갔어요. 인터넷 방송에서 저의 설교를 가장 많이 클릭 한다고 하더군요.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박정근 목사님 아닙니까?" "어떻게 아십니까?" "인터넷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 내가 안식년 받을 만 하지~ 영안교회 300명 될 때 와 가지고 내가 900명 만들었잖아~" 어느 날 아침,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비수같이 제 마음을 쳤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라도 시키면 감사하게 해야 할 나인데... 어느덧 공로의식이 내 마음을 꽉 잡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안식년 동안 이 심령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 뿐입니까? 오늘 교회 안에 공로의식에 사로잡힌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에 일찍 20년, 50년 전에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나요? 헌금과 일을 하셨나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뭔가 드린 봉사는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셔서 주를 위해 봉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의 특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얘기합니다. "내가 모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른 것 다 접어두고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부모와 아내, 자녀와 사람들을 향해 불평의 마음이 있습니까?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목회자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되어 가냐고, 공로를 잊어버리는 교회가 아니냐고, 혹시 불평하여 먼저 하나님께 부름 받았지만 나중 된 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나중 된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먼저 된 자가 되셔야 합니다. 먼저 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겁니다. 아침의 공기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헌금을 드리는 것도... 모든 것을 감사하며 사는 자! 이것이 늦게 들어온 자의 심정이요, 천국에서는 이런 자가 먼저 된 자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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