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마연구/'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지는 않아' 2002-02-18 00:29:39 read : 1647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데마는 세상으로 갔다. 교회는 어디로 가는가?
◀ 그리스 북부 델마이코스만에 면하여 있는 옛 마게도니아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되돌아 간 곳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
데마, 그의 이름은 ‘다스리는 자’란 뜻이다. 데마가 어디 출신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바울을 알게 되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나의 동역자’라고 소개하고 있고(몬 24), 골로새서에서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골 4:14)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데마는 바울의 사랑을 받는 동역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할 때는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이다. 바울이 로마에 투옥될 때 데마도 거기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데마는 바울의 사랑을 받으며 동역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마음 깊은 곳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스도와 이 세상, 둘 사이에서 자유하지 못한 삶, 이것이 데마의 삶이었음을 느껴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이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게 했다.
로마가 아니라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은 복음을 완전히 떠날 수도 없었음을 암시한다. 만약 복음을 떠나 세상을 사랑했다면 그는 로마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데마는 로마에 남을 수는 없었다. 로마는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마는 복음을 버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세상을 놓을 수도 없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데마는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복음을 위하여 헌신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완전히 놓을 수 없는 두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갈등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간 이후에 그의 삶에서는 복음의 사역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데마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 복음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성경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게 될 것인데(딤후 3:1~7) 그 때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쾌락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데마, 다스리는 자, 그는 교회의 모습처럼 보인다. 교회,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의 몸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하기에 주춤거려진다. 교회를 힐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 스스로 묻고 싶다. 아니 나 스스로 묻고 있다.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에 주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가 ‘쾌락과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완전히 로마로 갈 수도 없고 바울에게 남아 있을 수도 없었던 데마처럼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교회는 돈으로부터 자유한가? 교회는 돈을 필요로 하지만 돈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지 않은가? 교회는 진정으로 돈으로부터 자유한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걸리는 것이 돈 아닌가? 돈이 교회의 주인처럼 보인다. 마치 돈이 이렇게 조롱하는 듯하다. “교회야, 내가 없는데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넌 내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승동
성경교사로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데 은사를 가진 서승동 목사는 현재 인천 계양에 있는 섬김의교회를 담임목사로 섬기며 이 땅에 주님의 나라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소망을 품고 진력해오고 있습니다. 첫 영적 열매이며 동역자인 아내와 은평, 은광 두 아들을 두고 있고 얼마전 <묵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신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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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물질 관( I )
마6:19-21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된 신앙을 갖는 데 방해되는 요소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물질의 문제요, 둘째로 염려의 문제요, 셋째로 남을 비판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이 세 가지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자유롭고 겸손한 신앙 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물질 관에 대하여 다음주일까지 두 번에 걸쳐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물질로 인해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 관이 바르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막대한 손해를 가져옵니다 . 신앙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물질주의적인 이기심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물질의 유혹 때문에, 물질에 눈이 어두워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물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보고 그만 물질 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삼촌인 아브라함을 제치고 자기가 그 성을 차지했습니다, 결국 그 성은 유황불의 심판을 받았고 그는 소알 성으로 겨우 피했으나 두 딸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여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 야곱의 형님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눈이 어두워서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았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으나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히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게하시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스승 엘리사를 속이고 나아만 장군으로부터 선물을 가로채다가 문둥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왕하25:27)
아간은 여리고 전투에서 전리품 중 얼마를 감추어 둔 죄로 아골 골짜기에서 그의 가족과 친족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발락 왕에게 물질로 매수되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다가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벧후2:15,유1:11)
신약에서 가룟유다는 은30에 눈이 멀어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그 은30을 쓰지 못하고 성소에 던져놓고 목매어 자살하여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습니다 (행1:18)
초대교회 아니니아 와 삽비라 부부는 밭을 팔아 얼마를 감추고 성령과 사도들을 속이다가 둘 다 죽임을 당했지 않습니까? (행5:)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다 예로 들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 기업가, 공무원, 교수, 종교인, 등등 물질 욕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은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경고했습니다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은 언제나 물질숭배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참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 대신에 세상에서 능력 있는 그 무엇을 그 자리에 채우려고 합니다
딤후4:10 “데마 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기독교 공동체 속에 있었던 데마 는 바울을 따라다니며 전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물질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이 같은 물질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것에 눈을 멀게 하고 신앙에서 떠나도록 자극을 합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에서 떠나 살아가지 않습니까?
2,돈은 부끄러움이 없이 벌어야 하고 떳떳하게 써야합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돈을 죄악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돈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돈을 지배하고 다스려야지 돈이 인간을 지배하면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몇 푼의 돈 때문에 인격과 양심과 체면과 신앙을 팔아먹습니다
이 말씀은 돈을 갖지 말라거나 갖는 것이 죄라거나, 또는 돈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돈이 땅을 위한 것이냐 하늘을 위한 것이냐 하는 물질 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덕은 아닙니다. 가난하게 살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성주교회 성도들은 다들 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멋있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돈은 부끄러움이 없이 벌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벌어야 합니다, 지난번 서울 만민교회 이재록목사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하다가 많은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목사가 왜 도박을 했느냐? 는 질문에 교회재정이 어려워 돈을 좀 따서 보태려고 그랬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은 엄청나게 잘못된 말입니다, 이상하게 그런데도 그 교회 광신도들은 자기교회 목사를 향해 지지하는 박수를 치고 야단이었습니다 눈에 뭔가 씌워진 것이 아닙니까?
출20:8-11 십계명중 네 번째 계명을 보십시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제7일은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살후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
그리고 잠16:8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하는 것 보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는 것이 낫다” 고 했습니다, 성경대로 엿새 동안 우리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대략 만 가지이 상의 직업이 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 무슨 일이든지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먼저 일하지 않고 벌겠다는 망상을 버려야합니다, 그 생각을 버리지 않기에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주거나, 불의를 행하고 범법하며, 도적질이나 소매치기, 강도행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사기를 칠 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달라 장사와 같은 고리대금업이나 , 주식과 증권에 투자하고 부동산에 투자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잠깐 사는 세상에서 밤낮 주식시세와 증권시세를 쳐다보고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살렵니까? 편안하게 사십시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넣어놓고 이자를 받는 일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일입니다 , 눅19:23보면 므나 비유 중에 각각 한 므나를 열 므나 씩 혹은 다섯므나 씩 남겼으나 한사람은 한 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말하기를 이 사람아 차라리 은행에다 맡겨두었으면 변리라도 받지 않겠느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은행 이자를 인정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돈은 떳떳하게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19:16-22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느 계명이 오니이까? [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으나 재물을 자기를 위하여 땅에 쌓아 두고 가치 있는데 쓰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그는 예수를 떠나고 맙니다.
그 청년에게는 재물이 많은 것이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걸림돌이 되는 우상이 무엇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신앙에 큰 장애물이 되어서 우리가 헌신과 결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눅19장에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키도 작고 외모가 별로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로마정권 아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금 징수 원이었습니다, 아니면 여리고 성의 세무서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돈을 많이 가져야만 사람행세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에 열심히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 그러나 삭개오는 외로웠습니다.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점점 더 외로워지고 고립되는가 봅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1등을 하면 친구가 없습니다 , 다들 라이벌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외톨이고 요즘 말로 하면 왕따가 됩니다 , 그러나 중간쯤 하든지 조금 아래로 하면 친구가 많습니다 , 라이벌이 없습니다
삭개오는 돈이 많으면 그 돈이 자기의 친구가 되어줄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여지책으로 부끄럼을 무릅쓰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삭개오를 먼저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야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留(유)하여야 하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눅19:8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물질 관에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물질을 위해 죽자살자 돈을 긁어모았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 물질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부자청년과 삭개오를 비교하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됩니까?
다윗은 성전을 짓기 위하여 자기의 사유의 은과 금을 드린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 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재물은 재수 좋아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노력의 대가만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뜻에 맞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3,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고,
둘째는 재물을 쓰되 하나님이 기억할 만한 곳에 쓰라는 뜻입니다.
한푼 더 벌기 위해 너무 아옹다옹하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돈 잃고 친구 잃게 됩니다, 우리말에 “사람 낳고 돈 낫지 돈 낳고 사람 낫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쓰되 하나님이 기억하실만한 곳에 쓰십시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은 써야 합니다, 세금 내고, 학비 대고, 생활비 하는 일은 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고 칭찬들을 만한 곳에 돈을 쓰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게시는 하나님이 다 기억하시고 계심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보다 가치 있고, 요긴한데 사용하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은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시가 불타듯이, 소돔과 고모라 가 유황불에 타 버리듯이 모두 불타버릴 것입니다. 무엇만이 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 영원한 것만은 남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보물의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부탁합니다 여러분들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그리고 어느 정도 노후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저금을 해 놓으십시오 다 교회에 바치지 마시고 말입니다, 나이가 많으실 때에 자식들에게 이 눈치 저 눈치보면서 구걸하며 동냥 얻지 마시고 명절 때에 자식들이 찾아오면 자동차 가스 비라도 주십시오 그리고 손자들 가방이라도 사 주시면 한 번 올 것을 두 번 오고 두 번 올 것을 네 번 다섯 번 옵니다
24절의 재물(mammon)이란 뜻은 원래 '위탁한다' '어떤 사람의 감독 하에 둔다'라고 하는 수동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이 돈의 속성상 능동적으로 변해서 '의지한다'는 뜻으로 바뀌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재물과 보화가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 혹시 지금 그것이 하나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식, 명예, 사업, 집, 자동차 저금통장, 옷, 또는 부동산이나 증권투자 등 세상의 것들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늘에 투자하십시오
사회복지사업에 쓰고싶지 않습니까? 성경은 특별히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고아와 과부, 또 이에 준 하는 모든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가난한 자들, 배고픈 자들, 억눌린 자들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없는 핸디캡을 가진 자들 등, 우리 주위에는 도와야 할 대상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교사를 위해서 쓰시지 않겠습니까? 풍토병, 무지와 절망의 최악의 조건 속에서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 투자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영원한 투자입니다.
장학금으로도 써 보십시오.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금년에 우리교회는 [전하자 예수, 채우자 교회, 키우자 천국일꾼] 이란 슬로우건을 내걸었습니다, 한 사람 잘 키우면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그 외에도 성경을 사 볼 수 없는 곳에 끊임없이 성경을 사서 나누어주는 국제기드온 협회 같은 곳 에 투자해 보십시오.
4, 땅에 쌓아둬서는 안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땅에는 좀과 동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6: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銅綠)이란 어떤 해충이 파먹는다는 뜻이며 결국 녹이 쓸어서 부식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좀과 동록 이란 말은 의복을 망가뜨리는 좀과 같은 것, 쥐가 창고의 곡식을 먹어버리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물건이면 무엇합니까? 우리가 사용도 못해 보고 썩고 부패해 버린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은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이리저리 숨기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것을 뒤에 두고 훌쩍 세상을 떠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죽음 건너편에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쓸모 없는 폐품이 되고 맙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늙지 않으려고 좋다는 것은 다 사서 바르고 찍고 문지르고 야단이지만 속은 점점 썩어져 들어가고, 병들어갑니다, 결국 빈 껍데기가 됩니다
둘째/도적을 맞기 때문입니다 .
마6:9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물질의 소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불행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고, 권력만 있으면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으면 도적과 강도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도적을 맞아 본 분들이 없습니까?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섬짓하고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생각할수록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 돈 가지고 좋은 일이나 할걸 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고아원, 양로원을 갖다 주든지 선교헌금이나 교회 건축 헌금을 했더라면 하며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다가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돈은 잃어버려도 목숨만은 건졌으니 감사하지 라고 말입니다.
저도 신혼 때에 조그만 단간 방에 살았는데 아마 결혼한지 한 달이 체 안 되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부산 범일동 변전소 뒷 동리에 부엌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면 비키니 옷장 하나 놓고 자그만 책상,의자 놓고 삼단 요를 펴면 딱 맞는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 방 뒤편에는 좁은 골목이 있고 그 골목 쪽을 향하여 자그만 봉창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닫고 여름에는 반쯤 방충망을 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면서 머리맡에다 결혼식 때 받은 예물시계를 끌어놓고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기도시간에 일어나 보니 시계가 둘 다 없어졌습니다 어디 잘 못 놓았는가 생각했는데 보니 뒤편 골목 쪽으로 열린 방충망을 뚫고 길다란 막대기 하나가 그냥 그대로 모기장을 뚫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았더니 도둑 님이 후렛쉬를 비추고 그 막대기로 낚시를 하듯 시계를 건져 올렸을 것 같았습니다, 예물시계인데 한 개도 아니고 둘 다를 가져갔으니 아까운 생각도 들지만 가져간 도둑 님이 괘씸하기도 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한편은 가난한 전도사 주제에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닐 형편이 못되는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결하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러나 더 감사한 것은 만일 그 사람이 잠자는 저와 아내를 그 긴 막대기 끝에 칼이라도 달아서 그냥 찔러버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목숨이 살았으니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목숨이 돈보다 귀하다는 말입니다.
오늘밤에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토록 아끼고 모아놓은 재물은 누구의 손에 들어갑니까? 자식들은 유산을 서로 많이 갖겠다고 다투고 싸울 것입니다,
보물이 하늘에 있으면 하늘을 생각할 것이고, 보물이 세상에 있으면 세상만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의 삶을 사느냐 땅의 삶을 사느냐는 어디에 여러분의 보물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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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돈(2)/마6:19-34
우리는 지난주부터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아마 꽤 여러 주일 이 제목으로 설교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담스러운 주제이지만 회피해서는 안 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 경청하시고 뿐만 아니라 이 설교에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생각과 자세가 정말 기독교적이고 신앙적이다 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축복이 아니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어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질에 대하여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저는 바로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은 절대로 우리를 잘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돈은 절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축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돈 정도로 채워지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성공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돈을 많이 버는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생의 목표를 삼을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은 축복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자체가 화가 되는 악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복도 아니고 화도 아닙니다. 그냥 돈은 돈입니다. 돈은 선과 악 그리고 화와 복이 될 만한 것이 못됩니다.
복은 정직하게 벌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쓰면 선이 되고 복이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쓸 줄 모르면 악이 되고 화가 됩니다. 악과 선 그리고 화와 복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돈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이 복이 아니라는 말씀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화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 : 10)
이 말씀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이지 돈 자체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면 참으로 엉뚱해지기가 쉽습니다. 그 엉뚱한 생각 중에 하나가 바로 돈을 무조건 죄악 시 하는 금욕주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돈 자체가 우리에게 복을 주고 화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우리 인간의 생각과 자세가 우리에게 화와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돈에 대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반듯한 균형감각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도 그냥 돈을 축복인 줄 알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돈을 하나님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보다 더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돈에 대하여 바른 계획을 가지고 규모 있게 사는 것까지 금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저축을 금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후와 어려운 때를 위하여 미리 미리 저축을 해 두는 것을 지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근거를 요셉에게서 찾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안타까워 할 때 요셉은 그것이 칠 년 풍년 때 칠 년 흉년을 대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그것을 바로 왕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칠 년 풍년 때 칠 년 흉년을 대비하였기 때문에 애굽과 근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칠 년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칠 년 풍년 때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고를 지어 저축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창고만 지었다가 하나님께 불리움을 받았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이 있습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보편적으로 볼 때 청년과 장년의 때가 칠 년 풍년이라면 노년의 때가 칠 년 흉년의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과 장년의 때에 풍년이 들었다고 흉년의 때를 대비하지 아니하고 흥청망청 다 돈을 써버린다면 노년의 때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폐가 되는 그런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돈을 하나님처럼 믿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저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잠언 6장에서 개미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름에 겨울을 예비하는 개미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 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 니라 (잠 6: 6 - 8)
여기서 말씀하는 '예비한다'는 말씀과 '모은다'는 말씀은 '저축을 한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저축하는 것을 믿음 없이 땅에 보물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극단주의로서 땅에 보물을 쌓고 사는 것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해를 주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영락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에 대하여 말을 할 때 그 분의 훌륭함을 무통장 무소유에서 찾았습니다. 물론 한 목사님이 물질에 대한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사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가 정말 본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하여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사신 것을 무통장 무소유에서 찾는 것은 오히려 불교적인 사고방식이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아닙니다.
물질에 대하여 깨끗하게 살려면 무통장 무소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는 극단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을 썼습니다. 내용은 한경직 목사님의 훌륭하심을 무통장 무소유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불교의 스님과 같이 독신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고 있는 생활인입니다.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불교의 스님은 통장과 소유가 없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목사는 통장과 소유가 없다면 문제가 됩니다. 개신교의 목사는 목사인 동시에 한 아내의 남편이고 자녀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깨끗함과 훌륭함을 무소유 무통장에서만 찾기 때문에 우리 개신교는 천주교와 불교에 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에서 보면 개신교의 목사는 돈을 밝히는 삯꾼처럼 보이고 세상 속인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무소유 무통장이었어도 전혀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영락교회가 목사님에 대한 대우와 예우를 완벽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건강을 위하여 남한산성 별장과 같이 좋은 곳에 처소를 예비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당회장과 똑같은 생활비를 매달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님만을 위하여 최소한 세 명의 풀타임 유급직원이 배치되었었습니다.
때문에 목사님은 통장과 소유가 전혀 필요 없으셨습니다. 아마 모든 목회자를 영락교회처럼 은퇴 후에 그렇게 보장해 준다면 목사님과 같이 무통장 무소유를 실천하는 목사님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영락교회가 한목사님에게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배경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그에게 통장이 없고 개인 명의의 소유가 없었다는 것만으로 훌륭한 분이었다고 추켜세우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원로목사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은퇴한 후 시무 하던 교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느보 산에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좀 냉정해 보여도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해야 할 가장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성하였다고 늘그막에 교회에서 그 댓가를 다 받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은퇴 후 교회로부터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독립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저축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할 수 있으면 시무 할 때 충분한 대우를 하여 목회자가 은퇴 후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저축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돈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한번 깊이 다루어야 할 주제 중에 하나는 청빈(淸貧)입니다.
청빈은 가난하게 살아도 깨끗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함 = 깨끗함으로 이해되거나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청빈이 그렇게 왜곡되게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깨끗한 삶을 살려면 무조건 가난해 져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결론이 그렇게 나오면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것은 무조건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마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같은 아주 건강치 못하고 위험한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깨끗함은 깨끗함에 있는 것이지 무조건 가난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하게 살기 위하여 가난해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무조건 가난해야만 깨끗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가난을 찬양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에 임택진 목사님 사모님이 말씀하셨다는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지는 않아'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은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저도 그런 정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난을 무서워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이 무서워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하여 깨끗함과 바름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함으로 자신의 깨끗함을 과시하는 그런 유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가난이 싫습니다. 가난을 싫어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가난을 좋아한다거나 가난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정직한 것도 옳은 것도 아닙니다. 또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들에게 가난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에게 가난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것이 깨끗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아주 확신하고 있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난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부유하게 살 욕심에 양심을 버리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무조건 언제나 가난하게 살아야만 그것이 훌륭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돈에 대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축복으로 생각하여 땅에 보물을 쌓는 것으로 생의 목적을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을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며 무조건 부자가 되면 성공한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잘 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을 거기에 두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지금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물질은 축복이 아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일은 너희를 위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반대로 돈에 대하여 극단적이고 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돈을 무조건 죄악시하여 저축을 하고 통장을 가지고 규모 있게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 없는 불신앙 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더 골치 아픈 것은 돈에 대하여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돈을 벌어 넉넉하게 사는 것이 좋은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목회자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지도자는 무조건 가난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돈에 대하여 반듯한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돈은 선도 아니고 축복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은 악도 아니고 화도 아닙니다. 돈에 대한 바르고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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