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테스트 2002-02-16 11:39:11 read : 201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린도전서 3:12-15) 2002. 2. 3
몇 년 전 영국의 어떤 사람이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답니다.
"내가 예수 믿고 30년 간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면서 수 없는 설교를 들었는데 기억되는 설교는 없다. 그러니 목사님들은 설교 준비에 시간과 전력을 다 쏟을 필요 없이 다른 것에 전력을 쏟으면 좋겠다. 30년 간 들어도 기억되는 설교가 없으니…."
이렇게 비꼬니 이런 저런 논쟁이 신문에 왔다갔다 했는데, 그 논쟁이 언제 끝났는지 아십니까?
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이런 글을 실은 후입니다.
"나는 아내랑 결혼해서 30년간 살면서 3만 2천 그릇의 밥을 먹었다. 아내가 해 주는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지금 생각하니 무슨 반찬을 먹었는지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밥을 먹어서 내가 살아 있지, 그 밥을 먹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나는 것이 없어도 그 말씀을 먹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래도 저래도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이 말씀 때문에 여러분이 모르는 순간에 신앙이 죽죽 자라고, 믿음이 죽죽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너지는 언제나 충전시켜야 됩니다.
서울에서 미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연료를 500드럼씩 받아 갑니다. 500드럼, 그 엄청난 것을 싣고 갑니다. 미국으로 가다가 그쪽에 어떤 상황이 발생해서 못 가게 될 때 다시 일본이나 캐나다로 돌아올 수 있는 여유 분의 기름까지 준비해서 싣고 가는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갈 때 그 교회 사모님이 저와 제 아내를 태워 주었는데, 그 좋은 차가 가다가 길에 섰습니다. 똑똑한 사모님이 기름의 계기판을 보지 않고 그냥 갔기 때문입니다. 차가 중간에 서는 바람에 호텔 직원과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차가 작기나 합니까?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가 고갈되면, 신앙 생활이 stop되면 우리는 망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일마다 영적인 주유소인 교회에 와서 에너지를 공급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뿐 아니라, 두 주 이상 살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아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주의 에너지 받았으니 다음 주에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유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교회는 영적인 주유소다."
오늘 밤에도 하나님께 영적으로 에너지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의 테스트."
하나님의 테스트(시험)가 있습니다.
남편이 밥을 먹어 보면, 그 밥을 할 때 아내가 정성을 심었는지, 대충 했는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는지를 압니다.
학생들이 실력이 있다고 까불어도 시험지를 보면 실력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잘 하는 것 같아도, 자기가 공부를 잘 했다고 전학을 와서 막 떠들어도 시험을 치면 실력이 드러납니다. 이번에 미목회에서 만난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영문과를 나온 부목사님이 계시는데, 영어를 좀 하는 척해서 미국인 손님이 왔을 때 통역을 하라고 불렀더니, "저는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습니다."하며 도망을 가더랍니다.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으니 영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박 모 목사님은 용기도 있고 유머도 있고 참 좋은 분입니다. 영어도 잘 하시는데, 교회당이 없어 캐나다의 한 교회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자기 교회 주최로 그 지역의 노인들을 모셔서 행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개회 예배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해서 교회로 가니, 캐나다 목사님이 뜰에 계셨습니다. 서로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캐나다 목사님에게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 오늘 노인들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데 성경 봉독만 좀 해 주시지요."
"예, 그러지요."
캐나다 목사님이 기쁘게 응하셨습니다.
예배 시간에 성경 봉독을 캐나다 목사님이 나와서 한다고 소개했더니, 목사님이 나와서 성경 봉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캐나다 목사님과 커뮤니케이션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박 목사님이 설교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영어를 잘 한다 해도 설교 통역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박 목사님의 수준이 설교 통역을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통역을 하는데, 어떤 말씀은 들리고 어떤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네가 설교 준비한 대로 해라.' 하는 깨달음이 오더랍니다. 그래서 캐나다 목사님은 영어로 자기 설교를 하고, 박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했습니다. 노인들은 영어를 잘 모르니 괜찮았습니다. 노인들은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잘 못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우리 교민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의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래도 우리가 미국 시민인데 이래서야 되겠나? 이제 우리 서로 영어로만 말하자."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밖에서 들어가려고 "띵동!"하고 벨을 울렸습니다. 안에 있던 할아버지의 가 물었습니다.
"who(후)꼬?"
"me(미)랑께."
영어가 쉽지 않습니다.
박 목사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영어를 잘 모르고, 또 통역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배짱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자신이 준비해 온 설교를 했습니다.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니, 노인들이 "목사님이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난처하기도 했지만, 노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요, 영어를 잘 한다고 하니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니,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서울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후 캐나다에 유학 중인 학생이 떡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 자네가 웬일이야?"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용기 있으시던데요?"
목사님의 얼굴이 고추잠자리가 되었답니다.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충성을 하는 것도 다 드러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충성하고 많은 장로님들과 안수 집사님들, 권사님들, 성가대원들, 교사들, 구역장들, 안내위원들, 차챵 안내위원들이 다 귀하게 충성하는데, 사람이 보기에는 모두 시간과 물질을 바치며 귀하게 충성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테스트하실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 같고 어떤 사람은 은 같고 어떤 사람은 보석 같은데, 어떤 사람은 나무 같고 어떤 사람은 짚 같고 어떤 사람은 풀 같다는 것입니다.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풀을 두고 불이 지나가면 나무와 짚과 풀은 타버립니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은 남아 있습니다.
지용수의 충성이 예수님의 테스트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충성이 주님의 테스트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도 받았습니다.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테스트는 구원 받을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 상 주실 사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사의 월급이나 유치원 보모 월급이나 똑같은 공산주의는 망합니다. 월급이 똑같으면 누가 힘든 일을 하겠습니까? 눈이 무르도록 공부하고 시체를 만지는 의사 선생님은 한 달에 이천만 원 받아도 많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일하는 사람들이 의사만큼 월급을 받으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사 사장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며 애쓰고 노력합니까? 그런데 사원이 회사 사장님하고 똑같은 집에서 살고, 똑같은 차, 똑같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누가 사장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사장님이 수입이 많다고 그것을 질투하면 안 됩니다. 많은 재산을 투자하고 온 정성을 다 바치는데, 수입이 근로자와 똑같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망합니다. 회사 사장이 부유해서, 회사에 이익이 많아서 회사를 하나 더 세우면 많은 실직자들이 거기에서 일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똑같이 나누어 먹으면 실직자는 영원한 실직자가 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을 걸고 열심히 목회하는 분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독일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는 목사님의 사례비를 정부에서 주니 교회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각 사람이 일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일하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루하루 테스트하십니다. 하루하루 우리 충성도 보시고, 한 달 한 달, 한 해 한 해도 보시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불로 다 태워서 누구의 충성이 진짜인지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때 금으로, 은으로, 다이아몬드로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짚으로, 나무로, 풀로 나타나면 재뿐인데, 그런 사람 어떻게 됩니까?
『해를 받으리니…』
해를 받으면 지옥 갑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받는데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불 가운데서 구원 받는다고 하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소돔 고모라에서 롯이 구원 받을 때, 불 가운데서 나올 때 알거지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부끄럽게 나왔습니다.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두 사위는 타 죽고, 그는 두 딸과 알거지가 되어서 부끄럽게 나왔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천국에 가면 금 면류관, 별이 달린 보석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정말 아름다운 면류관을 쓰고 찬란한 옷을 입고 큰 저택에 사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면류관 없이 모자도 없이 옷도 별로 좋지 않은 것을 입고 조그만 단칸집에 살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부인이 꿈에 천당에 갔답니다.
너무 놀라운 집들과 길이라 "야! 야!" 하는데, 한켠에 있는 특별히 큰 저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천사들이 집을 짓고 있었는데 거의 다 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황금 문으로 되어 있는 그 저택이 너무 멋져서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천사님, 저 큰 저택은 누구의 집이에요?"
"지용수 목사의 집이다."
여러분, 천당의 제 집이 그렇게 멋지고 좋답니다. 훗날 제 집에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천당의 제 집에는 금 느티나무도 있을 것입니다. 제게 좋은 일이 있었을 때 우리 장로님들이 순금으로 느티나무를 해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것이 도금인 줄 알았는데, 진짜 순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얼마나 통도 크고, 손도 크고, 꿈도 큰지 모릅니다. 순금 느티나무를 받으니 황홀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하러 교회에 와서 엎드리니,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창원의 도둑이 다 우리 집에 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부자는 기도가 잘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여!' 하는데 느티나무가 왔다갔다 했습니다. 며칠간 새벽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니 얼마나 편안한지, 새벽 기도할 때 금 느티나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자가 제일 높은 곳은 하나님의 은행입니다. 지금 그 금 느티나무가 천국의 제 집에서 죽죽 자라고 있어서 여러분이 다 들어와도 괜찮을 것입니다. 훗날 천당의 제 집의 금 느티나무 아래에서 천당의 커피를 마십시다.
그런데 그 부인이 "야! 우리 목사님 집 참 좋다." 하며 천당의 제 집을 보다가 물었답니다.
"그런데 천사님, 제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집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보고 싶어요. 보여 주세요."
"보지 않는 것이 좋대도."
"제발 보여 주세요."
"그러면 따라오너라."
천당에도 시골이 있더랍니다. 시골의 한 켠에 있는 단칸집, 작은 집 앞에 천사가 서더니, "이것이 네 집이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부인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저는 여기에서 살 수 없어요. 부끄러워서 못 살겠어요. 그리고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아무리 목사님과 저의 집이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나요?"
"불공평이 공평이다. 천당의 집은 땅에서 충성하고 헌금하고 봉사한 대로 짓는 것이다. 그리고 천당에는 이사가 없다."
여러분, 천당에는 이사가 없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는 작은 집에서 살다가 큰 집으로 옮길 수 있는데, 천당에서는 그 집에서 영원히 살아야 됩니다.
천당에서는 이사가 없다고 하니, 그 부인이 더욱 간절히 천사에게 말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에서 살 수 없어요. 부끄러워서 도저히 살 수 없어요. 저를 세상에 보내어 주시면 저도 목사님처럼 충성하다 올 테니, 보내어 주세요."
깨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 그분이 아주 귀하게 충성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천당으로 이사가신다면 여러분의 집이 몇 평이나 되겠습니까? 천당의 집 평수도 늘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천당의 집도 꾸미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좋은 차를 타고 큰 집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서는 조금 초라하게 살아도 천국에서는 큰 저택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맡은 일, 직장의 일, 사업, 가정의 일에도 성실해야 하지만, 우리 주님의 일에 귀하게 충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금, 은, 보석 같은 충성을 하게 됩니까?
따라 합시다.
"주님의 일을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
이번 집회 때에 판사이신 젊은 집사님이 교회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데도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밤에는 물론 새벽에도 다 참석했습니다. 집회를 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교회 옆에서 살아도 집회를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참석하지 않습니다. .
두 주 뒤에 우리가 이종용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합니다. 이종용 목사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수였습니다. 그분이 부른 히트곡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잘 아시는데, 저는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어디에서 많이 본 분 같았지만,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분이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목회를 얼마나 귀하게 하시는지, 몇 년 만에 장년이 1000여 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고, 불덩어리였습니다. 그분을 모시고 우리가 집회를 하는데, 하나님의 성회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두 시간 밖의 거리에서도 오지만, 하나님의 성회를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3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도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회를 귀히 여겨야 됩니다.
또 이번 집회 때에 제 평생에 제일 감동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구에서 유명한 식당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그 교회에 계셨습니다. 식당 문을 하루 닫으면 몇 천만 원을 손해(부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보는데도, 주일에는 식당 문을 딱 닫는답니다. 그런데 토요일에 손님이 얼마나 많이 밀려오는지, 이틀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예약도 할 수가 없답니다.
그 식당에서 제가 첫날 저녁과 그 다음 날 점심까지 세 번이나 대접을 받았는데, 특히 서빙을 받을 때는 감동도 같이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분은 도지사가 식사하러 와도 방에 들어가지 않고 검찰 총장이 식사하러 와도 문 앞에서만 인사하지 방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단한 여자입니다. 대통령 상을 세 번이나 받았고, 특강하러 서울대까지 가는 굉장한 분인데 목사님께 그렇게 서빙하는 것을 보니 놀랍네요."
그 집사님이 은혜가 있으니 도지사보다, 검찰 총장보다 하나님의 종이 더 중한 줄 알아서 그렇게 한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중히 여기는 일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중히 여기는 일은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한 청년에게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 애인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애인이 사는 길은 사람의 간을 먹는 것뿐이라고 하니, 청년이 자기 어머니의 간을 꺼내어 갔답니다.
아들을 키우는 부인들은 가슴에 철판을 깔고 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식이 겁나서 살겠습니까? 어릴 때는 어머니가 중한데 청년 때는 애인이 중하니 어머니의 간을 갖고 가서 애인을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중히 여기면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일이 중한 것을 알면 자신의 간 같은 것을 하나님께, 교회에 바치게 됩니다. 할렐루야! 남들이 보면 미친 것 같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중하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하면 예수님의 일이 중하고, 하나님이 귀하면 하나님 교회의 일이 중합니다. 제가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어머니의 생신이 토요일이나 주일이 되면 축하 드리러 갈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어머니는 제게 귀한 분, 제 생명 같은 분이지만 어머니보다 하나님이 더 귀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더 귀하기에, 설교 준비가 더 귀하기에, 어머니 생신을 제가 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중히 여기는 일에 우리의 귀한 시간, 귀한 정성, 최고의 것을 다 쏟게 되는 것입니다.
역대상 29장을 보면, 다윗이 "주의 전을 위하여 내 힘을 다하여 드렸노라."하며 기뻐합니다. 왕이 자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해 바쳤노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29장 9절에 보면, 백성들도 왕을 따라 다 바치고는 기뻐서, 즐거워서 그 기쁨을 어떻게 가누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중하니 자기의 것을 다 쏟고도 좋아서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금 은 보석 같은 충성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따라 합시다.
"하나님을,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해야 한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예수님께 빵을 구워 드리고, 계란 후라이를 해 드리고, 좋은 이불을 펴 드리고, 서빙하면서 여관비를 받았습니까? 빵 값을 받았습니까? 계란 후라이비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시집갈 때 쓰려고 모아 놓은 1년 품삯의 향유가 들어 있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다 바치고 돈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왜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니 자녀를 위해 아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면 귀한 충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아까워서 못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영화를 27년 전쯤에 보았는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가인이 밀을 척척 베어서 한아름 되는 밀을 제단에 놓습니다. 그런데 아까운 생각이 들어 반 단을 도로 갖고 갑니다. 그리고는 그것도 아까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니 연기가 다 그에게로 가 눈물이 납니다. 연기를 피해 도망가는 그에게 연기가 따라갑니다. 아까워하면서 바치는 그의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 중에 제일 아름답고 토실토실 살찐 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을 바치니 연기가 하늘로 좍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 최고의 것을 주님께 바치게 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신앙이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중한 줄을 알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제일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주님이면, 우리는 주님 교회에서 금 같고 은 같고 보석 같은 충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날마다 기쁘고, 달마다 복을 받고, 해마다 전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 시험(테스트)의 불에서 남아 큰 상을 받고, 영원한 하늘 나라의 큰 저택에서 영광 중에 왕 노릇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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