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2002-02-04 13:47:52 read : 190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에베소서 3장14-19절) 2002.2.3
신학자 부버(Martin Buber)는 "오늘날 집단(Collectivity)은 있으나 공동사회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깨어진 공동체를 재건할 사명이 있습니다. 공동사회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Dialogue)가 있는 곳에서만 그 성립이 가능합니다. 집단이란 것은 무수한 개인들을 어떤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무장을 시키고 장비를 주어 한데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반대로 공동사회란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옆에서 바라만 보고 걸어가는 그런 사회가 아니고 한 가지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여 나갈 때 피차에 서로 어울려서 "나"를 "너"에게 흘러 들어가도록 동적으로 서로 상대방의 인격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그런 사회입니다. 교회는 이런 인격과 인격이 만나서 긴밀한 상호관계에서 대화를 하고, "나"를 "너"에게 주는 그런 공동사회를 공동체의 삶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하나되어 오순도순 한 지붕 아래 나누는 삶은 행복과 불행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마음을 통하고 있으므로 흥정하고 속셈하는 사회와는 달리 가족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삽니다. 한 가족이 대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합니다. 서로의 이해를 통해 모르는 일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을 나누는 그 자리에 부모와 자녀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부모님의 사랑을 알 때 진정한 효도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 때 진정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순종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사랑을 모르면 억지로, 마지못해서 힘들게 하지만 사랑을 알게되면 기쁨으로 즐겁게 하게됩니다.
신앙생활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고 19절을 보면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길도 알아야 가고, 수학도 알아야 문제를 풉니다. 모르면 잘못 행하게됩니다.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충만해져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충만한가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원망 불평이 가득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게됩니다. 미움이 가득하면 비판하고 욕하고 미워하며 살게됩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게됩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사랑하며 살게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나타내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1서3:18을 보면 " 자녀들아 우리가 말로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하였습니다. 사랑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잘못을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요, 은혜 받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를 알아야 합니다.
바다보다 넓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넓이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그 범위가 너무나 좁습니다. 사랑의 범위는 단지 가족이나 친구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범위가 측량할 수 없이 넓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전 세계, 전 우주를 품에 안으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이 넓어져야 합니다. 극히 제한적이고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덮어주고 품에 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에베소 교인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사랑의 토양에 내 심정의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토양으로부터 모든 영적인 영양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모든 뿌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둘 때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활기를 얻습니다.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보는 것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느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차원이 높고 넓어서,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즉 우리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학구적으로 따지며 논리를 펴도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을 4차원의 세계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18-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넓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넓습니다. 사랑은 몇 사람에게 제한된 것이기에 범세계적으로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을 빠짐없이 다 사랑할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데서 오는 불만족스러운 사랑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되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세상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고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지만, 나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놓치지 않고 그 가슴에 품지만, 유독 나만을 사랑하고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사랑을 나에게 쏟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각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제일 사랑하십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넓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길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오래오래 계속되는 사랑이지만 끊어지지 않습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도 이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설혹 내가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죄 없이, 죄를 범하지 않고 한 달 정도는 경건하게 살 수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으로 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나도 모르게 말로써 남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죄를 범하고 뒤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해 주실까? 이렇게 더러운 죄인, 용서를 빌었는데도 또 죄를 범하는 이 못된 죄인을 하나님이 과연 사랑해 주실까?" 하고 허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엄청나서 내가 아무리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죄를 범하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십니다. 내가 실수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웃음과 욕을 당할 정도의 처참한 자리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믿어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오늘은 사랑하다가 내일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익에 따라 변하고, 감정에 따라 변하고,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프게 하고 실수하고 죄를 짓고 잘못을 할 때도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까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 깊이는 너무 깊어서 인간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얕은 사랑을 합니다. 껍데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쉽게 변하고 맙니다. 나무도 뿌리가 깊지 못하면 쉽게 넘어지고 가뭄에 말라죽습니다. 샘도 깊지 못하면 날이 가물면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깊은 샘물은 오래갑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깊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면 쉽게 변하는 것입니다. 돈 있고 건강하고 잘 살 때는 친구도 많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만 실패하고 건강 잃고 어려워지고 실패의 깊은 수렁에 빠지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다 떠나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다 떠나가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어려워지면 더욱더 주님은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는 너무 깊어서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여러분도 다른 사람이 고통과 괴로움의 깊은 수렁에서 고통 당할 때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낮아지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신 하나님의 사랑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그 높이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 올려서 자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꿔 놓기를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는 모든 권세와 영광, 부귀와 행복, 영생의 축복들을 우리와 나누길 원하십니다. 그런 수준에까지 우리를 끌어올리기를 원하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다가도 너무 쉽게 헤어지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얼마나 조건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는 다른 차원이 높은 사랑입니다. 친구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나에게 덕이 되는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치는 사람까지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상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넓고, 길고, 깊고, 높은 그 사랑을 용서받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이렇게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맛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꿉니다. 사랑의 힘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찬송가 414장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의 사랑이 비췰 때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 활기차게 다 변하네."(2절) 이 세상이 아름답고 활기차게 변하는 것을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더욱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가슴속에서 항상 꿈틀거려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높이 도달해야 될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성경도 많이 알아야 하고 기도도 많이 해야 하고 봉사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높은 곳까지 끊임없이 사고하면서 올라가야 될 정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 바닥에서 엎드려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한 경지까지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원하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주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평범한 자리에 머물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영적인 여행을 날마다 계속합시다.
교회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예수를 오래 믿었든, 이제 처음 믿었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가볍고 옅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더 알 수 있도록 사모하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고 성령을 통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 사랑을 가슴 가득히 부어주셔서 아름다운 은혜의 경지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생각하고 남을 보고 자기 마음 생긴 대로 행동도 합니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들려지기도 하고 안 들려지기도 하고, 이렇게 듣기도 하고, 저렇게 듣기도 하고, 이렇게 깨닫기도 하고 정반대로 깨닫기도 합니다. "내 마음 생긴 대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낫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하고 내 생각대로 한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철없는 사람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내 마음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인정을 하면서부터 이제 그 생활이 시작됩니다.
브라이언 카바로프는 그가 쓴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마치 정원과 같다. 그래서 거기에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곡식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고, 좋은 곡식은 좋은 종자를 심어도 잘 자라질 않는다. 그리고 잡초와 곡식이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그리고 곡식은 시들시들 말라서 그만 죽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결국 가꾸는 것이다".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그 땅에서 오는 좋은 기운을 받고 영양을 받아서 곡식이 잘 자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은, 알게 모르게 못된 생각은 그저 별 노력 없이도 무성하게 자라지만 좋은 생각과 착한 마음은 보전하려고 애써도 어느 사이에 그만 나도 모르게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이런 사람이었던가?" 내 마음 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어올 때, "어찌 내 마음 속에 이런 악한 마음이 있단 말인가?" 하고 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에는 사회학적으로 몇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할 때,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고 느낄 때, 고독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면서 그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한 사건에 부딪힐 때, 바로 배우자가 죽었다던가 자녀가 죽었다던가 엄청난 사건에 부딪힐 때, 그만 감당을 못합니다. 또한 자신감이 없고 자기 만족이 없을 때, 그리고 일에 대해서 불만할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내가 왜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생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 그만 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건강이 허약해 질 때, 허약해지기 시작하면 가속화되면서 점점 무너져 내리고, 염세주의와 비관주의가 내 마음을 자리잡게 되면 만사가 어둡고 괴롭고 짜증이 납니다. 도대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게 되고 정신적으로 벌써 자살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으로 죽었기에 죽음을 위한 행동을 과감하게 거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고 싶지 않으니 남의 생명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마음을 누가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까? 이 같이 기울어진 마음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성과 마음은 별도라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르고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별도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감성이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보다 더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될 줄 알면서 사랑해지질 않고, 용서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만나면 용서가 되지 않고, 정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번번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부지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봉사하며 섬기며 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고, 범사에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한숨이 나오고 원망소리가 나오고 걱정근심에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내 마음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이 속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세계, 더 원초적인 그런 속성인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길이란 오직 성령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네 속 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 말은 의지 이전의 말입니다. 내 생각이나 의지로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고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을 주장해서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먼저 깊은 곳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실 때 "바람이 임의로 와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나 성령도 그와 같으니라" 그랬습니다. 나도 모르게 성령이 내 마음을 주장할 때, 성령이 내 마음에 오실 때, 내가 이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내 심령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그의 어두운 과거, 그의 나약함 다 이기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은혜에 충만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오늘 성경에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장 7절에 보면 "내 마음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님이 나를 주장하고 주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때, 지식에 넘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항상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믿음으로 우리는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그 믿음이 바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교회 다닌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내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다스려 주실 때 그때만이 자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 새사람의 윤리성을 말하는 것인데 계속해서 오직 사랑을 깨달아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지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로서만 마음은 깨끗해 질 수 있고 굳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넘치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이지 내 힘으로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몇 번 맹세해도 안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나를 부정하고 내가 참으로 겸손할 수 있고, 겸손하게 될 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번민은 아직도 교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 여유가 있습니다. 충만함이 있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저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이런 여건에서도 저런 여건에서 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데일 카네기의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하나가 방관자입니다. 대부분이 방관자인데 방관자이면서 막연한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성공해도 두렵고 실패해도 두려운 것입니다. 또 하나는 패배자입니다. 철저하게 패배의식으로 삽니다. 항상 실패한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같이 못하기 때문에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고 못 가진 것만 생각합니다. 항상 패배의식에 삽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은혜의 사람은 승리의식으로 삽니다. 오늘 실패해도 이것은 다음에 성공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스케줄 속에 시나리오 속에서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여유가 있고 또한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의 응답은 사랑이요 사랑의 결과는 선함입니다. 사랑 받는 사람의 마음은 선해집니다. 정말로 사랑 받는 사람은 세상에 두 사람밖에 없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고, 그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 사람들의 허물이 보이거나 남 잘못하는 것이 보이고 못마땅한 것이 있다면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구속하신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깊이 감격하고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무 허물도 보이지 않아요. 잘못된 사람 보면 불쌍하고 나를 괴롭히는 그 누구도 불쌍하게만 보일 뿐이지 그 사람이 나쁘게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불쌍히 보이는 사람밖에는 없어요. 그리고 모든 사람의 장점을 보게 되고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러 날짐승이나 동물의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말의 표현, 얼굴표정, 손과 발로의 표현,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속 사람이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의 표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글레멘스톤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게 되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게 되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게 되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게 된다." 팔자 한탄은 금물입니다. 생을 속단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운명은 내 마음에 달려 있고 내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속 사람이 건강해지면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과 미숙한 사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 사람이 건강해 지는 순간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됩니다. 지식에 넘치는 사랑, 분에 넘치는 사랑을 느낄 때에 거기서부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을 재미있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기에 나도 저를 사랑한다" 이것은 미숙한 사랑입니다.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될 때에 이것도 미숙한 사랑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성숙한 사랑은 창조적인 것입니다. 대상이 그 누구냐를 묻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아름답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좋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랑입니다. 속 사람이 건강해 지는 순간 사랑을 알게 돕니다. 전에는 사랑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사랑이요, 전에는 버려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나님 앞에 내가 가장 소중합니다. 자그마한 일이라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 하나 하나가 오늘 와서는 이것도 고맙고 저것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 넘치는 사랑을 순간 순간 깨닫고, 또 깨닫고, 그럴 때마다 더 건강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 건강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에, 사랑을 행할 때에,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있을 때에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건강할 때에 많은 사람에게 건강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에 참아줄 수도 있고,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일방적이기보다 주고받음으로 그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나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더 뜨겁게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받은 사랑도 쏟아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감사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사랑을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하고 찬송할 때, 기쁨이 충만해지고 충성할 열심히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 봉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따르고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은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만족하며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 아래 사는 강건한 인격의 성도요, 사랑 충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성도가 되면 세상에 부족함이 없는 참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체되거나, 안주하지 말고 계속 자라도록, 하나님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계속 자라도록 기도하십시다. 자람 속에 길이 있고 희망, 기쁨이 있습니다. 자람에는 인간의 편견, 한계, 모순을 넘어서 간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사랑을 허락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세상을 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넓게 알고, 높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을 주시고, 말씀을 통해 이 사랑에 흠뻑 젖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자유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능력 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소망 있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도록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 사랑의 확증을 얻지 못하여 우리의 마음은 잡초로, 세상욕심으로, 그 더러운 것들로 얼룩질 때가 많습니다. 주님, 용서하시고 우리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순간 순간 확인하면서 늘 감격하며 늘 찬송하며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우리의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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